무인도에 간다면
때로 도시의 화려한 삶을 마다하고 모든 것을 버린 후 단순하면서도 소박한 삶을 선택한 사람들도 있다. 결국은 삶은 태도에 따라서 그것은 고통스럽기도 하고 한없이 즐거울 수도 있으니까. 최근 우여곡절 속에 국내 출간된 음악 만화 [레코스케]의 부록 [무인도] 편에 들어갈 글을 쓴 적이 있다. “무인도에 간다는 건 모든 인간관계를 정리하고 속세를 떠나는 것과 같다. 하지만 그 곳에 가면 이 지긋지긋한 속세가 무척 그리울 듯. 하나를 꼽으라면 말러 교향곡 9번이다. 번스타인과 베를린 필이 안내하는 말러의 ‘죽음의 교향곡’은 속세를 잊게 해줄 단 하나의 진통제다”. 편집의 실수로 날아가 버리긴 했지만 나의 진심이었다.
그렇다면 단 하나의 앰프를 가지고 가야한다면 무엇을 사야할까 고민한 적도 있다. 예전에 그런 질문을 나에게 던진 적이 있었다. 그리고 호기롭게 진공관 앰프를 구입했다. 그 전까지 트랜지스터 앰프로 음악을 듣다가 진공관 앰프를 구입한 건데 진공관은 EL34도 아닌 EL84다. 호환 관으로 6BQ5라는 5극 출력관으로 2차 대전 이후 필립스에서 개발된 진공관이다. 앰프의 출력은 채널당 채 20와트가 안 되는 저출력이었지만 음악 듣는 맛을 배가시켜주었다. 당시 저렴한 가격에 쉽게 구할 수 있었던 JBL의 여러 모델들 그리고 인피니티, 클립쉬 등을 멋지게 울려주었다.
말러 교향곡과 진공관 앰프라는 선택 사이엔 공통점이 존재한다. 말러 교향곡은 러닝 타임이 길고 처음엔 적응이 쉽지 않지만 들을수록 그 깊이 있는 맛을 알아가는 재미가 있다. 단시간에 듣고 잊혀지는 대중음악이 아니다. 진공관 앰프도 마찬가지로 처음 켜면 제대로 소리가 날 때까지 꽤 시간이 걸린다. 인내심이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말러 교향곡처럼 한번 듣기 시작하면 깊게 빠져든다. 그리고 비교적 유행을 타지 않는다. 불편하지만 때론 진공관을 바꾸어 듣는 재미도 있다.
다시, 여기 진공관
이후 KT88 등 다양한 진공관을 섭렵했지만 300B와 함께 EL84의 소리를 잊을 수 없었다. 첫인상이란 이토록 무섭다. 이후 오디오 리서치, BAT는 물론 맨리나 캐리 등 다양한 진공관 앰프를 섭렵해나갔다. 중간 중간 트랜지스터 앰프들도 경험했지만 잊을만하면 다시 진공관 앰프가 당겼다. 특히 요즘처럼 폭설에 온 도시의 시간이 정지된 듯 얼어버렸을 때 진공관 앰프가 없다면 왠지 허전했다.
그리고 몇 년 전 쓸 만한 진공관 앰프를 구하러 어슬렁거리다가 해외 사이트에서 프리마루나라는 앰프를 만났다. 그리고 국내 수입되면서 직접 써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결국 최상위 인티앰프 다이아로그 HP 앰프를 직접 구입해 사용하게 되었다. 일단 EL34의 매력을 다시 일깨워주었고 무엇보다 불편했던 바이어스 조정이 필요없었다. 더불어 여러 다양한 형번의 진공관 앰프도 우측에 있는 바이어스 조정 스위치를 조정하는 것만으로 쉽게 교체해 사용할 수 있었다.
EVO300
이후 프리마루나는 전체 라인업에 대해 업그레이드를 감행하면서 모델명을 바꾸었다. 결국 나는 다이아로그 HP의 대체 모델인 EVO400을 구입해 만족스럽게 사용 중이다. 그리고 최근 나머지 프리마루나 인티앰프 라인업을 순차적으로 들어보고 있다. EL34 네 발로 푸시 풀 구동하는 EVO100에 이어 초단관에 12AX7을 12AU7으로 바꾸고 출력을 높인 EVO200까지 테스트가 끝났다. 적응형 자동 바이어스 방식이라 우측의 바이어스 스위치만 조정하면 바이어스 조정도 끝이다.
이윽고 EVO300에 당도했는데 EVO300부터는 또 한 차원 높은 고지를 밟고 있다. 전체 라인업 중에 EVO100과 EVO200을 하나로 묶는다면 EVO300은 EVO400과 묶을 수 있다. EVO300부터 채용되는 여러 소자 및 기능 업그레이드가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EVO400으로 올라가면 EL34가 두 배로 증가하면서 출력이 높아지지만 그 외엔 동일하다는 점에서 EVO300은 꽤 매력적인 모델이다. 다른 모델처럼 EL34부터 KT88, KT120, KT150까지 다양한 출력관을 아주 쉽게 교체해서 사용할 수 있는 건 당연하다.
일단 하위 라인업들에 비해 EVO300은 EL34를 네 개 채용해 푸쉬 풀 구동하는 것은 동일하지만 초단 및 위상 반전에 각각 12AU7을 한 발씩 채용하면서 드라이브관까지 합하면 총 여섯 발의 12AU7을 채용하고 있다. 울트라 리니어 모드만 지원하던 것에서 트라이오드 모드가 추가되는 것도 딱 EVO300부터다. 출력관을 결속 방식에 따라서 출력도 달라지고 소리의 표적이나 뉘앙스 차이가 꽤 많이 난다는 건 사용해 본 사람들이라면 모두 아는 사실로서 꽤 매력적인 기능이다.
이 외에도 EVO300부터 달라지는 것은 꽤 많다. 예를 들어 프리마루나가 특주한 트랜스포머는 매우 우수한 성능을 보인다. EMI 노이즈나 험이 거의 없어 마치 트랜지스터 앰프처럼 깨끗한 소리를 들려준다. 하지만 여기서 더 나아가 AC 오프셋 킬러를 도입해 노이즈를 더욱 더 낮추고 있다. 내부 회로에서 신호의 순도를 최대화하기 위해 신호 전송 구간을 거의 모두 ‘포인트 투 포인트’방식으로 설계한 것은 모든 모델이 마찬가지지만 EVO300부터 스위스산 케이블을 사용한 점도 차이점이다. 이 외에 타크만 저항, DuRoch Tinfoil 커패시터 등 고급 소재들을 사용하는 것도 EVO300부터다.
서브 우퍼 출력 및 바이패스도 기본. 출중한 성능의 헤드폰 출력단도 마련되어 있어 헤드폰을 사용한다면 꼭 사용해볼만한다. EVO300은 총 다섯 조의 RCA 입력단 및 바이패스 입력단을 지원하며 아쉽게도 XLR 입력은 지원하지 않는다. 한편 스피커 출력은 8옴은 물론 4옴 등 두 개 임피던스에 각각 대응할 수 있도록 + 단자가 하나씩 더 장착되어 있다. 스피커의 임피던스를 확인하고 그에 맞게 결선하면 그만이다. 참고로 출력은 8옴 기준 채널당 42와트며 트라이오드 모드로 전환하면 24와트로 줄어든다.
더 유연하고 더 곱게
EVO200에서 EVO300으로 올라가면 힘이 더 넘친다던가 또는 스피커를 장악하면서 더 넓은 스테이지를 구사하는 그런 종류의 물리적 업그레이드가 아니다. 자동차로 치면 세밀한 부분에 더 튜닝이 들어간 듯 한 변화를 보인다. 일례로 조수미의 ‘Simple song’ 같은 곡을 들어보자. 하위 모델보다 입자가 더 고와지고 세밀한 부분들에서 음결이 더 고급스러워졌음을 알 수 있다. 사실 테스트에서 앰프 이 외에 스피커는 에스칼란테 Pinyon과 토템 마니2Sig 그리고 마이트너 MA1 DAC 등 변한 것은 전혀 없는 시스템에서 그렇다.
쉰들러 리스트 테마를 안네 소피 무터가 연주한 버전으로 들어보면서 곱고 유려한 바이올린 음색이 귀에 걸렸다. 궁금해서 케이블을 바꾸여보곤 했는데 특히 스피커 케이블에 의한 변화가 두드러졌다. 이번 매칭에선 견고하고 빠른 스타일로 너무 타이트하게 조이기보단 포근하고 윤기 있는 스타일의 케이블로 유연하게 펼쳐내는 쪽이 더 좋았다. 나의 추측이지만 EVO200에서 EVO300으로의 이행에서 이런 예민함이나 음결의 변화는 내부 와이어링의 역할도 끄지 않을까 한다. 나의 예상엔 순은 또는 적어도 은도금 동선을 사용했을 것 같다.
트라이오드 모드의 즐거움
앰프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볼륨은 아주 부드럽게 오르락내리락하며 선호하는 음량을 조정 가능하다. EVO300에 적용된 알프스 블루 벨벳 전동볼륨은 요즘 하이엔드 프리앰프처럼 아주 미세한 음량 폭을 가지진 않는다. 하지만 그리 크지 않는 나의 청음 공간에서도 그리 문제될만한 부분도 없었다. 아홉이 이상 올리지도 못했을 정도.
EVO300으로 올라오면서 기능상 가장 좋은 점은 사실 트라이오드 모드의 추가다. 5극관을 3극 모드로 작동시켜 얻는 음질적 변화는 여타 진공관 앰프에서도 많이 볼 수 있다. 하지만 각각의 개성이 의외로 뚜렷하지 못한 경우도 많은데 프리마루나 같은 경우 5극과 3극 모드의 매력이 명확하게 대비되었다. 또한 앰프를 끄지 않고 음악을 듣는 도중에 리모컨으로 울트라리니어와 트라이모드 전환이 가능해서 그 날 그날 다리해서 듣는 재미가 있다. 예를 들어 켈리 스윗의 ‘Nella fantasia’에서 그녀는 좀 더 목에 힘을 빼고 노래하며 더 낭랑할 울림을 만들어낸다.
고백하자면 나는 EVO300을 사용하면서 울트라리니어 모드보다 트라이오드 모드로 더 자주 들었다. 눈이 소복소복 쌓이던 어느 날 밤 피아노와 바이올린 소품 또는 재즈 피아노 트리오를 듣는 시간은 어쩌면 고마울 정도였다. 실제로 음악도 트라이오드 모드에서 더 달콤하고 심지어 더 아늑하게 느껴졌다. 예를 들어 정경화의 슈베르트 바이올린 소나타를 들어보면 마치 산토리 라이블 홀에서 숨죽이며 듣고 있는 듯한 느낌을 조금이나마 공감할 수 있었다. 활의 힘은 조금 적어졌지만 마치 활의 온도가 더 높아진 듯 더 곱고 말랑말랑해진 소리를 들려주었다.
핑크 플로이드, 정확히는 로저 워터스의 단말마와 같은 보컬이 꿈틀거릴 땐 그 열기가 더 상세하게 전해져왔다. 사실 EVO300은 EVO200보다 출력이 약간 더 낮아졌다. 하지만 그것은 청감상 아무것도 아니었다. 트라이오드 모드에서 힘이 완전히 빠져버려 어깨가 축 늘어진 듯한 소리를 들려주었다면 용서할 수 없었을지도. 하지만 ‘Your possible pasts’에서 1분이 지나가는 구간에서 드럼은 울트라리니어 모드보다 강도는 조금 낮아졌으나 충분히 파워풀했고 어택이나 펀치력이 조금 무뎌졌으나 이를 상쇄할만큼 풍부한 배음을 음악에 불어넣어 주었다. 단, 24와트의 위력은 생각보다 대단한 음악적 열기를 뿜어냈다.
총평
최근 테스트한 일련의 프리마루나 인티 리뷰 릴레이는 여기서 일단 일단락짓게 되었다. EVO400은 이미 내가 사용하고 있고 이미 테스트가 끝났기 때문이다. 역시 성능에 비하면 정말 합리적인 메이커라는 걸 다시 한번 느꼈다. 게다가 EVO100부터 가격대에 딱 걸맞게 설계하고 기능을 빼고 더한 모습과 그 성능차이는 무척 예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EVO300을 사용해보면서 EVO400과 거의 유사한 음색과 기능은 무척 매력적이었다. 스피커에 따라서는 굳이 EVO400까지 필요 없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EVO400으로 가면 42와트였던 EVO300에서 갑자기 70와트로 출력이 급격히 증가하지만 능률이 그리 낮지 않은 스피커라면 음색적인 차이는 별로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을 끝으로 프리마루나가 네덜란드의 조그만 진공관 앰프 메이커에서 미국은 물론 전 세계 시장에서 진공관의 신데렐라가 되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인티앰프 시리즈 리뷰를 마친다.
Written by 오디오 칼럼니스트 코난
EVO 300 Integrated Specifications
Price : $3,999
Power(Ultra-linear) : 42 watts x 2 (EL34) (8Ω, 1% THD)
Power(Triode) : 24 watts x 2 (EL34) (8Ω, 1% THD)
Inputs : 5x Stereo RCA, Stereo RCA HT Bypass
Outputs :
4 & 8 Ω / RCA Stereo/Mono Subwoofer / Stereo RCA Tape Out / 1/4″ Headphone
Freq. Response : 10Hz-65kHz +/- 1dB
THD : < 0.2% @ 1W / < 2% @ Rated Power
S/N Ratio : 86 dB, 95 dBA
Input Sensitivity : 270 mV (EL34)
Input Impedance : 100kΩ
Power Consumption :
290 watts (EL34) / 300 watts (KT88) / 330 watts (KT120) / 340 watts (KT150)
Standard Tube Complement : 6 X 12AU7 & 4 X EL34
Dimensions (WxHxD) : 15.2″ x 8.1″ x 15.9″
Weight : 68.2 lbs
공식 수입원 : 웅진음향
연락처 : 02-6338-8525
공식 소비자가격 : 5,200,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