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레이드오프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모순된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론적으로는 모두 다 얻을 수 있을 것 같은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책만 보고 진실을 탐구하던 사람들이 현실에선 어처구니없는 무능력자로 전락하는 건 이런 모순 앞에서 당황하고 이해 불가능한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때론 그 모순도 삶을 이루는 하나의 요소여서 하나를 얻고 싶다면 다른 하나를 내어주는 용기가 필요하다. 트레이드오프 상황은 종종 사람을 지혜롭게 만든다.
오디오에서도 이런 트레이드오프 상황은 자주 내 앞에 출몰해 고민을 안겨준다. 돈이 많건 적건 또는 경험이 많던 적건, 공간이 궁궐같다고 하더라도 피해갈 수 없는 모순들이 도처에 존재한다. 전도도는 은이 더 좋고 더 비싸지만 은선만 사용하면 내가 얻고 싶은 소리를 낼 수 없을 때 저 저렴한 동선은 하나의 대안이 된다. 때로 3웨이 플로어스탠딩 타입의 대형기가 여러 면에서 뛰어난 소리지만 때론 2웨이 밀폐형 북셀프를 듣고 싶기도 한 것이다. 결국 두 대를 운용하는 게 좋다.
앰프의 경우엔 두 가지 선택 사항이 존재한다. 하나는 트랜지스터 또 하나는 진공관을 소자로 쓰는 것이다. 강력한 스피커 제어력과 정교한 에지, 빠르고 명쾌한 추진력과 리듬감은 트랜지스터가 앞서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진공관 특유의 부드럽고 풍부한 배음, 따스한 온도감, 촉촉한 음결은 진공관만의 것이다. 이 둘을 하나의 앰프에서 얻으려는 것은 욕심이다. 하나를 얻고자 하면 다른 하나는 내어주어야 한다. 결국 이 모두를 즐기기 위해선 두 종류의 앰프를 함께 운용하는 것이다.
필자 같은 경우 이 둘을 모두 얻으려 진공관 프리앰프와 트랜지스터 파워앰프를 많이 매칭했지만 좋은 매칭을 찾기가 상당히 어려웠다. 결국 언제부턴가 트랜지시터 앰프와 진공관 앰프를 각각 하나씩 운용하게 되었다. 트랜지스터는 능률이 낮은 스피커를 강력하게 드라이빙하면서 높은 SN비와 낮은 THD 위주의 능력을, 진공관은 비교적 능률이 높으면서 대신 음의 감촉과 온기가 중요시되는 성능을 목표로 했다.
트랜지스터와 진공관 사운드의 융화
그러던 중 찾게 된 앰프가 프리마루나라는 앰프였다. 이전에 사용하던 캐리 300B 앰프를 내보내고 프리마루마를 들이게 된 이유는 무엇보다 편의성이다. 진공관 앰프는 그 독보적인 음질과 배음 특성으로 인해 꼭 진공관 아니면 마음에 들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종종 불편함을 동반한다. 우선 진공관의 뜨거운 열은 뜬금없이 조심성을 발휘하게 만든다. 또한 예열시간이 좀 더 길어 수십분 정도 지나야 제 소리를 낸다. 요즘처럼 바쁜 일상 속에선 답답할 때도 있다. 가장 중요한 건 바이어스 세팅이다. 출력관을 다른 걸로 다른 타입으로 교체한다던가 또는 신관이 아닌 구관으로 교체하는 경우 바이어스 세팅은 기본이다. 테스터기를 들고 한동안 설쳐야하는데 이게 여간 귀찮은 게 아니다. 진공관을 교체하지 않더라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바이어스는 틀어진다.
프리마루나의 경우 열이 난다는 것 외엔 위에서 열거한 단점이 없다. 일단 적응형 바이어스 설계를 적용해 진공관을 교체할 때 어떤 일도 할 필요가 없다. 그냥 사용하던 진공관을 쑥 빼고 갈면 그만. EVO100 같은 경우 KT150을 제외하고 6L6G, 6L6GC, 7581A, EL34, EL37 그리고 6550, KT66, KT77, KT88, KT90, KT120 등의 진공관에 모두 대응한다. 우측에 마련된 바이어스 선택 스위치만 상황에 따라 바꾸면 그만이다. 더불어 ‘배드 튜브 인디케이터’의 존재다. 출력관 주변을 보면 LED가 하나씩 배치되어 있는데 만일 출력관 상태에 문제가 생기면 이 LED가 붉은색으로 알려주며 앰프 작동을 자동으로 멈추어준다. 진공관 앰프에 입문하고 싶어도 뭔가 불안해하는 초심자들도 아무 걱정 없이 사용할 수 있는 앰프다.
똘똘한 막내 EVO100
EVO 시리즈는 총 네 개 모델로 구성되어있다. 필자가 사용하고 있는 EVO400이 최상위 모델이며 그 아래로 EVO300, EVO200 그리고 막내 EVO100이 있다. EVO400와 EVO300은 출력 외에 설계나 소자는 거의 동일한 반면 EVO 200과 EVO100은 스위스제 내부 결선이나 타크만 저항 등 소자 그리고 서브우퍼 출력, AC 오프셋 킬러, 트라이오드/울트라리니어 모드 전환 기능이 빠진다. 여기서 EVO100의 경우 KT150 대응 기능까지 빼내면서 간소화시킨 모델이다.
하지만 핵심적인 설계 기조는 동일하다. 소리의 순도에 큰 영향을 끼치는 신호 전송 구간을 PCB 기판이 아닌 케이블을 통해서 이른바 ‘포인트 투 포인트’ 방식으로 제작한다. 적응형 자동 바이어스 회로도 상위 모델과 동일하게 적용했다. ‘배드 튜브 인디케이터’도 적용했음은 물론이며 전원부엔 특주 토로이달 트랜스를 장착했다. 프리마루나보다 훨씬 더 비싼 가격에 판매하면서도 저렴한 C코어나 EI코어를 사용하는 앰프들도 있는데 이 가격대 제품치곤 좋은 선택이다. 거의 하프 사이즈에 가까운 EVO100도 무게가 약 18KG으로 무거운 이유는 토로이달 트랜스와 출력 트랜스 때문이다.
출력 트랜스는 진공관 앰프의 성능을 좌우한다. 일부 사람들은 DAC에서 DAC 칩셋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트랜지스터 앰프에선 트랜지스터가 가장 중요하며 진공관 앰프에서도 진공관만 좋으면 좋을 소리가 좋을 거라고 착각한다. 세계 최고가 드라이브 유닛을 투입한 자작이나 공방 스피커가 싸구려 유닛으로 만든 전통 있는 브랜드의 스피커보다 못한 소리를 내는 걸 경험해보았다면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을 것이다. 진공관 앰프에서 진공관이 중요한 건 사실이지만 나는 트랜스가 우선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예를 들어 대역폭만 해도 출력 트랜스가 넓은 밴드위스를 갖지 못한다면 오리지널 텔레풍켄 EL34를 끼워도 대역폭이 교정되진 않는다. 프리마루나는 인 하우스 제작 방식으로 공들여 출력 트랜스를 만든다. 그리고 이는 막내 EVO100에도 그대로 적용했다. 프리마루나는 하위 모델로 내려오면서 과연 어떤 부분에서 비용을 절감할지 고민을 했을 것이다. 분명 내부 선재와 저항, 커패시터 등의 소재 쪽에서 절감했지만 절대 출력트랜스나 토로이달 트랜스 같은 중요 소자는 건드리지 않았다. 합리적이며 옳은 선택이다. 제작자가 아닌 사용자 입장에서 말이다.
시청평
EVO 100은 EL34 출력관을 채널당 두 개씩 사용해 푸쉬 풀 구동하며 8옴 기준 채널당 40와트 출력을 얻는다. 진공관 앰프가 40와트라면 힘이 상당히 좋은 편이다. 더불어 SN비는 90dB, THD는 0.2%에 머문다. 최신 트랜지스터 앰프에 비하면 분면 훌륭하진 않지만 청감상 SN비는 진공관 앰프치곤 상당히 좋다. 두 개의 12AX7이 위상 반전을 맡고 12AU7 두 발이 이 신호를 받은 후 출력관을 드라이빙하는 방식이다.
알프스 볼륨을 채용한 EVO 100은 게인이 상당히 컸다. 오히려 내가 쓰고 있는 EVO 400보다 커서 여덟시 볼륨에서도 충분한 볼륨을 확보할 수 있었다. 토템 마니2Sig에선 진공관치곤 플랫하고 대역이 넓은 소리 그리고 에스칼란테에선 특유의 질감 표현을 제대로 보좌해주는 역할을 해준다. 웅산의 ‘Yesterday’를 마이트너 MA1 DAC를 통해 재생해보면 폭포수처럼 치고 나오는 풍부함 음압이 시원하다. 다소 얇고 질감 위주의 EL34만 들어봤다면 EVO 100를 듣는 순간 출력관을 다시 한 번 쳐다보게 될 정도로 묵직하고 호쾌한 소리에 놀랄 것이다.
다니엘 게데가 연주한 비발디 사계를 들어보면 엑센트 하나하나가 아주 정확하고 힘 있게 전달된다. 육중한 힘이 실려 있고 무게감이 뛰어나 어디에서도 왜소하거나 여린 모습이 없이 호쾌하다. 오히려 이런 부분들은 상위 모델보다 더 적극적인 편이어서 두텁고 쾌활한 소리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크게 어필할 수 있을 듯하다. 다이내믹레인지나 아주 폭넓은 셈, 여림 표현은 조금 떨어질지 모르겠지만 불꽃 튀듯 작렬하는 부분에서 쾌감은 진공관 앰프가 맞는지 의심할 정도로 짜릿하다. 물론 사용할수록 입자가 고와지면서 분진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음결은 따스하고 말랑말랑한 촉감이 느껴져 확실히 진공관 앰프의 음결을 기대할 수 있다. 하지만 위에서 말했듯 시간축 특성, 그러니까 리듬감이나 페이스, 타이밍 그리고 어택하는 순간순간의 속도감, 펀치력은 상상 이상이다. 예를 들어 코넬리우스의 ‘Fit song’에서 시작과 동시에 끊어치는 기타 리프는 마치 온몸에 감전된 듯 톡톡 쏘는 청량감이 가득 실려 있다. 이후 드럼, 심벌 등의 강타에서도 전혀 뭉개지지 않고 빠르게 장면 전화되는 모습이다. 제일 막내라고 해서 그리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매욱 강력하고 쾌활하게 스피커를 장악한다.
진공관 앰프로서 EVO100이 표현하는 배음 특성은 관악이나 현악, 피아노 등 주로 어쿠스틱 악기들에서 보다 세밀하게 느낄 수 있다. 예를 들어 바흐 스페셜리스트 안젤라 휴이트가 플롯 주자 안드레아 올리바와 함께한 바흐 플롯 소나타에서 꽃피운다. ‘Siciliano’를 들어보면 매우 복잡다단한 배음 특성을 가진 플롯의 소리가 영롱하며 풍부한 울림을 대범하게 내뿜는다. 얇거나 왜소한 부분이 일체 없고 피아노와 잘 분리되어 명료하면서도 풍성한 배음 구조를 표현해낸다.
록과 팝에서 강력한 리듬감을 보이던 것과 달리 이런 클래식 소품에선 방 안을 가득 메울만큼 풍부한 잔향이 일품이다. 스피커 제어력에 있어선 상위 모델에 비해 높은 저역 이하의 빠른 롤오프가 감지된다. 마니2sig에선 아쉽고 에스칼란테 Pinyon에선 충분한 저역 제어력을 보여준다. 팻 메스니의 [Road To You] 라이브 실황 앨범 중 ‘Last train home’을 들어보면 현장의 살아 꿈틀거리는 생생함이 막힘없이 전달된다. 너무 정돈되거나 또는 자신만의 색깔을 덫칠해 원래 녹음의 분위기를 왜곡시키는 진공관 앰프 위주로 써왔다면 EVO 100이 만들어내는 투명하고 싱싱한 EL34 사운드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할지도 모른다.
총평
프리마루나의 최근 국내/외 약진은 저대 우연이 아니다. 필연이다. 충분한 용량의 고품질 특주 전원 트랜스포머부터 진공관 앰프의 심장과 같은 출력 트랜스의 우수한 성능. 여기서부터 여타 비슷한 가격대 제품들과 경쟁 우위에 설 수밖에 없다. 네덜란드 설계, 중국 제조의 시너지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는 브랜드로서 무엇보다 진공관 앰프의 배음 특성과 트랜지스터 앰프의 힘을 겸비하고 있다. 진공관과 트랜지스터 앰프의 음질적 트레이드오프가 많이 감지되지 않아 하나의 시스템에서 둘 모두의 매력을 즐기고 싶어 했던 사람들에겐 최고의 선택 중 하나가 될 것. 특히 막내 EVO100에서도 이런 성능이 나올지는 미처 몰랐다. 진공관 앰프에 입문하고 싶은 사람 또는 서브 시스템으로 똘똘한 진공관 앰프를 운용하고 싶은 사람들 모두에게 가격을 감안할 때 축복 같은 제품이다.
Written by 오디오 칼럼니스트 코난
Specifications
Price : $2,399
Power(Ultra-linear) : 40 watts x 2 (EL34)(8Ω, 1% THD)
Inputs : 4x Stereo RCA
Outputs : 4 & 8 Ω / Stereo RCA Tape Out / 1/4″ Headphone
Freq. Response : 10Hz-75Hz +/- 3dB
THD : < 0.2% @ 1W / < 2% @ Rated Power
S/N Ratio : 90 dB (EL34)
Input Sensitivity : 260mV (EL34)
Power Consumption : 270 watts (EL34)
Standard Tube Complement : 2 – 12AX7, 2 – 12AU7, 4 – EL34
Dimensions (WxHxD) : 11″ x 7.5″ x 15.9″
Weight : 39.6 lbs
공식 수입원 : 웅진음향
연락처 : 02-6338-8525
공식 소비자가격 : 3,200,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