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nestria가 fact에게
돌이켜 생각해보면 PMC에 대한 기억은 한 순간도 빼놓지 않고 나의 오디오 타임라인에 기억되어 있다. 여러 종류로 기억, 저장된 데이터나 경험들은 별도의 서랍 속에서 고이 잠자다가 새로운 라인업이 나오면 다시 서랍이 열어보곤 하는 식이었다. PMC를 일약 스타덤에 올려놓았던 TB(Tiny Box) 시리즈는 물론 DB1 같은 북셀프 그리고 FB1 및 GB1, OB1 등에 이르기까지 초창기 금속 돔 시절이다. 마치 JBL이나 토템 또는 가끔은 약간 ATC 같은 소리를 내주기도 했고 브라이스턴 같은 앰프와 좋은 매칭을 보여주었다.
아마도 그 당시가 PMC가 가정용 하이파이 스피커를 만들기 시작한 후 커다란 도약을 한 시기였을 것이다. 참고로 PMC는 ‘Professional Monitor Company’의 약자다. 쉽게 말해 스튜디오에서 사용하는 모니터 스피커를 개발하기 위해 설립한 회사라는 의미다. 그리고 실제로 영국의 국영 방송국 BBC를 위한 모니터 스피커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PMC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그 모델이 바로 지금도 SE 시리즈로 생산되고 있는 BB5라는 거대한 모니터 스피커다.
이후 변화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 게 아마도 Twenty 시리즈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그 이전에 초창기 모델의 여러 변주 모델을 출시하면서 호평을 이어가던 중이었다. Twenty 시리즈는 기존에 조금 무뚝뚝한 박스형 디자인을 좀 더 세련되게 다듬고 유닛도 바꾸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후엔 Twenty5 그리고 Twenty5i 등을 출시하면서 기존 모델을 완전히 대체해나갔다. 그 사이에 fact 시리즈가 출범했는데 이는 Twenty의 상위 라인업으로 fact3, fact.8 그리고 fact12 등 단 세 개 모델만 출시했다.
fact와 twenty는 PMC라는 지붕 아래에서 고유의 DNA를 유지하며 각각 진화해나갔다. 그 중 fact 패밀리에 커다란 변화의 조짐이 일어난 것은 2019년 fenestria의 출현이었다. 사실 이 모델도 fact 시리즈 안에 있지만 실제 그 혁신적인 설계와 음질을 들어보면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로 PMC를 이끌고 있었다. 아무튼 fenestria를 개발하면서 얻은 기술은 자연스럽게 fact 패밀리에게 전이되었다. 그래서 사이좋게 탄생한 것이 바로 fact.8 signature와 fact12 signature다. fenestria가 PMC에게 더 큰 변혁을 일으키기 전에 나눠준 유산은 이렇게 두 형제가 나누어 가지게 되었다.
fact.8 signature 매칭의 세계
fenestria가 나누어준 기술과 사운드의 변화는 이미 지난 리뷰에서 다루어본 적이 있다. 이는 겉으로 보기엔 잘 알 수 없는 것들이다. 트랜스미션라인, 크로스오버 네트워크 등 모두 안에서만 볼 수 있는 요소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릇 스피커는 소리로 말한다. 그리고 매칭에 따라 꽤 다양한 야누스의 얼굴을 가진다. 그래서 최근 fact.8 signature에 대한 매칭 측면을 조망해보기로 했다. 요즘도 종종 새로운 스피커를 들이면 자택에서 종종 이런 일을 벌이곤 하는데 fact.8 signature도 그 실험 대상 중 하나가 되었다.
일단 이번 비교 청음은 소스기기의 경우 동일하게 세팅하고 앰프만 변화를 주면서 진행했다. 우선 소스기기의 경우 웨이버사 Wcore를 ROON 코어로 사용하고 내장한 SSD에 음원을 담아 사용했다. 더불어 웨이버사 Wrouter를 사용해 이 기기에서 USB로 신호를 뽑아 코드 Blu MKII 트랜스포트로 보냈다. 그리고 Blu MKII에서 BNC 커넥터를 사용, 듀얼 BNC로 코드 DAVE에 보내는 방식이다. 코드 일렉트로닉스를 활용한 음원 플레이백 시스템으로선 최상이라고 할 수 있다.
동원한 앰프 중 일단 레가 Osiris를 fact.8 signature에 적용해보았다. 나는 여러 번 시청해보았지만 의외로 레가의 Osiris를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들이 많을 듯. 8옴에 162와트, 4옴 기준 250와트를 뿜어내는 이 클래스 AB 증폭 앰프는 솔리트 스테이트 앰프의 단단하고 묵직한 파워를 가지지만 에지가 둥글고 특히 중역 질감 표현이 무척 뛰어난 앰프다. 예상과 달리 매지코 같은 스피커와 좋은 소리를 만들어냈을 정도로 트랜지스터와 진공관 앰프의 일부 특성을 버무린 사운드다.
이번 fact.8 signature와 매칭에서도 마치 순면의 촉감과 당당한 중, 저역의 포만감을 느낄 수 있다. 예를 들어 리빙스턴 테일러의 ‘Isn’t she lovely’ 같은 곡을 들어보면 마치 타격 중심이 흐트러지지 않고 노련하게 받아치는 타자를 연상시킬 정도로 안정된 대역 균형감을 보여준다. 보컬의 깊이도 충분히 확보되어 깊고 충만한 느낌이다.
하지만 부시 트리오의 ‘Dumky’ 같은 클래식 소편성 음악을 들어보면 그 음색적인 면에서 확실히 레가와 PMC 두 브랜드의 음색적 특질들이 섞여서 표현된다. 모두 풍부한 배음 특성을 가지지만 fact.8 signature의 입장에서 볼 땐 기존에 비해 좀 더 도톰한 중역대를 중심으로 풍부한 풍채와 부드러운 촉감을 만들어낸다.
브라이언 브롬버그의 ‘King of pain’같은 곡은 높은 중역대에서 높은 저역대에 부밍을 일으키기 좋은 곡인데 아무 이상 없이 fact.8 signature의 우퍼를 힘차게 두드린다. 기존에 매지코 A1 같은 스피커에 매칭해봤을 때도 그렇지만 이번에도 두텁고 진하면서도 역동적인 저역을 내주는 Osiris의 양수겸장을 확인했다. 더불어 HRx 샘플러 중 왈튼의 ‘Crown imperial’피날레에서도 담백하면서도 슬램한 중, 저역을 구사하는 담대한 퍼포먼스를 뽐냈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fact.8 signature는 PMC가 오랫동안 공고히 해왔던 모니터 스피커에서 벗어나 가정용 하이파이 스피커로서 최고 수준을 목표로 만든 것이다. 물론 ATL, 즉 , 3미터 길이의 트랜스미션라인 등 PMC의 전매특허 설계도 적용되어 있다. 유닛은 커다란 우퍼 하나가 아니라 이 정도 규모의 스피커 치곤 매우 작은 5.5인치 미드/베이스 우퍼 두 발로 28Hz라는 초저역까지 대응하도록 설계한 스피커다. 무엇보다 이런 형태의 스피커는 저역 스피드가 필요하다. 아무리 잘 설계하더라도 저역 스피드 저하로 인한 그룹 딜레이는 음악을 매우 이질적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원한 것이 코드 일렉트로닉스의 신형 파워앰프 중 막내 Ultima 6 스테레오 파워앰프다. 8옴 기준 채널당 180와트며 이 때 전 고조파왜곡률은 0.005% 정도로 고출력이면서도 매우 투명한 소리를 내주는 앰프다. Ulitma 6는 Ultima 라인업 중 가장 작은 출력을 내는 앰프지만 fact.8 signature를 제어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오히려 차고 넘치는 수준이어서 놀랐다. 더불어 초고속 스위칭 방식의 전원부를 사용해 스피드 면에선 가장 발군의 성능을 보여주었다. 단, 이 경우엔 DAVE를 프리/DAC 모드로 변경해 매칭했다.
레가에선 연마된 듯 동글동글한 모습으로 음악을 재생하던 fact.8 signature가 코드 Ultima 6을 매칭하자 아주 작은 소리들까지 수면 위로 일제히 올라온다. 해상력의 급격한 증가가 눈에 띄는데 예를 들어 사이몬&가펑클의 ‘Sound of silence’를 들어보면 어쿠스틱 기타를 치는 마찰음가지도 모두 눈에 보일 정도로 섬세하게 표현해준다.
이런 근간엔 광대역 특성도 내재되어 있다. 저역과 고역 모두 더 낮고 더 높은 대역까지 들리기 시작한다. 부시 트리오의 ‘Dumky’를 들어보면 선명하고 투명한 사운드로 일관하는데 레가에서의 온도감은 약간 떨어지되 음원의 정보를 모두 낱낱이 토해낸다. 특히 피아노 연주에서 뛰어난 아티큘레이션 표현이 돋보여 음악을 더욱 싱싱하게 만들며 어택도 강력하다.
Ultima 6와 코드 소스기기의 조합은 fact.8 signature의 아주 가볍게 휘어잡는다. 더불어 스피드 면에서도 번개 같은 민첩함을 부여한다. 이는 트랜스미션라인이라는 로딩 방식을 가진 fact.8 signature에겐 특히 고무적인 부분이다. 예를 들어 코넬리우스의 ‘Fit song’을 들어보면 저역 쪽 과도 응답 특성이 굉장히 뛰어난데 유코 아락의 드럼 타격은 조금 과할 정도로 우퍼를 들썩이게 만들었다. 더불어 심벌의 고역도 반짝이는 듯 모두 세세하게 들을 수 있다.
fact.8 signature를 통해 속도감, 펀치력, 광대역에서 오는 홀로그래픽 음장을 극대화하는 데는 코드 일렉트로닉스가 최적이다. 확실히 fenestria와 함게 fact.8 signature 등 fact 시리즈는 SE 라인업인 IB2, MB2, BB5 등의 모니터 스피커와는 이제 많은 부분 멀리 떠나와 꽤 다른 DNA를 가지게 되었다는 걸 실감했다.
레가 Osiris의 담백하고 리드미컬한 사운드에서 같은 영국 메이커며 솔리드 스테이트 앰프지만 광속의 광폭한 스포츠카 같은 소리를 내주는 코드 Ultima 6. 그리고 그 다음 의혹을 풀어줄 앰프로는 프리마루나 진공관 앰프를 준비했다. EL34를 채널당 네 발씩 사용해 푸쉬풀 증폭하는 파워앰프 및 별도의 프리앰프가 합세한 EVO400 분리형 앰프가 그 주인공이다.
이 앰프를 적용하기 전까진 아무래도 진공관 앰프며 그 중에서도 EL34를 사용하니까 낭랑하고 고운 소릿결은 좋지만 대역폭이나 다이내믹스, 음장 구현 능력은 떨어질 거란 생각이 지배적일 것이다. 하지만 틀렸다. 나는 자택에서 EVO400 인티앰프를 사용 중이라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생각보다 더 맑고, 아티큘레이션 표현이나 악기를 공간 안에 배치하는 능력 등 거의 모든 면에서 진공관 앰프라는 정체를 흔들고 있었다.
예를 들어 잰 존슨의 ‘Angel’ 같은 곡을 들어보면 정돈되고 차분한 대역 균형감이 편안한 감상을 돕는다. 음조 자체가 안정되어 있고 차분한 편이며 더불어 나긋나긋한 느낌이 있어 소리가 아닌 음악을 듣게 만든다. 전체적으로 가장 음악적인 울림을 주는데 레가 Osiris보다 오히려 더 투명한 사운드를 내주어 놀랐다. 하지만 역시 기타와 보컬 모두에서 뒷맛에 달콤한 여운이 남는 건 진공관 덕분인 것도 사실이다. 특히 스피커의 다소 얇은 낮은 중역대를 보완해주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부시 트리오의 ‘Dumky’ 같은 곡을 들어보면 그 음색과 촉감이 더욱 드라마틱하게 대비된다. fact.8 signature가 가지지 못한 부분들을 프리마루나가 촘촘히 채워주고 있다는 게 솔직한 감상평이다. 피아노는 말랑말랑하고 그 움직임도 유연하다. 현까지 합세하는 구간에선 약간 멜랑콜리한 음색적 표정까지 더해져 머리가 아닌 가슴을 움직이는 소리다. 그렇하고 해서 심한 착색이나 왜곡까지 다다르진 않는다.
확실히 프리마루나 앰프를 매칭한 이후 fact.8 signature는 부드럽고 편해졌다. 하지만 그것이 음색을 그저 미음으로 매만지거나 속도감을 낮추어 만들어내는 타협적인 모습은 아니다. 예를 들어 마커스 밀러의 일렉트릭 베이스 주법이 빛나는 ‘Hylife’ 같은 곡에서 중, 저역 양감은 풍부하면서 도톰하고 대신 속도감은 Ultima 6보단 느리지만 Osiris에 뒤지지 않는다. 스피커의 높은 저역을 보완해주면서 확실히 좀 더 풍만하고 여유로운 탄력감을 유지하며 완만한 페이스를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무엇보다 음색, 즉 배음과 잔향 표현은 진공관 앰프를 따라오긴 힘들다. 수준이 떨어지는 앰프에서 곧바로 건조하고 약간 거친 음색을 내는 fact.8 signature인데 프리마루나에선 이 스피커가 이런 소리를 낼 수도 있는지 놀라울 정도로 피아노, 현, 관악기 등의 음색적 특징을 확연히 대비시켜준다. 키릴 게르슈타인이 연주한 거쉰의 피아노 협주곡 재생에서도 다이내믹스와 입체감을 훌륭하게 소화해내는 모습이었다.
총평
fact.8 signature 스피커에 총 세 개 정도의 앰프를 교체해가면서 테스트하는 와중에 느낀 건 이 스피커가 앰프의 특성을 여실히 드러내준다는 사실이다. 모니터 스피커 라인업은 아니지만 본래 모니터로 시작한 PMC는 자신의 컬러가 적다는 의미다. 특히 인클로저의 소재를 통해 진동을 감쇄시키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목재를 사용하되 트랜스미션라인이라는 로딩 방식을 활용한 점은 오히려 앰프의 반응 특성을 여실히 증명해냈다. 마치 앰프 성능의 리트머스 시험지 같은 모습으로 영민한 설계와 구조 역학이 만들어낸 결과다.
중역 중심의 진한 소릿결에 리듬감이 미소를 짓게 만드는 레가, 바람을 가르는 듯한 속도감에 MOSFET의 열기가 함께 공존하는 Ultima 6 그리고 풍부한 배음과 둥글고 투명한 사운드의 프리마루나. 모두 매력적이다. 그래서 이 중 어느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고민이 깊어질 것 같다. 다만 코드 Ultima 6는 파워앰프와 DAC 직결로 테스트해해 아쉬움을 남겼다. 기회가 된다면 프리앰프를 매칭해 비교해볼 수 있으면 좋겠다. 그래서 코드의 경우 동일선상에서 비교하기엔 어려움이 있다. 한편 나머지 두 개 앰프는 PMC fact.8 signature와 밸런스 면에서 훌륭한 궁합을 보인다. 일단 높은 저역에서 낮은 중역 사이를 촘촘하게 매우고 보듬어주면서 전체적 균형감에 일조했으며 이 덕분에 음색적 매력도 얻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