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윅 그리고 무위
한창 레가 턴테이블을 사용하던 때였다. 특히 P25 같은 턴테이블이 그 대상이었는데 특별한 기념 모델인 만큼 가격 대비 약간 상급의 소재를 투입해 나왔던 기기였다. 대개 이런 경우 애지중지하게 마련이다. 요즘엔 몇 주년 기념이라는 단어를 너무 상업적으로만 우려먹는 게 아닌가 싶지만 당시엔 말 그대로 ‘애니버서리’라는 단어에 부끄러움이 없는 모델이 꽤 있었다. 레가도 그 중 하나여서 그 알량한 가격대에 RB600이라는 제법 상위급 톤암을 선물처럼 장착해놓았다.
누구나 그렇듯 이런 특별한 모델이 나오면 오히려 그 애정 때문에 욕심을 부리게 된다. 사실 레가는 아무것도 만지지 않고 그 순수한 모양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말 그대로 ‘플러그 & 플레이’ 타입으로 만든 턴테이블이다. 그러나 턴테이블에 대해 좀 알아 가다보면 당시 레가 턴테이블은 몇 가지 개선할 여지가 눈에 보였다. 일단 발이다. 뭔가 만들다가 대충 마감한 듯 그저 그런 고무발이 진동에 대해 고려가 덜 되어 보였다. 이 때문에 여러 해외 사이트, 특히 이베이 같은 곳을 들락날락거리며 여러 제품들을 시도해보는 것이 재미였다.
오디오파일 사이에서 한 때 이런 레가 턴테이블 트윅은 유행이었다. 발은 물론이며 때론 톤암 케이블을 교체하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 단순히 외부에 노출된 케이블이 아니다. 레가는 톤암 튜브 내부까지 케이블이 모두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케이블을 교체하려면 모두 교체해야한다. 해외에선 이런 케이블 키트를 별도로 만들어 판매하던 업체도 있었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모터까지 손을 댄다. 사실 구동부를 만지는 것은 자칫 독이든 성배를 마시는 일이 될 수도 있지만 오디오만 보면 극성스러워지는 오디오파일을 누가 말리랴. 구태여 플린스에 고정되어 있는 모터를 이격시키고 아래에 모터 베이스를 받히는 트윅을 발휘하곤 했다. 힘들고 고단한 일이지만 턴테이블의 구조와 물리적 역학 관계를 습득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이기도 하다.
사실 레가 뿐 아니라 중, 저가 턴테이블은 손을 대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플래터를 통해 엘피로 전해지는 진동을 줄이기 위해 못할 것이 없다. 그러나 레가 같은 턴테이블을 만지고 만지다 보면 문득 다른 생각이 든다. 만지면 만질수록 본질은 사라지고 한껏 공들여 쌓은 모래성이 사라지는 느낌 같은 것 말이다. 또는 아무리 손으로 잡으려 해도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개울물처럼 뭔가 헛짚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레가는 그런 턴테이블이다. 부분적으로 보면 뭔가 결여되어 보이고 불완전해보이지만 그것들이 모이면 그것 자체론 믿을 수 없을 만큼 완전한 균형을 획득하는 물건 말이다. 요컨대 로이 간디가 의도한 설계는 이미 그 자체로 완성형이었던 것 아닐까? 여러 자잘한 트윅이 무위로 돌아가는 이유도 이런 특성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현실적 완성형
최근 레가 턴테이블, 그 중에서도 상위 두 모델인 Planar 8과 Planar 10을 보니 그런 생각이 든다. 과거 오디오 마니아들이 그렇게도 악착같이 바꾸려 했던 것들과 그 트윅을 통해 얻으려 했던 것들을 이들은 다른 방식으로 해결했다는 걸. 누구나 조금 공부를 하면 얻을 수 있는 자잘한 지식과 소재 그리고 이를 활용한 트윅을 이들은 보다 전문적인 엔지니어 입장에서 다른 방식으로 개선했다.
물론 하위 모델에선 원가 절감의 냄새가 꽤 풍기기도 하지만 생산자 입장에서나 소비자 입장에서 이런 절감의 효율은 레가를 대중적 가격의 합리 안에서 멀어지지 않게 해준 면도 없지 않다. 아무튼 현재 최신형 Planar 의 상위 모델들을 두루 사용해보면서 느낀 것은 그 자체로 완성형이라는 것. 따라서 완전한 균형을 맞춘 이 턴테이블들은 웬만한 지식을 갖춘 사람이 아니라면 트윅을 가하지 말고 쓰길 권한다. 적어도 Planar 8과 Planar 10을 모디파이하는 건 마치 피라미드의 벽돌 밑장을 빼는 일과 같다.
Planar 8 VS 10
- 구조, 소재, 설계의 차이
하지만 마지막으로 이 두 개 모델을 비교해보는 일은 유의미할 것 같다. 둘 모두 쌍둥이 같은 모습이며 겉으로 볼 때 비슷해 보이지만 꽤 많은 차등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둘 모두 스켈레톤 타입 설계로 매우 심플하며 곳곳에 강성을 높이되 무게는 최소화하려는 설계 의도가 스며들어 있다. 우선 플린스 소재는 오랫동안 여러 소재를 적용해오다가 개발한 Tancast 8 폴리우레탄을 사용하고 있다. 이 부분은 두 모델 공히 동일하다.
하지만 플래터 안에 위치한 메인 베어링 및 서브 플래터의 진동이 톤암으로 전이되는 것을 막기 위한 방식은 조금 다르다. 구조적으론 동일하지만 메인 베어링으로부터 톤암으로 이어지는 구간의 표면 소재를 달리했다. Planar 8이 페놀 수지 두 겹을 사용했다면 Planar 10은 세라믹 분말을 압축해 만든 소재를 사용하고 있는 모습.
여기서 세라믹을 사용한 이유는 Planar 10의 플래터가 세라믹 소재인 것과 연관이 있다. 한편 Planar 8은 필킹톤과 협업해 만든 유리 세 장을 겹친 후 압착한 샌드위치 구조를 취하고 있다. 실제 들어보면 이 부분에 의한 음색 차이가 드러나는데 세라믹을 사용한 Planar 10에서 약간 세라믹 유닛의 청명한 울림이 곁들여지는 모습이다. 소리는 소재의 물성을 따르는 측면이 있다는 걸 다시 한 번 실감했다. 더불어 두 모델의 플래터 모두 플라이휠 효과를 통한 관성 모멘트 최대화를 위해 외측은 두텁게, 안쪽은 얇게 파낸 디자인을 구사하고 있다.
서브 플래터를 회전시키는 모터의 경우 24V로 작동하는 저진동, 동기화 모터를 사용하고 있으며 최소 공차를 실현한 EBLT 벨트를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이 모터에 전기를 공급해주는 전원부 차이가 크다. Planar 8이 작은 Neo PSU를 사용하는 것과 달리 Planar 10은 하프 사이즈에 AC 전원을 받는 전용 PL10 PSU를 사용한다. 모두 독자적으로 개발한 DSP 제너레이터를 탑재하고 있지만 전원부에 의한 모터 작동 정확도 등은 차이가 날 수 있다. 게다가 PL10 PSU를 통해 무려 0.01rpm 단위로 속도를 미세 조정할 수 있는 점은 Planar 10만의 강점 중 하나다.
턴테이블의 성능 및 음질로 이어지는 프로세스 중 가장 큰 변이를 일으키는 것 중 하나, 바로 톤암의 차이도 꽤 크다. Planar 8은 RB880, Planar 10은 RB3000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전 세대 플래그십 RP10을 사용하고 있어 RB3000의 직전 모델인 RB2000을 오래 사용하고 있는데 전작과 차이도 있지만 RB880과 레벨 차이가 훨씬 더 크다. 물론 둘 다 레가 톤암의 설계 사상을 한껏 품은 톤암으로서 성능 자체는 훌륭하지만 분명히 등급을 나누고 있다.
톤암의 만듦새는 RB880이나 RB3000이나 모두 매우 심플하면서 가공 완성도는 빼어나 보인다. 1㎛ 수준의 공차를 자랑하는 베어링을 채용하고 있어 수직, 수평 운동 공히 매우 정밀한 작동 특성을 자랑한다는 것이 레가의 설명이다. 실제로 사용해보면 턴테이블과 달리 톤암은 꽤 묵직하고 안정감 넘치는 손맛을 느끼게 해준다. 여전히 VTA를 조정하려면 스페이서를 별도로 구입해 장착해 주어야하지만 레가 Ania 시리즈나 Apheta 등 이 톤암에 최적화된 레가 카트리지를 사용한다면 문제없다.
우선 이 톤암들의 가장 큰 매력이라면 스태틱 밸런스가 아닌 다이내믹 밸런스 톤암이라는 사실. 엘피의 두께나 휨 등에 대해서도 탄력적으로 침압을 유지하기 때문에 음질적으로 뛰어날 수밖에 없다. 실제 사용해보면 조작감이나 편의성능 여느 톤암보다 훨씬 좋다. 특히 레가 카트리지를 사용한다면 세팅이 매우 편리하다. 레가 카트리지를 이 톤암들과 3점 결합시키면 오버행이니 카트리지 오프셋 등을 따로 세팅하는 번거로움을 덜 수 있다.
- 음질 차이
결국 오디오라는 하드웨어는 음질로 결정이 난다. 그리고 레가의 두 모델 Planar 8과 Planar 10도 음향적 차이를 보이는 것이 당연하다. 하드웨어 측면에서 두 모델은 전원부 및 플래터 그리고 더블 브레이싱의 소재, 마지막으로 톤암이라는 넘어설 수 없는 부품의 차이를 보인다. 워낙 중요 부분을 담당하고 있는 것들이라서 당연히 음질적 차이를 보이는 것인데 무엇보다 관심이 가는 것은 그 지향점일 것이다.
테스트는 두 턴테이블 모두 Apheta 3를 장착한 상태에서 진행했는데 일단 세부 묘사력의 차이가 있다. 이는 아마도 톤암의 성능 차이에서도 오는 것이라고 추측된다. 보컬, 피아노, 기타 등 모든 악기들의 배음이 더 분명하고 반대로 배경은 더 말끔해서 악기들의 모습이 더 명료하게 표현된다. 이는 청감상 SN비의 상승도 불러왔다.
음색 부분에서도 차이를 보이는데 이는 아마도 플래터에서 묻어나는 것으로 추측되는 면이 있다. Planar 8의 유리 플래터는 중역대가 좀 더 도톰하고 전체적으로 온건, 담백한 스타일이라면 Planar 10으로 오면 좀 더 섬세하며 대신 온도감은 약간 낮아진다. 마이크로 다이내믹스 및 세부 묘사 능력을 상당 부분 올라가 악기나 보컬의 세부 묘사 부문에서 기존의 레가 이미지를 훌쩍 뛰어넘는 모습을 보여준다.
시간축 특성의 차이도 돋보인다. 결국 이런 시간축 특성은 중, 고역에서 두드러지면서 전체적인 음장, 정위감, 포커싱 같은 부분의 차이로 귀결되는데 아무래도 Planar 10 쪽이 우세하다. 보컬 포커싱이 또렷해지면서 후방과 거리가 더 깊어진다. 이런 측면 덕분에 오케스트라 등 다중 악기가 출몰하는 대편성 교향곡에서 차이가 두드러진다. 레가에서 이 정도 생생한 음색에 더해 생동감 넘치는 역동성을 만끽할 수 있는 건 RP10과 함께 레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총평
턴테이블은 디지털 소스 기기와 직접적으로 비교는 불가능하다. 서로 다른 재생 방식과 알고리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일 비유가 가능하다면 턴테이블은 일종의 트랜스포트 같은 역할을 한다. 아무리 DAC가 뛰어나다고 해도 CD 트랜스포트나 네트워크 플레이어에서 제대로 읽어 들여 정확하게 DAC로 전달해주지 못한다면 모두 무주공산인 것이다. CD 시절도 그랬지만 파일 음원 재생에서도 이는 분명한 사실이다. 아날로그 시스템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좋은 카트리지를 쓴다고 하더라도 이 성능을 턴테이블이 뒷받침해주지 못한다면 카트리지 성능의 절반도 채 즐기기 어렵다는 걸 세삼 실감한 테스트였다. 그 중 Planar 8과 10은 레가 아날로그, 두 개의 탑 같은 존재들이다.
글 : 오디오 평론가 코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