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튼 존과 피터 토마스
몇 년 전 일이었다. RSD, 그러니까 레코드 스토어 데이 기념 LP 중 엘튼 존의 1970년 셀프 타이틀 앨범이 LP로 발매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매년 레코드 스토어 데이 기념 한정반이 제작되어 배포되는데 이 중에는 이전에 엘피로 발매된 적이 없던 엘피, 혹은 발매되긴 했지만 특별히 미공개 보너스 트랙을 담아 발매되기도 해 컬렉터들의 표적이 되곤 한다. 나 또한 RSD 에디션을 몇 장 수집했는데 특히 빌 에반스의 유럽 활동 당시 녹음들을 담은 미공개 앨범들은 정규 앨범으로 발매했어도 될법한 연주과 퀄리티를 보여주었다. 당시 뮤지션과 음악에 대한 레이블 및 엔지니어들의 치열한 노력과 열정이 빚어낸 쾌거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엘튼 존의 음반도 눈에 띄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미 전설의 반열에 오른 뮤지션으로 과거 앨범들은 모두 수십 번에 걸쳐 재발매를 거듭해왔다. 그러나 RSD 에디션은 달랐다. 이전에 전혀 공개되지 않았던 데모 트랙이 빼곡했다. 뿐만 아니다. 2집 이후엔 ‘Madman Across The Water’ 앨범이 유사한 형태로 다수의 미공개 트랙을 담은 채 발매되었다. 지금도 ‘올모스트 페이머스’ 영화에서 흘러나오던 그 음악을 잊을 수가 없다. 나 또한 오리지널 엘피를 가지고 있지만 새롭게 발매된 재발매엔 이 곡의 피아노 데모 버전이 실려 있기도 했다.
흥미로운 건 이런 미공개 데모 트랙들이 과연 어디에서 끝없이 나오는 것일까? 수십 년이 지난 현재 말이다. 여러 경로가 있겠지만 여러 컬렉터들의 도움이 꽤 있다. 엘튼 존의 경우 특히 피터 토마스라는 컬렉터의 도움이 컸다. BBC 방송국의 엔지니어로 일하면서 스튜디오에서 근무했지만 그의 가장 소중하고 즐거운 취미는 다름 아닌 엘피 수집이다. 특히 78회전 등 과거 잊혀진 음반들을 모으는 데 오랫동안 열심이다. 게다가 그는 영국 하이파이 스피커 메이커 PMC의 대표이기도 하다.
PMC
PMC의 대표가 어쩌다 재발매 앨범 크레딧에 이름을 올리게 될 정도로 음악, 음반 광이 된 것일까? 순서가 틀렸다. 그는 원래 어렸을 적부터 할아버지가 틀어주던 78회전 디스크를 들으면서 성장했고 그런 연유로 음악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후 이런 음악에 대한 열정은 BBC 방송국으로 그를 이끌면서 음악과 음향에 대해 눈뜨게 된 것이다. 이후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가장 완벽하게 재생할 수 있는 스피커를 개발해 모니터 스피커로 만든다. 이것이 바로 PMC라는 스피커 메이커를 설립하게 되는 단초를 제공하게 되며 그것이 현재 BB5se의 선조 격인 BB1이다.
그럼 이토록 음악광이며 음반 컬렉터일 정도로 음악에 진심이며 스튜디오 경험까지 두루 갖춘 사람이 만드는 스피커는 어떻게 생겼을까? 사실 생김새는 그다지 특출나다고 할 수 없다. 최상위 모델 fenestria 정도 되면 멋진 오브제 같은 모습을 갖추지만 이 외에 모델은 요즘 하이엔드 스피커 같은 미적 아름다움보단 되레 우직하고 단출한 모습으로 오직 음악의 정확한 재생과 관련 없는 요소는 절대 가미하지 않은 디자인이다. 따라서 PMC는 메트로폴리스, EMI, 워너, 캐비톨 스튜디오 등 전세계에서 이름만 대면 알만한 유명 스튜디오에서 많은 뮤지션들이 작곡, 믹싱, 매스터링 작업에 PMC를 사용해 왔다.
fact 8 signature
그럼 PMC는 스튜디오 모니터링 스피커만 제작하는 메이커일까? 여러 스튜디오, 엔지니어, 뮤지션들에게 호평 받는 스피커라는 건 사실이다. 게다가 최근엔 돌비 애트모스로부터 애트모스 인증을 받은 받기도 했다. 덕분에 돌비 애트모스 포맷을 사용해 공간 음향 서비스를 하고 있는 애플 뮤직 음원 서비스 중 ‘Spatial Audio’ 음원은 PMC로 매스터링한 것들도 많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사실 홈 오디오 마니아들에게 크게 인상적이지 않다. 스튜디오 모니터가 반드시 가정에서 즐길 때 최선의 조건은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PMC는 그들의 라인업을 프로페셔널 오디오와 홈 오디오로 나누고 각각의 용도에 적합한 라인업을 분리해놓고 있다. 그 중 가정용 하이파이 스피커의 최상위 라인업에 눈길이 머물 수밖에 없는데 바로 fact 라인업이다. 최상위 모델로 위치한 fenestria는 PMC가 내놓은 스피커 중 가장 멋진 디자인과 함께 오랜만에 혁신적인 설계를 갖춘 스피커로 화제를 뿌렸다. 그리고 이 쾌거는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았고 DNA를 하위 모델에 나누어주었다. 바로 fact8와 fact12의 signature 버전 출시를 촉진한 것이다.
fact 8signature는 이전 fact 8에서 fenestria 개발 시 얻은 설계 노하우, 특히 크로스오버 PCB 회로 튜닝 및 소재 선별에서 업그레이드를 보인다. 하지만 전체적인 구성은 기존 디자인을 따르고 있다. 우선 높이가 1030mm, 좌/우 너비는 155mm며 깊이는 380mm로 날씬한 몸매에 전면 배플은 좁고 뒤로 긴, 현대 하이파이 스피커의 전형을 보인다. 하단엔 전용 트리거가 4점 지지로 스피커 인클로저를 받치면서 진동을 감쇄시키는 구조다.
유닛은 19mm 구경으로 PMC의 전매특허인 소노맥스 소프트 돔 트위터로 최대 30kHz까지 뻗는다. 한편 5.5인치 미드 베이스 우퍼 두 발을 사용해 중역과 저역을 재생하는 형태다. 상위 fact 12 sig.와 음색에서 가장 큰 차이를 만들어내는 부분인데 중역을 별도의 미드레인지 유닛이 재생하는 것과 미드 베이스에서 모두 재생하는 것의 차이는 충분히 예상 가능하다. 하지만 어떤 포트도 보이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저음 반사형의 경우 탁 트인 포트가 마련되어 있지만 하단에 둥그런 운동장 모양 포트 같은 것이 있되 막혀 있다. 이런 가운데 5.5인치 미드 베이스 두 발로 저역이 28Hz까지 뻗어나간다고 스펙에 명시되어 있다. 겨우 5.5인치 우퍼 두 발로 초저역을 재생한다니 무슨 일일까?
이는 독특한 인클로저 구조에서 찾을 수 있다. 바로 PMC의 진보적인 트랜스미션라인 로딩 설계가 그것으로 드라이브 유닛 후방으로 구불구불하게 미로 같은 구조를 보이고 있는 것에서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유닛 후방에 긴 미로형 터널을 만들어 후방 에너지를 자연스럽게 흡음하되 동일한 우퍼 구경으로도 더 낮은 대역까지 완만한 슬로프로 감쇄시킬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인클로저 울림을 줄여 캐비닛 진동을 낮추어 깊으면서도 단정한 저역 확장을 노릴 수 있다.
하지만 트랜스미션라인의 길이와 폭, 흡음재의 선택 및 흡음으로 인한 음의 속도 지연 등 고려해야할 사항들이 많은 단점이 있다. 게다가 대부분 수공으로 제작해야하며 그 캐비닛 제작 난이도가 높아 사업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트랜스미션라인 로딩 방식은 여러 메이커에서 시도했지만 얼마 안가 포기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PMC는 오로지 트랜스미션라인 외엔 피터 토마스 자신이 원하는 저역을 얻기 힘들다는 판단 하에 수십 년 동안 미련하리만큼 고집스럽게 이 방식만 고집하고 있다. fact 8sig. 스피커도 당연히 트랜스미션라인 로딩 방식을 채용하고 있으며 그 길이는 무려 3미터에 이르고 있다.
셋업, 청음
참고로 후면을 보면 고역과 저역 게인 조정 장치가 마련되어 있다. 그리고 fact8과 fact12가 각각 다르다. fact12는 고역과 저역 모두에 대해 모두 0, 즉 디폴트 지점을 중심으로 상/하 두 개 조정 포인트를 지정해놓았다. 반면 fact8의 경우 고역은 동일한 조정 방식을 취하지만 저역의 경우 0 지점을 중심으로 -1, -2 등 저역을 줄이는 방식만 선택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번 테스트의 경우 모두 디폴트 상태로 세팅하고 진행했으며 일렉트로콤파니에 EC 4.8MKII 프리앰프 및 NEMO AW500 모노 그리고 솜 오디오 SMS-200 Ultra 및 코드 M Scaler, 마이텍 맨해튼 II DAC 등을 활용했다.
이번 테스트는 fact 12 signature와 비교해가면서 여러 음질적 차이를 살펴보는 방향으로 진행했다. 일단 전체적으로 대역 밸런스는 fact 8sig.가 fact 12sig.보다 좀 더 높게 형성되는 편이다. 따라서 소리가 전체적으로 비교적 밝고 명랑한 편이다. 블랙 핑크의 ‘How you like that’을 들어보면 가볍게 입체적인 무대를 눈 앞에 펼쳐놓으며 중앙 뒤편으로 넓은 무대를 형성해낸다. 확실히 풋웍이 가볍고 리듬감이 뛰어나 비트가 빠르고 역동적인 팝, 일렉트로닉, 록 음악 등에서 특히 발군의 강점을 보여준다.
확실히 저역 깊이는 5.5인치 미드 베이스 우퍼를 채용한 스피커치곤 매우 깊이 떨어진다. 높은 저역 이하 구간에서도 음량 감쇄가 더디고 완만한 슬로프를 그리다가 중간 저역 이하에서 떨어진다. 예를 들어 마커스 밀러의 ‘Cousin John’을 들어보면 낮은 현의 날렵하면서도 선 굵은 베이스 슬랩 피킹이 강력한 여운을 남긴다. 하지만 fact 12sig.에 비하면 저역 양감은 작은 편이어서 체급 차이는 분명히 난다. 이는 방 사이즈에 따라 장, 단점이 있는 부분인데 확실 fact 12sig.는 육중한 무게감을 가지고 있다.
음색적인 부분은 전반적으로 섬세하면서 특히 흠 잡을 만한 정도의 착색은 없다. 중역대가 약간 얇고 fact 12sig.에 비하면 무게 중심이 높은 편이어서 상쾌하고 날렵하며 악기들의 소리를 비교적 정확하게 잡아낸다. 다른 악기도 마찬가지지만 예를 들어 요요마가 연주한 엔니오 모리코네의 ‘Gabriel’s oboe’를 들어보면 온도감이 있으면서도 약음 표현력을 통해 단단하고 담백한 첼로 사운드가 일품이다. 전통적인 하베스, 스펜더보단 더 섬세하고 명징하되 최신 하이엔드 브랜드보단 나무 인클로저의 음색은 남아 있는 편이다.
fact8 sig.는 fact 12sig.에 비해 무게 중심이 높고 좀 더 날렵하며 스피커는 아주 쉽게 사라진다. 2웨이 북셀프나 동축, 정전형에 필적하는 정교한 포커싱과 홀로그래픽 음장 및 스피드를 지녔다. 하지만 28Hz까지 저역이 하강하면서 플로어스탠딩의 깊은 저역을 가지고 있다. 트론트하임 솔리스텐이 연주한 브리튼의 ‘Simple symphony’에서 대쪽처럼 강단이 넘치고 날렵한 현이 공간을 가르곤 바람처럼 사라진다. 하지만 fact 12sig.에 비해 저역의 두께와 권위감은 낮은 편으로 후면 LF 조정 토글은 디폴트 0에 세팅하고 들을 때가 가장 좋다.
총평
PMC fact 8sig. 및 12sig.가 발매된 지도 꽤 시간이 흘렀다. 그 동안 같은 영국의 여러 메이커들이 신제품을 출시했고 이를 바탕으로 R&D 결과를 하위 모델에 전이해주면서 전반적인 퍼포먼스 향상을 이뤘다. 이즈음에서 PMC의 두 모델은 여전히 동일한 설계를 유지하면서 롱런하고 있는 모습이다. 실제 필자 같은 경우도 이 라인업을 상당히 여러 앰프, 소스 기기와 매칭해 들어보고 리뷰 했다. 하지만 한결 같은 모습으로 자신의 개성을 표출하면서 앰프에 따른 성능 차이도 밤과 낮처럼 보여주었다.
특히 fact 12sig.는 fact 8sig.와 감도에서 부려 5dB를 차이를 보이며 좋은 앰프란 무엇인지 실험대 위에 올려놓곤 했다. 한편 fact 8sig.는 12sig.라는 헤비급을 라이트급으로 감량한 모델이나 비교적 앰프에 부담을 덜 주면서도 상위 모델의 맛을 잘 살린 스피커다. 돌비 애트모스부터 애플 공간음향까지 음악 시장을 뒤흔든 PMC의 저력을 확인할 수 있는 모델이다.
글 : 오디오 평론가 코난
제품 사양
Drive Units:
LF – 2 x fact 140mm (5.5″) super-long-throw
HF – 1 x fact 19mm high-res, SONOMEX soft dome, ferro-fluid cooled
Effective ATL™ Length:3m (9.8ft)
Frequency Response:28Hz – 30kHz
Crossover Frequency:1.7kHz
Impedance:8 Ohms
Input Connectors:2 pairs 4mm PMC Ag terminals (Bi-amp or Bi-wire)
Recommended Amp Power:15 – 200W
Recommended Drive Unit Torque Settings:HF: 0.6 MF: 0.75 LF: 0.75
크기 : 높이 1030mm+25mm, 너비 155mm+80mm, 깊이 380mm+10mm
무게 : 20kg
제조사 : Professional Monitor Company (UK)
공식 수입원 : 웅진음향 (www.wjsound.com)
공식 소비자 가격 : 15,000,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