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의 발견
SNS를 하다가 친구가 올린 한 장의 사진을 보곤 정신이 멍해졌다. 1965년에 상상한 미래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었다. 지금으로부터 반세기도 훨씬 더 된 과거에 그린 그림이었다. 1~20년 전이라면 어느 정도 수긍했겠지만, 무려 58년 전에 이런 상상을 했다니 믿기지 않았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리 낯설지도 않다. 나만 해도 학부 시절 미래의 가전제품에 대해 상상력을 동원해 디자인해 보라는 과제에 미래의 오디오를 그려 갔으니까. 그리고 그 기능, 인터페이스는 디테일이 떨어질 뿐 지금과 꽤 비슷했던 기억이 있다.
이 그림은 이정문 화백이 ‘서기 2000년대 생활의 이모저모’라는 주제로 그린 것이다. 태양열을 사용해 난방하고 전기를 얻으며, 일상생활에선 전기 자동차를 몰고 다닌다. 전기 자동차를 예언했다. 움직이는 도로는 무빙워크 같은 거로 생각하면 현재와 닮았고, 전자 신문은 스마트폰이나 인터넷 뉴스로 현실이 되었다. 로봇이 청소하는 것은 정확히 일치한다. 대망의 우주여행은 대중화되진 않았지만, 일론 머스크가 운영하는 스페이스 X 등 민간 우주여행이 실제로 가능한 상황이다.
현재와 미래의 모습을 과거의 여느 신문 혹은 잡지에서 심심풀이로 볼만한 만화에서 발견한 순간 놀랍고 흥미로운 건 당연했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반세기 이후의 우리 삶도 내다볼 수 있을까? 지금도 가능한 자율 주행이 대중화되고, 사물 인터넷이 더 발전해 우리의 삶을 AI가 편리하게 보조해 줄 것이며, 건강 관리 또한 원격은 물론 AI가 일정 수준 대체해 줄 듯하다. 도시는 완벽히 슈퍼컴퓨터가 제어하는 스마트 시티로 거듭날 것이다. 요즘 뉴스에 종종 등장하는 초전도체가 완성되면 여러 산업을 급격히 진보시킬 것이 뻔하다.
스트리밍 앰프
과거에 상상했던 오디오란 어떤 것일까 생각해 보았다. 집에서 사용하던 집채만 한 스피커와 함께 장전축이 떠오른다. 이후 하이엔드 기기들도 나왔지만, 모두 분리형에 여러 케이블을 연결해야 했다. 기기는 모두 컸고, 직접 노브나 버튼을 손으로 조작해야 했다. 특히 기술 발전을 가장 빠르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소스기기는 턴테이블을 지나 CD 플레이어로 발전했다. 포맷의 변화가 하드웨어 발전을 추동했지만 모두 물리 매체인 것은 동일했다.
오디오에 있어 21세기 들어 가장 큰 변화는 아마도 물리 매체에서 어느 정도 벗어났다는 사실일 것이다. 음원을 통해 음악을 감상할 수 있게 되었고, 그것이 가능하게 했던 것은 PC다. 그리고 지금은 스마트폰이 그 역할을 이어받고 있다. 그리고 현재 ‘네트워크 스트리밍’이라는 단어로 통용되는 이 방식으로 우리는 음악을 듣고 있다. 온라인으로 음악을 스트리밍 하는 서비스가 생겨나면서 음악을 개별적인 하드웨어에 저장할 필요가 없어졌고, 그저 스마트폰이나 패드에서 앱으로 컨트롤할 수 있게 되면서 리모컨을 쓸 일이 많이 사라졌다.
벨칸토 E1X
벨칸토 E1X는 바로 그런 스트리밍 플레이어를 품고 있다. 그리고 동시에 인티앰프다. 이런 형태의 디바이스는 어느 때부터인가 하나의 장르가 되었다. 모터는 물론 물리 매체를 읽어 들여야 하는 픽업이 필요 없어지면서 소스 기기는 매우 작은 물리 공간 안에 설계가 가능해졌고, 올인원은 활개를 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떤 간섭, 노이즈나 진동도 허용하지 않으며 서로 다른 기능과 인터페이스를 지닌 기기를 하나의 몸체 안에 넣는 게 가능할까? 이런 설계는 몇몇 뛰어난 엔지니어를 보유한 메이커에서 가능했고, 그중 하나가 벨칸토다.
우선 디자인을 살펴보면 이전 블랙 시리즈 라인업의 그 미니멀 디자인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다른 면이라면 풀 알루미늄을 사용한 모노코크 방식에서 벗어나 일반적인 섀시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벨칸토의 핵심 기술은 거의 모두 투입하고 있는 모습이다. 벨칸토 블랙 시리즈 디자인의 트리클 다운은 두 손들어 반길만한 일이다. 벨칸토 ASC1과 MPS1이 처음 출시되었을 때를 기억하는가? 디지털, 아날로그 입력을 받아 처리 후 모두 디지털 광 출력, 파워앰프에서 디지털 변화를 거쳐 바로 스위칭 증폭하는 방식이었다. 초정밀 마스터 클럭을 사용했고, ASC1과 MPS1 사이 인터페이스에서 발생할 수 있는 노이즈 및 음질 저감을 위해 디지털 광 전송을 택하는 등 혁신적인 앰프 설계를 보였다.
이후 블랙 시리즈의 DNA는 EX와 E1X 시리즈를 낳는 산파로서 기능했다. 그리고 E1X는 아마도 블랙 시리즈의 음향적 DNA를 비교적 가장 낮은 가격대에 즐길 수 있는 제품이다. 우선 인터페이스를 보면 전면 좌측에 헤드폰 출력단, 그리고 우측에 볼륨 및 메뉴 조작을 위한 노브가 마련되어 있다. 중앙엔 간략한 정보만 표기되는 디스플레이 창이 보인다. 후면으로 눈을 돌리면 여러 입/출력 단자들이 이 제품의 정체성을 알려준다. 세 개의 아날로그 RCA 입력 중 두 개는 라인 레벨 입력이며, 하나는 생각지도 못했던 포노단이다. 참고로 포노단의 경우 MM/MC 겸용이며 메뉴에서 세팅 값을 조정(MM의 경우 40/46dB, MC는 60/66dB) 할 수 있다. 또한 MC의 경우 로딩 임피던스를 50, 100, 500, 1000Ω 네 가지 옵션 중 선택 가능하다.
한편 디지털 입력단도 다양한다. USB(B) 입력은 물론, USB(A)도 마련되어 있어 PC와 연동 가능하며 플래시 메모리 USB 음원도 재생할 수 있다. 이 외에 광, 동축, AES 등의 디지털 입력단을 활용할 수 있다. 이더넷 입력단은 스트리밍 재생을 위해 필수다. 참고로 USB 입력에선 최대 PCM 24-bit/384kHz, DSD는 DSD128까지 재생 가능하다. 나머지 입력단에선 PCM의 경우 24-bit/192kHz, DSD는 DSD64까지만 대응하지만, 현재 온라인에서 유통되는 음원 중 재생하지 못할 건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네트워크 스트리밍 관련 E1X가 지원하는 프로토콜은 DLNA/UPnP가 대표적이다. 이를 통해 타이달, 코부즈 등 오디오 파일들이 선호하는 스트리밍 서비스로 고해상도 음원까지 재생할 수 있다. 이 외에 ROON에도 대응하므로 ROON 사용자에게도 고려 대상이 된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웬만한 스트리밍 플레이어들이 지원하는 블루투스, 에어플레이 등은 모두 생략되었다. 아마도 무선 프로토콜로 인한 음질적 저하를 고려한 것일까? 대체로 이런 콘셉트의 제품들이 흔하게 달고 나오는 후면의 무선 와이파이, 블루투스 안테나도 없는 이유다.
하지만 벨칸토 E1X는 그 대신 음질적으로 더 유용한 부가 기능을 설치해놓고 있다. 틸트(Tilt) 같은 일종의 EQ로서 0.6dB 간격으로 위로 5단계, 아래로 5단계, 마치 시소 같은 이퀄라이저를 마련해놓고 룸 어쿠스틱 유형 및 취향에 맞게 선택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한편 저역의 증감을 위해 별도의 베이스 EQ도 내장해 저역 증감이 가능하도록 했다. 틸트는 775Hz 기준, 베이스 EQ는 100Hz 기준으로 세팅되어 있는데 룸 상황 및 스피커 매칭에 따라 상당히 유용하다.
청음
이번 시청에선 벨칸토 E1X를 중심으로 스피커는 PMC의 fact.12signature를 사용했다. 이 앰프를 테스트하는 데 있어 필요한 것은 스피커 한 조와 이더넷 케이블, 그리고 전원 케이블이 전부였다. 하지만 실제 들어보면 올인원 스트리밍 앰프의 편의성에 더해 자리를 차지하는 면적이 매우 적어 미니멀 디자인을 선호하거나 작은 공간에서 솔로 생활을 즐기는 사람들에겐 최적의 하이파이 제품이 될 듯해 보인다.
음질적으로는 일단 매우 맑은 배경 위에 자리하는 매끈한 표면 질감 등이 눈에 띄는 특징으로 다가왔다. Marian Hill의 ‘Down’ 같은 곡을 들어보면 새하얀 캔버스 위에 처음 붓을 대는 듯한 피아노가 그 위에 색을 입혀나가는 듯하다. 귀를 대고 트위터의 소리를 들어보아도 그 어떤 잡음도 감지되지 않는데, 그만큼 피아노 소리는 온전히 투명해진다. 전체적으로 균형이 잘 잡혀 있으며 착색도 거의 없는 편이어서 취향을 많이 타진 않을 듯하다.
모든 소리가 싱싱하고 역동적으로 펼쳐진다. 아무래도 정보량 및 입체감이 높아서인 듯한데, 이런 특성 덕분에 매우 현대적이고 깨끗한 재생음을 들을 수 있다. 특히 저역은 놀라울 정도로 맑고 동시에 긴장감 넘치는 텐션을 보여준다. Musica Nuda가 리메이크한 비틀스의 ‘Come together’를 들어보면 상상했던 것보다 더 낮은 대역까지 뭉치거나 엉키지 않고 빠르게 하강해 으르렁거린다. 저역의 양감으로 승부 하기보단 그 질적 표현력이 돋보이는 세션이었다. 클래스 D 증폭이지만 의외로 차갑다는 느낌은 별로 없다.
다시 한번 해상도와 다이내믹스에 대해 살펴보자. 여러 음악 중 유독 헤비메탈, 그중에서도 메가데스의 ‘Symphony of destruction’에서 꽤 유의미한 단서들을 포착할 수 있었다. 원래 이 곡은 다이내믹스가 그리 크지 않은 녹음이지만, 강음에서 약음까지 아주 좁은 다이내믹스 안에서도 각 악기의 분리가 잘 일어난다. 그만큼 하모닉스 표현이 뛰어나다는 방증이다. 한편 같은 스피커 기준 다른 앰프에선 잘 들리지 않던 하이햇 심벌 소리가 악기들 사이에서 또렷하게 비집고 나와 상세하게 들린다. 엄청난 해상력의 증거다.
아마도 보편적인 스트리밍 앰프 등 올인원 시스템에서 벨칸토 E1X로 교체한다면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입체감일 것이다. 소스기기와 앰프로 인해 얼마나 많은 시각 정보의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앰프가 바로 E1X다. 정경화와 몬트리올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함께 한 멘덴스존 바이올린 협주곡에서 평소 듣던 좌/우 넓이 그리고 깊이감이 남다르다. 이 앨범의 녹음이 1972년인 것을 감안한다면 이 제품이 얼마나 많은 공간 정보를 분해해 정확히 표현해 내고 있는지 놀라울 뿐이다.
총평
벨칸토 디자인을 지휘하는 존 스트론저(John Stronczer)의 필생의 역작 블랙 시리즈는 블랙 EX와 블랙 E1X에 자신의 DNA를 너그러이 그리고 듬뿍 넘겨주었다. 그리고 각 라인업을 구성하는 스트리밍 DAC 및 파워앰프를 하나의 섀시에 다시 또 융합한 결과물이 E1X다. 입력된 모든 신호는 AMiP라는 총 여섯 개의 프로세서로 구성된 통합 프로세서를 통해 처리된 후 HDR II 코어를 통과하고, 최종적으로 하이펙스 Ncore 클래스 D 모듈에서 증폭하는 일련의 플랫폼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결과적으로 섀시 및 일부 설계 외엔 모두 벨칸토 블랙의 설계 공식을 이어받아 단 하나의 인티앰프로 집결시키고 있는 모습이다. 여러 올인원 스트리밍 앰프를 리뷰했지만 이 가격대에 비견할만한 모델은 극히 적다. E1X 올인원 네트워크 인티앰프는 리그를 지배할 게임 체인저다.
글 : 오디오 평론가 코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