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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가 아날로그의 결정판

레가 Planar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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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날로그로 통하다

때론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것들끼리 사실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는 데에 놀라곤 한다. 오디오에서도 이런 일들은 비일비재해서 항공 우주나 의료기기 또는 군사 관련 계통에 있었던 사람들이 오디오 브랜드에서 일하는 일이다. 알고 보면 그 미세한 회로와 내부의 증폭, 시그널 프로세싱은 다른 분야에서 다루는 공학을 응용한 것들인 경우다. 서로 상관없어 보이는 계통의 기술이 융합할 때 오히려 그 결과물은 독창적이며 때론 그 산업을 이전보다 더 나은 방향으로 훌쩍 진보시킨다.

아날로그 오디오, 즉 엘피를 듣는 데 필요한 오디오에서도 이런 일들이 있다. 몇 년 전 사용해본 지코 같은 브랜드가 바로 이런 경우에 해당된다. 슈어 카트리지를 사용하다가 바늘이 망가지거나 닳아서 교체해볼 생각을 해본 사람이라면 이 브랜드를 알 것이다. 카트리지 제조업을 접은 슈어 덕분에 오히려 유명해졌는데 지코는 슈어 카트리지의 대체 바늘을 다양하게 생산해내는 대표적인 제조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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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들이 만들어낸 카트리지를 보면 마치 도자기를 연상시키는데 실제로 세라믹을 구워서 사용했다. 마치 생두를 사서 자신들만의 입맛대로 볶고 갈아서 원두커피를 만들어먹듯 모든 것을 자체적으로 만들어서 사용한다. 그런데 알고 보면 지코는 19세기부터 기모노를 만들기 위한 바느질용 바늘을 제작해왔던 브랜드다. 이후 20세기 중반부터 레코드 재생을 위한 바늘을 만들기 시작했고 현재에 이르러 수많은 MM 카트리지를 바늘 하나로 회생시켜주는 소중한 브랜드로 성장한 것이다.

얼마 전 낚시를 하고 있는데 문득 낚싯대가 마치 턴테이블 톤암 같고 찌와 바늘은 마치 카트리지 같다는 생각을 했다. 카트리지 캔틸레버와 스타일러스로 엘피 소릿골에 기록된 음악을 길어오르듯 낚시 바늘로 강물 속을 유영하던 물고기를 낚는 것이다. 사실 이런 상상은 아주 비현실적인 것은 아니다. 아나로그적인 것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서로 연결되어 통하게 되어 있으니까.

이제 소개할 레가 같은 경우 초창기 여러 벤처 기업들의 성장을 도왔고 그들 중엔 낚싯대나 찌, 탁구채, 휠체어 등을 만드는 혁신적인 회사들이 있었다. 소재 그리고 재료공학과 가공 등 오랫동안 그 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레가의 대표 로이 간디는 턴테이블 제작 이상의 포텐셜을 가진 사람이었다. 진동과 소재 그리고 구조 역학과 관련해 그가 쓴 저서 [A VIBRATION MEASURING MACHINE]은 그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방대한 연구의 증거 중 하나다.

Planar 10 Apheta 3 Cartridge

레가 엔지니어링의 정상

플래그십 턴테이블과 톤암을 개발하면서 레가는 로이 간디를 중심으로 고민에 빠졌을 것 같다. 이미 Planar 8만으로도 레가 엔지니어링의 정수가 모두 구현되었다고 봐도 무방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레가의 설계 사상을 한 순간에 갈아엎을 수는 없다. 그들의 설계 원칙은 견고하다. 무엇보다 질량은 최대한 적게 그리고 강성은 최고 수준으로 높이는 것이다. 질량이 높으면 에너지를 저장하게 되어 있으며 그 에너지가 빠져나가면 음악 에너지도 손실되고 결국 음악은 훼손된다는 것이 전제로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단 플린스 소재부터 시작해서 모터, 플래터 등을 최소한의 질량을 가진 소재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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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레가의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하나 나온다. 플래터 소재를 바꾸는 것이다. 사실 플래터는 아무리 저 질량의 고강도를 지향하는 레가라고 하더라도 타협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속성에 더 가까운 재료를 찾아냈다. 유리가 아닌 세라믹이다. 세라믹은 사실 독일 틸&파트너의 아큐톤 드라이브 유닛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소재다. 물리역학 분야에서 깊은 연구를 거듭하고 있는 그들이 세라믹을 괜히 사용했을 리 없으며 특유의 소리를 갖기도 한다.

module 3 planar 10

레가는 Planar 10에 바로 이 세라믹을 사용했다. 세라믹 산화 분말을 재료로 압축과 소성 과정을 거친 후 다이아몬드로 정밀하게 절단해 만들었다. 이 플래터는 유리보다 더 정확하고 평탄한 표면 처리가 가능했다. 생김새는 동일하다. 플래터 외측을 두껍게 그리고 내측은 얇게 가공해 플라이휠 효과를 최대화하고 있는 모습. 이를 통해 관성 모멘트를 높여 작은 토크의 모터로도 수월하고 회전하면서 균질한 회전 속도를 구현했다.

이를 회전시키는 내부의 서브 플래터는 황동 하우징에 알루미늄 소재 플래터 그리고 강화 공구강 스핀들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더불어 어셈블리도 저 질량으로 제작한 모습. 특히 이 어셈블리의 가공 정확도는 놀라울 정도다. 오일을 교체해보면 알겠지만 하부 스핀들과 홀 사이에 거의 빈틈이 없이 결합되어 어떤 불필요한 회전 소음도 만들어내지 않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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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외에 메인 베어링과 톤암 사이 플린스엔 두 겹의 브레이스를 추가로 결합해 강도를 최고조로 높여놓은 모습. 하지만 여기에서도 차이가 있다. Planar 8이 모두 두 겹 모두 페놀 수지를 사용한 것과 달리 Planar 10에선 하단만 페놀 수지를 사용하고 상단엔 세라믹을 사용해 소재를 달리하고 있다. 이는 진동 측면에서 Planar 8보다 우수할 수밖에 없다. 두 개 이상의 서로 다른 질량과 강도를 가진 소재를 겹쳐서 구성할 경우 진동 감쇄 시너지는 더욱 커지기 때문. Planar 8인 Tancast 8 폴리우레탄 및 페놀 수지의 2중 구조라면 Planar 10은 3중 구조로 설계해 한 단계 더 진보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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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터와 EBLT 벨트를 통해 가벼우면서 정밀하고 진동과 소음이 적은 구동 부를 갖춘 것은 Planar 8과 동일하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도 플래그십은 다시 한 번 차등을 보인다. 다름 아닌 전원부다. Planar 8에서 채용한 Neo PSU도 기존 RP10에서 차용한 DSP를 사용해 성능을 한 단계 높였지만 Planar 10은 여기서 더 나아갔다. 바로 P10 전용 PSU인데 더 높은 제어 안정성과 편의성은 물론 아주 미세한 속도 조정까지 가능하다. 내부엔 DSP를 탑재해 크리스탈로부터 얻은 정확한 구형파를 플래터가 요구하는 정확한 속도로 회전시키는 데 필요한 주파수로 나누는 DSP를 내장하고 있다.

Apheta 3 side view on arm

셋업 및 청음

레가 Planar 10 테스트를 위해 동원한 카트리지는 플래그십 모델에 걸맞게 최상위 카트리지 Apheta 3를 선택했다. 톤암에 장착한 후 그 모습을 보면 이 카트리지는 그 디자인부터 레가 Planar 10을 위해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마치 몸에 꼭 맞는 맞춤 정장을 입은 느낌이랄까?

그도 그럴 것이 일단 톤암이 하위 RB880과 외모부터 차이가 크다. 멋지게 반짝이는 알루미늄 튜브와 함께 역시 다이내믹 밸런스 톤암에서 볼 수 있는 정밀한 다이얼 등이 눈에 띈다. 내부 부품끼리 최소의 접점을 가지면 정밀한 베어링 하우징과 스핀들을 통해 수평, 수직으로 매우 유연한 운동이 가능한 톤암으로 실제 그 성능은 직접 조작해보고 들어보면 바로 알 수 있다. 베어링 어셈블리의 공차가 1/1000mm 미만이라고 하니 그 정밀도가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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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적으로 균형 잡힌 사운드라서 누가 들어도 좋을 소리다. 요컨대 취향을 많이 타지 않는 소리다. 게다가 플래그십으로 올라오면 주파수 균형이 하위 모델과 조금 달라진다. 중역에 온도감이 높고 중역대 에너지가 몰려 있는 하위 모델에서 이젠 상당 부분 평탄한 밸런스를 보인다. 이번 시청엔 Apheta 3 카트리지를 사용한 영향도 있지만 턴테이블의 영향도 지대하다. 예를 들어 에바 캐시디의 ‘Fields of gold’나 ‘Autumn leaves’ 등을 들어보면 또렷한 피아노와 에지 있는 어쿠스틱 기타 등 전반적으로 높은 해상도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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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에 레가에 대해 보편적으로 상상하는 이미지는 풍성한 중역대를 위주로 배음이 풍부하고 잔향 시간도 길어 온건한 사운드였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Planar10으로 올라오면 세부 묘사와 표면 밀도감 등이 급상승한다. 시벨리우스 트리오의 ‘Nene -I Jumping on the walls, Energico’을 들어보면 피아노와 바이올린 그리고 첼로의 음색 특성이 명확히 구분되며 악기 분리도가 높다. 레가에서 이런 하이엔드 사운드가 펼쳐지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솔직히 개인적으로 전작 RP10을 사용하고 있는데 구형에서 다시 한 번 업그레이드된 모습이 확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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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착하고 편안한 음색을 가진 턴테이블이다. 한편 좋은 리듬감을 가지고 있어서 통통 튀는 리듬 파트가 흥겨움을 북돋운다. 지나치게 잔향을 흐리거나 악기의 기음을 뭉개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레가 Planar 10은 확실히 예전 P8, P9은 물론이고 RP10보도 한 수 위다. 폴 사이먼의 ‘Graceland’에서 훌륭한 추진력과 페이스, 타이밍을 통해 음악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확실히 세라믹을 사용한 플래터는 소리에 약간 그 특성을 가미하면서 진동 특성을 개선하는 데 일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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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적으로 하위 모델들과 상당 부분 다른 면들이 부각되는데 전체적이 음장 형성도 그 중 하나다. 깊고 넓게 펼쳐지는 무대는 교향곡 등 대편성 녹음 재생에서도 강점을 보인다. 뚜렷한 악기 분리도 그리고 깊은 심도가 눈에 띈다. 더불어 저역도 깊고 빠르게 내려가는데 살집이 크지 않아 전체적으로 군살이 쪽 빠진 몸매를 자랑한다. 예를 들어 빅토리아 뮬로바의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을 들어보면 싱싱하고 첨예한 뮬로바의 바이올린 그리고 후방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보스턴 심포니의 울림이 낭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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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평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베리티 Rienzi 스피커 그리고 프리마루나 EVO400 및 패러사운드 Zphono XRM 포노앰프를 사용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Planar 8 그리고 지금 내가 사용하는 RP10과 비교가 되었는데 확실히 한 단계 올라선 성능과 사운드를 들려주었다. 플래터는 물론이고 톤암 그리고 전원부까지 많은 부분들이 업그레이드되었으니 당연할 수도 있지만 이것들이 각각 내는 시너지는 매우 넓은 면에 걸쳐있다. 특히 기존에 레가 턴테이블로 듣던 클래식 레코딩에서 그 성능이 차이가 두드러졌다. 레가 Planar 10은 레가가 쌓아올린 아날로그 기술의 결정판이다.

글 : 오디오 평론가 코난

Planar 10 Turntable Dimensions (W x H x D)
420 x 115 x 350 mm (with dust cover fitted)

P10 PSU Dimensions (W x H x D)
218 x 80 x 320 mm

Turntable Weight
4.7 kg

P10 PSU Weight
3 kg

Written by 코난

코난 이장호는 하이파이 오디오를 평가하는 평론가다. <고음질 명반 가이드북 1,2> 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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