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디안
디지털 오디오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메이커를 거론한다면 영국의 메리디안을 빼놓을 수 없다. 유독 영국은 하이엔드 디지털 부문에서 진보적인 발자취를 보여왔고 그 중 린, 메리디안, dCS는 현재도 전 세계 오디오 메이커 중 손에 꼽을만한 디지털 전문 메이커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 그들의 지향점은 조금 다르다. 언제부턴가 린은 네트워크 플레이어 및 액티브 스피커 등을 중심으로 완전체가 되어가고 있으며 dCS은 정통적인 노선을 굳히고 있다.
그 중 메리디안은 가장 독특한 길을 걸어오고 있는 중이다. 본래 메리디안하면 떠오르는 기기는 시디 플레이어였다. 500 시리즈부터 시작해 800 시리즈 등 레퍼런스급 플레이어로 사랑을 받아왔다. 그런 와중에 린과 함께 가장 선도적으로 네트워크 플레이어를 가정용 하이엔드 시스템 안으로 초대했다. Sooloos가 그것. 그리고 이것은 현재 ROON의 시발점이 되었다. Sooloos 소프트웨어 팀이 독립한 것이 ROON이기 때문이다.
한편 메리디안의 대표 밥 스튜어트는 메리디안 외에 자신의 별도 회사를 설립했다. 바로 우리가 타이달 같은 스트리밍 서비스에서 최고 등급의 마스터 사운드를 들을 때 접할 수 있는 MQA라는 코덱이다. 밥 스튜어트는 일군의 엔지니어들과 함께 MQA 인코딩 알고리즘을 개발, 네트워크 스트리밍 시대에 고해상도 음원을 최소한의 용량에 인코딩해 유통할 수 있게 했다. 이에 따라 MQA 디코딩이 가능한 네트워크 플레이어는 이제 거의 필수가 되었다.
네트워크 스트리밍 시대 ROON 소프트웨어와 MQA 코덱 개발의 산파로서 기능한 메리디안은 그러나 자사 제품들에 더욱 노력을 경주해야할 때. 메리디안은 네트워크 플레이어 등 디지털 소스기기 대신 신제품 DSP8000XE 액티브 스피커를 최근 출시했다. 처음 출시되었을 때 꽤 커다란 반향을 일으였던 DSP 시리즈 스피커지만 한 동안 조용했던 라이업. 최근 기존의 DSP8000을 혁신한 DSP8000XE 출시를 기념해 본사 스탭들이 방한했다. 국내 굴지의 자동차 메이커와 메리디안 사운드 시스템이 전부라고 생각하면 오산. DSP8000XE엔 그들의 독자적인 디지털 기술의 정수를 담고 있었다.
DSP8000XE
메리디안 본사 담당자의 프리젠테이션이 시작되었다. 담담하게 조곤조곤 DSP8000XE의 설계와 기술적 설명을 덧붙였는데 내용이 충분하진 않아 메리디안과 국내 디스트리뷰터에서 따로 제공한 자료를 읽어보았다. 이를 바탕으로 찬찬히 알아보도록 하자. 우선 드라이브 유닛은 트위터와 미드레인지 그리고 세 발의 우퍼로 구성되어 있다. 아무리 내부에 강력한 앰프와 독자적인 DSP 기술이 녹아들어 있다고 해도 바탕이 되는 스피커 설계가 가장 우선순위다.
고역은 역시 최근 수년간 매지코, 락포트 등 하이엔드 스피커 메이커가 채용하면서 가장 각광받고 있는 베릴륨 트위터다. 포칼 베릴륨이 아니라 스캔스픽 베릴륨 특주로 보인다. 보이스코일이 순은이며 25mm 구경이다. 미드레인지는 EVO 미드레인지라고 해서 이도 메리디안이 특주해 만든 것으로 보인다. 160mm 구경의 미드레인지 아래로는 별도의 격리된 캐비닛에 총 세 개의 베이스 우퍼를 탑재하고 있다. 폴리프로필렌 소재 진동판을 사용하는 200mm 드라이브 유닛으로 채널당 무려 여섯 개를 채용했다. 기함급 규모에 더해 소재나 설계에 빈틈이 없어보인다. 캐비닛 또한 공진 감소를 위해 베이스 모듈 분리 및 자작나무/알루미늄/합성 수지 등을 여러 겹으로 덧대어 만든 인클로저 소재 등이 돋보였다. 카본 등을 사용한 것은 아니지만 현대 하이엔드 스피커의 설계 문법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모습이다.
내부에 장착한 앰프도 눈여겨볼만하다. 레퍼런스급 스피커를 목표로 제작된 스피커이기 때문에 앰프에서도 아낌없는 투자가 이뤄졌다. 우선 고역과 중역, 저역을 별도의 앰프가 제동하게 설계했다. 뿐만 아니라 저역도 총 여섯 개의 클래스 D 앰프가 각 유닛을 드라이빙한다. 트위터와 미드레인지는 청감상 가장 예민한 대역이기 때문에 클래스 AB 증폭 앰프를 통해 보다 음악적인 뉘앙스를 높인 모습이다. 충력은 각각 4옴 기준 150와트 수준. THD+N도 0.005% 수준으로 매우 낮다. 한편 저역을 담당하는 앰프는 클래스 D 증폭으로 페어에 4옴 기준 240와트 추력이다.
입력단도 무척 다양하다. 내부에 독자적인 DSP를 정말이지 매우 화려하게 꾸며놓았으며 다양한 입력을 모두 소화한다. 동축, 옵티컬 광 및 USB(C 타입) 등 디지털 입력에 대응하며 블루투스도 대응한다. 당연히 RJ45 규격을 통해 메리디안 스피커 링크를 사용할 수 있다. 아날로그 입력은 RCA 및 XLR 등 모두 가능하다. 스피커 전체 주파수 응답 구간은 3dB 기준 최소 18Hz에서 40kHz까지다. 초저역에서 초고역 이상까지 대응하는 진정한 풀레인지급 레퍼런스 스피커라고 할 수 있다.
- 익스트림 엔지니어링
하지만 메리디안 DSP8000XE의 진면모를 이 다음부터다. 단순히 디지털, 아날로그 신호를 입력받아 변환 후 증폭해 드라이브 유닛으로 출력하는 일반적인 액티브 스피커가 아니다. 내부엔 메리디안이 오랜 세월동안 갈고 닦은 절정의 디지털 관련 소프트웨어가 펼쳐져 있다. 어떤 신호가 들어와도 주파수 특성에서 딜레이 없이 매우 정교한 정위감을 보여주며 저역 또한 공간에 맞게 보정이 가능하다. 이 외에도 다양한 첨단 기술이 빼곡하다. 이는 메리디안이 음향 심리학에 의거한연구를 통해 개발한 독점적 기술들이고 이를 ‘익스트림 엔지니어링 프로그램’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Q-SYNC는 디지털 도메인에 지터를 최소화하며 시간축 오류를 없애는 기술이다. 당연히 MQA 디코더가 내장되어 있다. 메리디안의 대표 밥 스튜어트가 독립해 만든 코덱으로서 타이달 등에서 온라인으로 즐길 수 있다. 저역의 경우 ‘PRO-ACTIVE BASS’라는 기술은 베이스 우퍼가 과도하게 진폭하는 현상을 막아 대미지를 잎히지 않은 한 최대한의 출력을 만들어내도록 돕는다.
‘TRUE TIME’이라는 기술도 있는데 이름은 생소하지만 이는 일반적으로 DAC에서 칩셋에도 기본적으로 내장되곤 하는 필터를 의미한다. 하지만 DSP8000XE엔 메리디안의 독자적으로 설계한 일종의 아포타이징 필터를 내장하고 있다. 프리 링잉 현상을 최소화하며 시간축 측면에서 개선된 음질을 들을 수 있다. ‘TRUE LINK’는 메리디안이 개발한 전송 방식으로 기본적으로 소니/필립스가 만든 SPDIF 프로토콜을 사용하지만 클럭 신호 에러를 최소화하는 방식이라고 한다. 이 외에도 ‘FREE-Q’라는 기술도 돋보이는데 DSP8000XE를 배치하는 공간의 음향 문제를 보정해주는 기능이라고 한다.
청음 세션
본사 담당자의 프리젠테이션이 끝나고 여러 음악을 들어보면서 실제 퍼포먼스 측면에서 DSP8000XE의 성능을 살펴보았다. 첫 곡으로 아네트 아스크빅의 ‘Liberty’를 재생했는데 평소 종종 들었던 음원이라 친숙했다. 그러나 매우 넓고 입체적인 사운드는 일반적인 하이엔드 패시브 스피커와 결이 많이 달랐다. 디지털 기술로 새롭게 직조한 사운드로서 마치 마스터링 엔지니어가 새롭게 리마스터링한 듯한 음향을 만들어냈다. 특히 저역의 깊이와 펀치력이 매우 인상적이었는데 무척 낮은 대역까지 빠르고 묵직하게 재생했다.
역시 저역에 대한 느낌은 다른 곡에서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오디오파일에겐 익숙한 닐스 로프그렌의 ‘Bass & Drum intro’을 들어보면 초반부터 굉장한 에너지가 몰아친다.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한 육중한 저역에 시간축 특성 면에서 역동적인 추진력이 실려 있어 이게 과연 내가 기억하는 메리디안 사운드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얇거나 퍼지지 않고 굵은 심선으로 중후장대하게 타격하는 저역은 콘서트 홀보다는 마치 국장에서 음악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베릴륨 트위터의 쭉 뻗어나가는 예리한 고역은 이 스피커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개인적으로도 락포트를 사용하면서 종종 깜짝깜짝 놀라게 만드는 베릴륨 트위터인데 고역 끝까지 에너지를 잃지 않으면서 선형적으로 치고 올라가므로 해상도 면에선 무적이다.
더불어 에바 캐시디의 ‘Fields of gold’를 들어보면 off axis에서 음압 강하가 크지 않은 모습이다. 음악 재생 도중 잃어나 옆으로 이동해도 음장 변화가 크지 않은 편이다. 이런 특성은 스윗 스팟을 넓게 만들어주므로 정자세로 중앙에 앉아서 몰입하지 않아도 평균적으로 위화감 없이 좋은 음질을 즐길 수 있다. 가족 구성원들이 함께 음악을 좋아하고 자주 즐길 경우 거실에서 훌륭한 오디오가 되어줄 듯 하다.
필립 헤레베헤가 지휘한 모차르트의 ‘Requiem’에선 확실히 메리디안이 이중, 삼중으로 탑재해놓은 시간축 관련 설계가 정위감으로 드러난다. 예를 들어 바리톤, 테너, 소프라노 등 여러 성부의 위치가 무척 명료하며 그 움직임들이 영상처럼 이미지로 떠오른다. 마치 음원을 새롭게 재정비하고 위상을 재정렬한 듯 정확한 홀로그래픽 이미지를 직조해낸다. 더불어 전체적으로 보면 음상이 감상자를 향해 적극적으로 호소하는 사운드 스테이지를 그린다.
쇼케이스를 마치며
본사에서 직접 담당자가 찾아와 메리디안의 최신 기술 및 설계에 들을 수 있었고 다양한 음악들을 통해 퍼포먼스를 알아볼 수 있었던 유익한 시간이었다. 사실 메리디안의 밥 스튜어트가 MQA로 떠난 이후 메리디안 신제품을 좀처럼 접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보던 사이에 메리디안은 다양한 기술적 자양분을 차근차근 쌓아오면서 제품 개발을 해오고 있었다. 더불어 자동차 인포테인먼트 사업 및 하이엔드 홈 시어터 등 다양한 사업을 펼쳐오고 있었다. DSP8000XE는 바로 그 기술의 정수를 담은 제품으로서 메리디안이 안내하는 오디오의 미래를 보여주고 있다.
글 : 오디오 평론가 코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