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사람들은 특히 트렌드에 민감하다. 조금만 새로운 것들이 유행하게 대중들은 마음이 급해진다. 꼭 그런 트렌드에 몸을 맞기고 최신 기술이 적용된 제품을 사용해만 한다는 충동을 크게 받는다. 초고속 성장을 거듭하면서 잔인한 경쟁 사회가 형성되었고 그 와중에 뒤떨어지면 끝이라는 후천적 본능이 생겼는지도 모른다. 마치 반사 작용처럼 1~2년 만에 새로운 스마트폰으로 갈아타고 새로운 TV를 구입하며 자동차를 바꾸기도 한다.
오디오 구성 요소 중에선 디지털 기기가 가장 트렌드에 민감하다. 16비트만 들어도 아무 문제없다고 생각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요즘엔 24비트는 물론이고 DSD256, DS512까지 재생하지 못하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 같은 사람들이 많다. 사실 DSD는 판매하는 판매처도 별로 없거니와 리핑하려면 상당한 노고가 필요하다. 대개 이런 음원을 수 테라씩 보유하고 있는 사람들은 사실 어둠의 경로로 공유한 경우가 태반이기도 하다.
나의 경우 24/96 음원, DSD 음원이 약간 있을 뿐이며 대개 16비트 음원으로 듣는다. 워낙 온라인 음원 서비스에서 가짜 24비트 음원에 지치기도 했었고 가장 믿을만한 건 내가 직접 구입해 리핑한 16비트 음원이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쌓이기도 했다. DAC 같은 경우도 굳이 DSD까지 지원하지 않아도 별로 상관이 없다. 이런 이유로 때론 출시된 지 꽤 시간이 지나 고해상도 음원에 대응하지 못하지만 매우 저렴한 가격에 좋은 음질을 들을 수 있기도 하다.
최근 바쿤 DAC9740은 트렌드에 아주 민감한 사람이라면 DSD 미지원 때문에 그냥 지나칠 수도 있다. 하지만 실제 들어보면 스펙 위주의 트렌드에 조금만 거리를 두고 시야를 넓히면 이런 DAC에서 최근엔 맛보기 힘든 감동을 얻을 수도 있다. 버브라운 DAC 한 발 사용해서 특별한 필터 조정 기능도 없고 앞단에 화려한 FPGA를 때려 넣지도 않았다. 하지만 소리를 들어보면 깨끗한 배경에 정갈하면서도 음악의 맛을 살리는 잔향이 아름답다.
그 배경엔 잘 설계된 전원부와 각 입력단 그리고 무엇보다 아날로그 출력단이 자리하고 있다. 아마도 핵심이 되는 것은 바쿤 사용자라면 잘 알만한 SATRI 회로다. 이 버전이 꽤 많이 진화한 듯한데 DSD만 지원하지 않을 뿐 청감상 해상도와 SN비는 매우 뛰어나다. 마치 화선지에 그린 수묵화의 여백에서 오는 여유와 깊이랄까? 아무튼 가끔씩 들어보면 ‘최신 델타 시스마+FPGA’ VS ‘R2R 래더 DAC’ 같은 최근 대결 구도 외에 또 다른 제 3지대에 위치한 DAC 중 이런 별미들이 꽤 있다. 바쿤만의 레시피로 요리한 DAC9740의 맛이 바로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