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로그의 힘
‘나는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 지난 주 개봉한 ‘오펜하이머’를 본 후 이 대사가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표면적으로는 과학자와 전쟁에 관한 이야기가 핵심이지만 과학자의 고뇌와 윤리는 결국 인간에 대한 문제 그리고 거시적으로는 인류에 대한 고민으로 귀결된다. 이것은 어찌 보면 핵폭탄에 대한 시각을 단순히 전쟁 무기가 아닌 그 이면의 인간과 인류에 대한 문제로 치환한 영화다.
한편으로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영상과 음악 덕분이다. 음악도 훌륭하지만 특히 인간의 시야각 한계를 거의 꽉 채우는 아이맥스라는 포맷이 주는 스페터클과 포만감은 영화에 대한 몰입도를 몇 배고 증폭시킨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아이맥스 광팬으로 이미 과거 ‘다크 나이트’에서 아이맥스 필름으로 담아낸 영상에서 놀라움을 준 바 있다. 마치 광원을 갑자기 꺼버린 듯한 블랙 표현은 대단했다. 마치 암전과 같은 블랙은 아이맥스 필름이 여타 디지털 포맷과 완벽히 대비시키는 요소다.
같은 아이맥스 촬영이라고 해도 아이맥스 필름이 구현해내는 해상도와 현장감은 크게 다르다. 70mm 규격의 이 필름은 엄청난 부피와 소음 등 불편함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너무 무거워 ‘다크 나이트’ 촬영 중 한 대가 부서졌다고 한다. 일반 35mm 필름에 비해 면적이 3.5배 크며 영화 촬영용은 일반 영화용 필름보다 면적이 네 배 가까이 크고 카메라 무게가 30kg이 넘어 이동 자체도 굉장히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맥스 필름이 주는 현장감과 실체감 때문에 크리스토퍼 놀란은 아이맥스 촬영을 선호한다고 한다.
첨단 디지털 시대가 열린 지 한참이 지났지만 필름의 강점은 여전하다. 더 시야를 넓혀봐도 우리 주변에서 아날로그의 힘은 사라지지 않았다. 한편 화면이 커질수록 영상의 해상도 차이가 크다. 몇 년간 1080P 풀 HD 프로젝터로 집에서 100인치 스크린에 투사해 보던 것이 130인치 스크린에 보니 해상도 부족이 체감된다. 그저 작은 시스템에서 작은 볼륨으로 음악을 들을 땐 몰랐으니 좀 더 큰 공간에서 큰 볼륨으로 음악을 듣다보면 적당히 듣던 손실 포맷 음원의 해상도 부족이 악기의 지글거림으로 표현되어 손이 안 가게 되는 것도 비슷한 이치다.
듀얼과 함께 한 일주일
그래서 아날로그로 음악을 듣는 일은 항상 실체적인 체험이 된다. 얼마 전 지인들과 음악을 듣다가 또 병이 도져 동일한 음원을 무손실 음원으로 듣다가 엘피로 다시 들었다. 엘피를 듣자마자 귀에 착 달라붙는 음색이 귀에 걸렸다. 단지 귀가 아니라 몸에 먼저 반응하는 이 편하고 자연스러운 촉감에 무척 기분이 좋아졌다. 그렇다고 엘피가 만고불변의 진리는 아니다. 다이내믹레인지가 좁기 때문에 되레 디지털 시대 녹음된 대편성 녹음 등 다이내믹스 표현이 중요한 녹음은 음원이나 SACD가 더 좋은 경우도 많다. 하지만 아날로그 시대 녹음된 음악은 엘피가 거의 대부분 더 좋은 음질을 내줄 확률이 높다.
이즈음에서 다시 독일이다. 독일은 과학, 기술 측면에서 항상 전 세계 선두에 섰다. 그리고 하이파이 오디오 분야에선 특히 아날로그 관련 걸출한 엔지니어들을 가질 수 있었다. 그 중 독일 역사상 아마도 가장 오래된 턴테이블 전문 메이커를 들자면 듀얼을 빼놓을 수 없다. 모노 시절부터 스테레오 시절까지, 아날로그 시대부터 디지털 시대에 이르기까지 듀얼이라는 이름은 여전히 남아 아날로그 마니아들의 마음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이름으로 남았다.
최근 듀얼을 다시 만났고 그 주인공은 CS 618Q라는 턴테이블이다. 우선 이 모델은 듀얼의 레퍼런스, 매뉴얼, 오토매틱 라인업 중 매뉴얼 라인업의 최상급이다. 설치해놓고 보면 단단한 MDF에 무늬목을 입혀 그럴싸한 풍미를 내뿜는다. 플래터는 상위 급답게 수지 계열이 아닌 알루미늄 소재를 사용해 정교하게 가공했다. 톤암을 듀얼에서 자체적으로 만든 것으로 20세기 후반의 포름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모습이다. 몸체에 더스트 커버를 장착해 먼지 유입을 막고 있으며 하단에 엘라스토머 인슐레이터를 장착해 진동을 흡수하도록 설계한 모습이다. 매우 전통적이 디자인이다.
좀 더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알루미늄 플래터 위에 두떠운 고무 매트를 기본으로 제공한다. 그대로 사용해도 그만이지만 좀 더 성능을 업그레이드하고 싶다면 시중에 카본 등 다양한 매트를 적용해 사용해도 좋을 듯하다. 이 플래터를 회전시키는 구동부는 CS 618Q의 핵심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 예상을 깨고 이 턴테이블은 다이렉트 드라이브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1980년대 일본을 중심으로 전 세계에서 맹위를 떨쳤던 다이렉트 드라이브 방식이다. 최근 몇 년간 다이렉트 턴테이블을 제대로 만들어내는 하이엔드 턴테이블 메이커까지 나타나면서 제 2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기도 하다. 회전은 33 및 45 그리고 78회전까지 턴테이블 상판 우측에 마련된 노브를 조작해 편리하게 조정 가능하다.
톤암으로 시선을 옮기면 고전적인 형태의 직선형 알루미늄 파이프가 눈에 띈다. 실효 길이는 221,5mm, 오프셋 앵글은 25.6도를 갖는 톤암으로 CS 618Q에 최적화되어 있고 교체는 불가능하다. 베어링은 총 네 개의 베어링을 사용하는 트윈 짐벌 방식이다. 톤암의 수직, 수평 방향 모두 조용히, 유연하게 움직일 수 있게 만든 모습이다. 침압 조정이 가능하며 옆으로 보면 보편적인 형태의 안티스케이팅 조정 노브가 마련되어 있어 추 방식보단 편리한 편이다. 한편 침압을 주는 방식은 스태택 밸런스 방식으로 후방의 무게 추를 사용해 조정 가능하다.
CS 618Q엔 기본 카트리지로 오토폰의 2M Blue가 제공된다. 아마도 국내/외에서 입문용 MM 카트리지로 이보다 더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는 카트리지가 있을까? MM 카트리지지만 해상도도 높고 활기찬 음색에 운용도 편리한 편으로 듀얼이 기본 옵션으로 제공하는 이유가 있다. 카트리지 추천 침압인 2g을 맞추어 재생해보면 왜 인기와 호평을 동시에 받는지 알 수 있다. 참고로 오버행은 19mm. 헤드셸을 분리할 있어 카트리지 교체시 편리하다.
아마도 이 제품의 가장 큰 강점이라고 하면 자동 리프트 및 자동 정지 기능일 것이다. 일단 원하는 속도(예를 들어 33rpm)로 세팅한 후 톤암을 움직여 카트리지를 엘피에 올리려 하면 플래터가 자동으로 회전한다. 그리고 엘피 재생이 끝나면 톤암이 자동으로 올라가 카트리지의 불필요한 마모를 방지한다. 또한 플래터도 자동으로 멈추므로 시작, 정지 버튼 등을 별도로 누를 필요가 없다. 잠시 낮잠을 자면서 엘피를 듣다가 엘피를 다 읽은 후 카트리지가 계속 공회전하는 현상이 생길 이유도 없다. 요즘 자동 리프트 기능이 없는 턴테이블에 사용하는 액세서리만 해도 수십만 원씩 하는 걸 생각하면 정말 요긴한 기능이다.
청음
듀얼 CS 618Q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라면 포노앰프가 내장되어 있다는 점이다. 후면에 포노, 라인이라고 표기되어 있고 스위치를 통해 두 개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게 해놓은 점이 이를 말해준다. 여기서 주의해야할 것은 포노, 라인은 각각 ‘포노 입력’, ‘라인 입력’을 뜻한다. 언뜻 헷갈릴 수 있는 표현인데 앰프 입장에서 해석하면 정확하다. ‘포노’는 포노앰프 또는 포노단이 설치되어 있는 앰프의 포노단에 연결하라는 의미고 ‘라인’은 프리앰프나 인티앰프의 등의 라인 입력에 연결하라는 의미다.
이번 시청에선 이 턴테이블의 내장 포노앰프를 활용해 테스트하는 방식을 진행했다. 아무래도 포노앰프를 별도로 구비할 의사가 없을 경우 이 턴테이블을 선택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테스트엔 MSB Analog DAC의 라인 입력단을 사용했고 패스랩스 XA60.5 파워 그리고 락로트 Atria 스피커를 사용했다. 침압은 2g을 주었고 수평을 맞추고 카트리지 오프셋 확인 후 여러 엘피를 재생했다.
파트리샤 바버 – ‘My girl’
보컬이나 피아노 등 솔로 악기 녹음을 들어보면 음상이 뚜렷하게 맺힌다. 예를 들어 파트리샤 바버의 ‘My girl’을 들어보면 중앙에 선명한 포커싱. 팡거스냅은 전면으로 나서지 않고 후방 공간에 깨끗하고 명료하게 맺힌다. 플래터는 약간 떨어져 보면 거의 정지해있는 듯 회전 정밀도가 훌륭한 편이다. 파트리샤의 정확한 음정이 이를 방증한다. 속도가 정밀하지 못할 경우 음정이 떨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콜맨 호킨스 – ‘One note samba’
아마도 음색 측면만 고려한다면 관악기의 재생이 가장 힘들 것이다. 워낙 복잡다단한 하모닉스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콜낸 호킨스의 ‘One note samba’를 들어보면 색소폰 음색이 시청실을 가득 메운다. 악기 울림이 풍부하며 편안하게 공간을 감싼다. 어느 정도 울림, 즉 잔향을 동반하는데 기준 좋은 목질감이 매력적이다. 절대 차갑고 냉정한 소리가 아니라 유연하고 부드러운 소리다.
케미컬 브라더스 – ‘Block rockin’ beats’
듀얼 CS 618Q는 현대 하이엔드 턴테이블처럼 예각을 그리면서 에지있는 음상에 냉정한 표현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대신 두텁고 유기적이다. 케미컬 브라더스의 일렉트로닉 녹음에서도 중역대 도톰란 살집이 있어 어떤 음악을 들어도 포근하며 음결에 자극적이지 않은 고역으로 음악에 대한 집중력을 높인다. 제법 큰 비트, 리듬도 쉽고 편안하게 소화해주는 편으로 담백한 중저역이 매력적이다.
생상스 – 심포니 3번 중 ‘Presto’
차갑고 냉정한 최신 하이엔드 턴테이블과 거리가 먼 소리다. 더불어 무대는 깊고 풍부하게 펼쳐진다. 게다가 온건하고 포근하며 담백한 소릿결을 가지고 있어 피로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고 장시간 청취에도 적합하다. 대편성도 화려한 입체감보단 악기 고유의 음색. 텍스쳐 표현에 강점을 보인다. 더 깊고 단단한 저역은 아쉽지만 반대로 음색적 개성을 잃을까 두렵다. 트레이드 오프 관계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다.
총평
듀얼은 여전히 듀얼이다. 오랜 시간 동안 평범한 직장인부터 오디오 마니아들까지 듀얼은 아날로그 엘피를 좋아하는 순수한 음악 애호가들의 친구 같은 존재였다. 특별한 첨단 기술로 변혁을 일으키거나 일부 선택받은 사람들이나 호사가들만의 위한 오디오로 기능하지 않았다. 편리한 사용자 인터페이스와 기본 카트리지 포함에 포노앰프 내장 등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자동 리프트 및 자동 스톱 기능은 이런 듀얼의 철학과 일맥상통한다. 아침에 일어나면 커피를 한 잔 마시고 턴테이블에 엘피를 얹어 음악을 듣는 일로 하루를 시작한다. 커다란 집중을 요구하지도 음악적 긴장감을 유도하지 않아도 음악은 그것대로 듣는 맛이 좋다. 20세기 초에 시작해 약 120년을 아날로그에 바친 역전 노장 듀얼의 아날로그에 대한 시선은 21세기에도 여전히 빛나고 있다.
글 : 오디오 평론가 코난
제조사 : DUAL Deutschland GmbH
공식 수입원 : ㈜ 샘에너지
공식 소비자가 : 2,290,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