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를 보면 ‘인간’이 보인다. 길창덕의 <꺼벙이>에서는 천진난만한 말썽꾸러기 주인공이 떠오른다. 고우영의 <대야망>에서는 집념과 결기에 가득 찬 승부사 최배달이 등장한다. 김진태의 <시민 쾌걸>에서는 재기발랄한 등장인물들이 활개를 친다. 강도하의 <위대한 캣츠비>에서는 사랑에 휘둘리는 현대인의 초상이 보인다.
작가 남무성은 어떨까. 그는 음악만화라는, 블루 오션이라 말하기 어려운 장르를 개척한다. 그림체는 부드럽지만 선명하다. 음악지식은 덕후의 경지임이 틀림없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차고 넘치는 음악이야기에 정신줄을 놓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가 재즈에 관한 만화책을 설계한다. 이름하여 . 부제는 ‘만화로 보는 재즈음악 재즈음반’이더라. 믿고 읽는 남무성인지라 2019년 여름 책이 나오기가 무섭게 구입신청을 했다.
한국에서 재즈음악이 빛을 발했던 시절이 있었다. 시발점은 TV드라마였다. 제목은 <사랑은 그대 품안에>, 때는 바야흐로 1994년, 다행스럽게도 LP와 CD로 불리는 레코드시장이 사자후를 뿜어내던 시절이었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차인표 역)은 클린턴 대통령처럼 재즈악기를 호방하게 연주한다. ‘따라라 따라~’로 시작하는 배경음악 역시 드라마 열풍에 일조를 한다.
프랑스 출신 배우 알랭 들롱을 기억하는가. 그가 영화촬영을 할 때 어색한 몸동작을 보완하려고 감독이 담배를 피우라고 권했다는 설이 있다. <사랑은 그대 품안에>의 주인공의 연기는 어땠을까. 어색해 보이기도 그렇지 않아 보이기도 했다. 그 애매한 틈을 자연스레 메워 주는 부분이 주인공이 열정적으로 재즈를 연주하는 장면이더라. 순간 주인공의 연인(신애라 역)의 동공에서는 레이저가 쏟아진다.
<사랑은 그대 품안에> 덕분이었다. 당시 서울시내 레코드점에서는 마일스 데이비스와 빌 에반스의 음반을 찾는 이들의 발길이 드문드문 이어진다. 그제야 음지에서 기생하던 재즈음악이 활개를 치는 반가운 시간이 도래한 것이었다. 라는 믿음은 1년이 채 지나지 않아서 전설의 고향으로 회귀한다. 대중은 드라마에서 느낀 재즈의 매력에 오랜 시간 마음을 주지 않는다.
클래식과 함께 음악시장의 마이너리그에 속하는 재즈는 팝이나 록을 접한 후에서야 접근이 가능한 가깝고도 먼 나라의 음악이다. 때문에 음악적 특권의식에 빠진 재즈광이 적지 않았다. 이른 바 신흥 음악계급의 탄생이었다. 1940년대까지는 미국 댄스홀의 유흥음악으로, 1950년대 이후에는 예술가의 음악으로, 1980년대에는 팝재즈라는 대중 음악으로 변신을 거듭하던 재즈를 남무성 작가가 주목한다.
본격적으로 <재즈 라이프>의 세계로 입장해 보자. 책표지에는 음악가 니나 시몬, 찰리 헤이든, 알 디 메올라, 오스카 피터슨의 음반과 이미지가 보인다. 재즈초심자보다는 중급 이상의 재즈 광을 염두에 둔 의도가 보인다. 466페이지에 이르는 책의 무게가 심상치 않다. 재즈 월간지의 발행인과 편집자, 다수의 재즈 공연기획, 음반 프로듀서, 다큐멘터리 영화 <브라보! 재즈 라이프>의 제작자와 연출자라는 경력이 시선을 붙잡는다.
음악광인 필자의 입장에서는 그동안 출시한 장르나 연도별 재즈이론서가 아닌 형식이 마음에 든다. 이는 <재즈 라이프>의 저자가 원하는 주제별로 음악을 나열하는 자유로운 형식을 의미한다. 애드립이 필수인 재즈음악처럼 저자의 재즈 사랑을 마음껏 음미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책에서 자신이 소개하는 재즈음악을 독자가 유튜브로 감상할 수 있도록 배려한다.
하늘의 별과 같은 수많은 재즈음악가들. 그들 중에서 음반을 발표하고 명성을 이어가는 이들은 극소수에 가깝다. 재능, 인내, 창조라는 3가지 요소가 없었다면 그들의 음반이나 연주곡은 다시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소제목 또한 매력적이다. 232페이지에 등장하는 ‘재즈로 노래한 크리스마스’ 편에는 엘라 피츠제럴드, 데이브 브루벡, 알 디 메올라 등이 나온다.
2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재즈 라이프>의 후반부는 어떨까. 이번에는 22명에 달하는 재즈맨이 명함을 쓰윽 내민다. 당연히 호감이 가는 재즈맨도, 크게 관심이 가지 않는 재즈맨도 있다. 어쩌면 책을 읽은 후에 관심이 적었던 재즈맨의 음악에 귀를 기울이는 변화가 생길 수도 있다. 음악애호가의 프레임은 생각보다 단단하고 견고하다. 이를 깨뜨려주는 결과물이 바로 <재즈 라이프>다.
저자 남무성은 합정동에서 <가우쵸>라는 재즈바를 운영했다. 재작년 겨울에 아내와 함께 <가우쵸>에 방문했다. 그룹 스틸리 댄의 음반 명을 타이틀로 한 홍대의 재즈바. 우린 그곳에서 좋아하는 재즈곡을 신청하고 칠레산 레드와인을 마셨다. 12월임에도 불구하고 팬데믹 때문인지 재즈 바는 한산했다. <가우쵸>는 2023년 4월 아쉽게도 영업을 중단한다.
재즈 라이프에 등장하는 엄청난 재즈음반들. 굳이 재즈 광이 아닐지라도 시간을 들여 감상해볼 가치가 있는 음악들이다. 저자는 친절한 글과 그림으로 독자에게 영롱한 라라랜드를 선사한다. 좋은 책의 기준은 무엇일까. 이는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난 후에 독자만의 신세계가 펼쳐지는 책일 테다. 2022년에는 <재즈 라이프>에 필적하는 저자의 또 다른 신간을 기다려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