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러스의 추억
어느 더운 여름날이었다. 언제나처럼 회사에서 일을 하다가 또는 밖에서 잠시 외근을 하다가 짬짬이 온라인에서 오디오 관련 기사를 찾아보곤 했다. ‘믿을 수 없는 사운드’라던가 ‘영국 최고의 하이엔드’ 등 웃음이 날만큼 과장된 미사여구로 가득 메워진 잡지책을 보는 둥 마는 둥 하다가 구미를 당기는 제품 하나를 발견했다. 대체로 당시 잡지엔 후미에 오디오 또는 음악 애호가 탐방 기사가 실리곤 했는데 일반적인 잡지 기사와 조금 달랐던 것으로 기억한다. 잡지가 아니라 막 바람이 불기 시작했던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온 시스템 사진이었다.
고가의 하이엔드 오디오 장비가 아니라 상대적으로 초라한 시스템이었다. 스피커는 하베스 같은 영국 스피커였다. 그리고 한 편엔 놓은 오디오는 하프 사이즈였고 옹기종이 모아놓은 모습이 마치 도시락 같았다. 어릴 적 난로에 반 학생이들 바리바리 싸온 점심 도시락 말이다. 이 때문에 예전에 네임오디오 그리고 사이러스 같은 영국산 앰프들을 ‘도시락 앰프’라고 칭하곤 했다. 바로 그 중에서 사이러스가 얼굴을 내밀고 상하로 도열하고 있었다. 오디오 랙까지 사이러스 전용이서인지 고가의 하이엔드 오디오는 아니었지만 무척 멋진 자태를 뽐냈다.
음악에도 장르가 있듯 오디오에도 장르가 있다. 미국의 호방한 사운드를 대표하는 JBL 그리고 신흥 하이엔드 스피커 메이커들에 대출력의 A, AB 클래스 앰프들이 대표적이다. 배경이 암전된 듯한 제프 롤랜드, 열기 후꾼한 대출력의 크렐, 모든 과목이 90점 이상인 모범색 마크 레빈슨 등이다. 정밀 공학의 산실 독일과 스위스는 각 나라의 전자공학과 예술적 특질을 그대로 오디오에 반영했다. 하지만 실상 우리나라의 환경에 잘 맞는 오디오는 영국 브랜드가 많았다. 이제 B&W나 린, 메리디안은 먼 하이엔드로 가버렸고 하베스, 스펜더, 프로악, 탄노이가 그나마 일반인들의 손에 닿을 말듯하다.
한 때 내가 가지고 있던 사이러스 2 앰프를 동호회에서 알게 된 분한테 분양했던 기억도 새록새록 하다. 국내에서의 직장 생활을 마감하고 해외로 파견 근무를 나가게 된다는 소식을 들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사이러스 앰프를 자신에게 넘기라는 말과 함께 집 앞으로 찾아왔다. 해외에 나가서 적응하기까지 벌어질 고생길이 훤한데 그래도 음악은 놓고 싶지 않을 거라는 이야기. 그리고 그나마 작은 사이즈의 사이러스가 필요했고 나는 흔쾌히 사이러스 앰프를 그의 손에 들려주는 것으로 훈훈한 안녕을 고하며 마음 속으로 응원을 보냈다. 사이러스는 이렇게 나에게 추억으로 박제되었다.
사이러스의 현재 – i7XR
사이러스에 대한 기억은 잊혀졌다. 하지만 종종 생각나는 앰프가 또 사이러스다. 투박한 외모지만 단단하고 담백한 사운드에 쌉쌀한 중역대 질감이 그리워질 때가 있다. 가끔은 음향적으로 하이엔드 오디오보다 못해도 더 애정이 가고 차마 내보내기 힘든 기기가 있는 법이다. 이후 사이러스를 몇 번 시장에서 마주친 적은 있지만 일부러 과거의 즐겁기만 했던 사이러스와의 추억을 최신의 신제품으로 인해 변색되는 게 싫었다. 하지만 사이러스를 이번엔 리뷰하게 되면서 그 단단했던 빗장을 풀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 만난 사이러스는 최신형으로 현역이다. 기존에 내가 알고 있던 사이러스의 디자인은 그대로다. 하지만 단순히 검은색 마감이 아니라 이른바 팬텀 블랙 마감으로 좀 더 고급스러운 시각적 느낌과 질감을 뽐내고 있다. 전면엔 앙증맞은 볼륨을 중심으로 중앙에 예의 그 컴팩트 사이즈 디스플레이가 적당한 밝기로 사용자를 응시하고 있는 모습이다. 좌측으로는 스탠바이 버튼이 위치하며 터치 방식으로 구세대와 신세대 사이러스의 차이는 그냥 스쳐 지나가면 모르고 실제 사용해보면 알 수 있을만한, 세밀한 곳들에 포진하고 있었다. 한편 전면 하단엔 입력 선택 버튼 및 음 소거, 밸런스, 필터, 메뉴 선택 버튼들이 나란히 위치하고 있다.
후면으로 넘어가면 무척 빽빽하게 단자들이 도열해있다. 뒤로 깊이를 깊게 하되 폭은 좁게 설계하는 사이러스인만큼 예전부터 이런 후면 모습을 보여 왔다. 일단 네 개의 아날로그 입력을 지원하며 모두 RCA 입력만 지원한다. 한편 한 조의 포노 입력을 지원해 턴테이블에 MM 카트리지만 있으면 별도의 포노앰프 없이 바로 직결해 엘피를 감상할 수 있다. 이 외에 이 앰프는 다양한 디지털 입력을 지원한다. USB는 물론이며 동축 두 조, 그리고 광 입력도 두 조나 지원해 여러 디지털 기기들과 연동해 사용할 수 있다. 더불어 프리앰프 출력 기능이 있어 별도의 파워앰프와 운용 가능하며 헤드폰 출력단도 마련해놓고 있다. 스피커 출력은 여전히 BFA 단자를 사용해야하는 방식이다. 일반적인 바나나, 말굽 단자를 사용하지 못하는 것은 약간 아쉽다.
우선 이 모델은 인티앰프가 중심을 차지한다. 우선 프리앰프 섹션은 상위 독립형 프리앰프 Pre-XR의 설계를 이어받고 있어 인티앰프지만 꽤 공들인 흔적이 역력하다. 입력 선택에 릴레이를 사용하고 고성능 게인 스테이지를 갖추고 있으며 최대한 짧은 신호 경로를 만들어 순도를 최대한 높이고 있는 모습이다. 한편 커타란 토로이달 트랜스포머와 커패시터 등을 갖춘 리니어 전원부를 기반으로 채널당 약 52와트 출력을 내는 클래스 AB 증폭을 한다. 단, 사이러스의 전매특허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외부 전원부 적용은 불가능하다.
앰프 부문 외에 가장 눈여겨 볼만한 점은 다름 아닌 내장 DAC 부분이다. 이 부문을 사이러스에선 QXR이라고 칭하고 있는데 이번 i-7XR 인티앰프엔 2세대로 진화된 DAC를 내장시켰다. 기존 QXR의 모든 부분들을 개선시켰다고 하니 기대할 만하다. 참고로 USB 입력에서 최대 32bit/768kHz PCM 재생이 가능하며 DSD의 경우도 최대 DSD512까지 처리 가능하다. 한편 동축 입력에선 최대 192kHz까지 재생 가능하다. 이는 QXR이라는 DAC 회로가 ESS 테크놀로지의 ES9038Q2M 칩셋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또한 이 덕분에 총 일곱 개의 다야한 디지털 필터를 통해 다양한 음질을 즐길 수도 있다.
첨음평
이번 시청은 청담동 셰에라자드 제 2 청음실에서 진행했다. 사이러스 i7-XR이 디지털 입력단을 보유하고 있기에 내장 DAC의 성능도 동시에 알아보기 위해 앞단에 전용 트랜스포트를 연결했다. DAC를 내장하지 않은 전용 음원 네트워크 렌더러인 하이파이로즈 RS130을 매칭했다. 한편 스피커는 다른 여러 스피커가 있었지만 필자가 자택에서 사용 중인 케프 LS50 Meta를 사용해 좀 더 명확한 기준이 되어 주었다.
사이러스는 도톰한 중역에 약간 달콤한 고역을 가졌고 그 아래엔 쌉쌀하면서 리듬감 좋은 저역으로 매력적인 사운드를 들려주었다. 예를 들어 다프트 펑크의 ‘Within’ 같은 경우 피아노 소리부터 예전의 담백한 사이러스 사운드가 귀에 걸렸다. 하지만 과거보다 더 대역이 넓어졌고 특히 고역으로 상승하는 구간에서도 롤-오프 없이 시원하게 뻗어 올라가는 모습에서 사이러스의 진일보된 성능을 확인했다. 참고로 LS50 Meta가 평탄한 특성을 보이는 반면 약간 차가울 수 있는 부분들을 사이러스 간극을 메우며 담백하게 메워주는 상성을 보였다.
약 20여년도 더 된 과거 필자의 경험에서 사이러스는 다소 새로운 소리로 복원되고 있었다. 올라퍼 아르날즈의 ‘Reminiscence’를 들어보면 확실히 높아진 SN비에 더 치밀해진 해상도를 보여준다. 그러나 여전히 사이러스는 차갑지 않고 온건한 편에 속하면 중역대 밀도와 존득한 텐션이 매력적이다. 이 곡에서 가슴이 아릴 듯한 바이올린은 이러한 중고역 텍스쳐 및 동적 표현력이 버무려진 덕분이다. 피아노는 여느 앰프보다 좀 더 서정적인 울림을 피로하면서 가슴 벅차게 호소한다. 진공관 같은 여운은 아니지마 클래스 AB 치곤 감성에 호소하는 측면이 있다. 참고로 LS50 Meta 기준 –35dB 정도까지 볼륨을 올려 시청했을 때 적당했다.
이 앰프는 사이러스의 과거 개성을 고스란히 담아내면서 현대 앰프의 설계 기술의 진보도 어느 정도 담아냈다. 예전보다 더 조용해졌고 광대역에 더 넓은 다이내믹스를 보여준다. 한편 속도 측면에서도 기민해진 모습이다. 물론 과거에 하베스 같은 스피커와 함께 탄력적이며 리듬감 좋은 소리를 들려주었는데 스틸리 댄의 ‘Babylon sisters’를 들어보면 부드러운 촉감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텐션이 좋아 조였다 풀었다 에너지 조절이 돋보인다. 역동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차분하고 폭신한 표면 질감이 음악을 맛있게 만든다.
악기들이 유기적으로 어울리면서 균형과 조화를 동시에 이뤄낸다. 과거 네임 구형 앰프들이 전면으로 나서면서 쥐어짜는 듯한 소리를 들려주었다면 당시에도 사이러스는 날선 소리를 누그러뜨리고 대신 좀 더 자연스러운 풋 웍과 온건한 음색을 보여줬는데 지금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임윤찬과 광주 시향이 함께 한 베토벤 피아녹 협주곡 5번, 1악장을 들어보면 피아노의 어택은 부드러우면서 빠르고 명쾌하다. 무대는 그 넓이와 깊이보다는 포커싱이 돋보이며 케프 LS50 Meta를 제어하는 데는 크게 문제가 없어보였다.
총평
지난 사이러스 앰프 리뷰는 I-9XR이었고 당시 다시 깨어난 전설 사이러스의 여전한 음색에 더해 더욱 진보한 특성들에 놀라웠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이번엔 바로 아래 동생인 I-7XR을 들으면서 머릿속에 화석처럼 굳어 있던 사이러스를 다시 회생시켰다. 사이러스의 매력에 빠져드는 데는 채 1분도 걸리지 않았고 여러 스피커와 매칭해 들었던 음악들이 생각났다. 특히 북미에서 파란을 일으켰던 어셔 BE718을 사용할 당시 코드, 에어 어쿠스틱스 사이에서 작지만 밝게 빛나던 사이러스. 그 성능에 감탄한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사이러스 I-7XR은 그 자체로 ‘작지만 확실한 행복’ 같은 앰프다.
글 : 오디오 평론가 코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