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춘추전국
하이파이오디오에서 디지털 분야만큼 각축전이 벌어지는 분야도 없을 것이다. 기술적 발전이 가장 빠른 부문이고 최신 음악, 프로토콜, 포맷의 변화가 가장 빈번하게 이뤄지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최근 10년간 음악 듣는 방식에 있어 격변의 시기를 겪은 것도 디지털 음원 스트리밍이다. 각 분야의 전문 기업들은 스트리밍 포맷과 스트리밍 규약, 그리고 전송 방식 등을 고민해 지금까지 왔다. 와중에 AAC 등 손실 포맷을 거쳐 이젠 Flac 등 무손실 포맷이 그 영토를 확장해나가고 있고 일부 스트리밍 서비스는 24비트 고음질 음원을 온라인에서 실시간으로 스트리밍하면서 음악에 있어 누구나 평등한 접근이 허용되고 있다.
하드웨어 방면에서도 바쁘게 움직었다. 스트리밍 서비스와 호환성, 프로토콜 그리고 편의성과 음질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적응해야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연 음질은 얼마나 발전했을까? 와중에 MQA 같은 코덱이 거의 사라질 위기에 쳐했고 반대로 애트모스를 기반으로 하는 애플 공간 음향 포맷은 아직까진 승승장구 중이다. 하지만 이것도 그저 스쳐 지나가는 포맷일 가능성도 많다. 디지털은 그 발전 속도와 변화만큼이나 언제든 필요성이 없어지면 빠르게 폐기 처분되었던 역사가 있다. 그때마다 하드웨어 제조사들은 어느 장단에 춤을 추어야할지 애매해지곤 했다. 디지털 춘추전국 시대의 빛과 그림자다.
유러피언 하이엔드 디지털
돌이켜보면 디지털 하드웨어를 만드는 방식은 예전부터 다양했다. R2R 멀티 비트의 시대가 저물고 델타 시그마 모듈레이션이 세계를 지배했다. 마치 트랜지스터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진공관은 쓸모없는 것이 될 것처럼 보였다. 사람들은 CD가 출현하자 LP는 고물상에 주어버렸듯. 하지만 현재 모두 조금이나마 공생하면서 인간의 다양한 취향에 부응하면서 끝내 살아남았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CD도 음원 재생의 시대가 막을 올리자 거짓말처럼 수요가 급감해버렸다.
이런 트렌드에 가장 민감한 하드웨어 제조사들은 다양한 형태의 디지털 소스 기기를 출시하고 있다. 아마도 가장 민감하게 받아들여 진보시킨 메이커라고 하면 영국의 린, 메리디안 같은 영국 메이커다. 한편 미국을 대표했던 디지털 전문 메이커 와디아는 사라졌으며 한 때 기함급 CDP를 만들었던 크렐은 더 이상 이렇다 할 소스 기기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마크 레빈슨은 그 명패는 여전히 건재하나 예전 390sl이나 31.5, 30.6 같은 명기를 본 지 오래 되었다. 그나마 미국에선 MSB 같은 메이커가 역전해 승승장구 중이다. 누가 과연 MSB가 이런 메이커로 성장할 줄 상상이나 했던가.
한편 유럽의 하이엔드 소스 기기 메이커를 보면 확실히 미국 브랜드와는 차별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모습이다. 예를 들어 메트로놈 AQWO 같은 기기를 보면 예술적인 디자인에 진공관 옵션을 넣어 출시하는가 하면 여전히 SACDP 라인업을 유지하고 있다. 한편 토탈덱 같은 메이커나 쓰락스 같은 브랜드나 이태리 아쿠아 같은 브랜드의 제품들을 보면 R2R을 넘어 진공관을 투입하는 등 대량생산 브랜드들의 그것과 완전히 다른 길을 가고 있다. 아마도 그 목표는 가장 아날로그적인 것에 근접하려는 것으로 뿌리가 비슷하다.
MBL 1611F
여기서 최근 접한 MBL의 DAC 겸 네트워크 플레이어 1611F가 잔잔한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사실 MBL은 무지향, 정확히는 전지향이라고 할 수 있는 스피커로 유명하다. 하지만 한편으로 시선을 돌리면 스피커와 디자인, 사운드 성향이 유사한 앰프와 소스 기기들이 즐비하다. 동일한 음향적 철학 하에 개발한 기기들은 어찌나 비슷한지 놀라울 뿐이다. 마치 완성된 오디오를 다 허물고 다시 새로운 브랜드 기기로 새롭게 오디오를 꾸려도 같은 주인장의 손에서 튜닝된 오디오는 유사한 소리로 결론 지어지는 것과 같다.
MBL의 음향 언어 또한 컴포넌트에 따라 조금 다르지만 전체적으로 볼 엇비슷하다. 그리고 지난 C41에 이어 이번에 만난 1611F는 MBL 디지털 사운드에 대한 철학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우선 박스를 오픈하면서 포장의 퀄리티와 크기에 놀랐다. 확실히 최상급 레퍼런스 라인의 위용과 품격이 느껴지는 디자인을 보여준다. 사실 같은 레퍼런스 라인업에 위치한 1621A CD 드라이브와 6010D 프리앰프 그리고 9008A 모노블럭 파워앰프와 함께 매칭하는 것이 정석이다. 하지만 이번엔 1611F만 가지고 필자의 시스템에 셋업 했다.
전면부터 화려하기 짝이 없는 디자인이다. 전면 중앙엔 디스플레이 창이 곡선으로 만들어져 탑재되어 있고 아래도 ‘Digital Analog Wandler’라는 글자가 선명하다. 디스플레이 양 편으로는 입력 선택 버튼이 주욱 늘어서 있다. 별도의 리모컨을 지원하지만 다양한 기기를 연결해 사용하는 게 아니라면 자주 쓸 일은 없을 듯하다. 한편 상판은 금빛으로 반짝이는 MBL 로고가 선명하며 전체 섀시를 받치고 있는 기둥 또한 금빛으로 빛난다. 마치 성전을 연상시키는 구조물 디자인으로 우선 시각적으로 무척 고급스러우면서도 품격이 느껴진다.
후면으로 시선을 옮기면 다양한 입/출력 단자가 1611F의 구체적 기능을 알려준다. 디지털 입력단은 동축, 광, AES/EBU 그리고 USB 입력단이 마련되어 있으며 추가로 옵션 보드를 장착할 수도 있다. 한편 출력은 RCA 두 조 그리고 XLR은 한 조씩 지원하고 있다. 내부 DAC 칩셋은 ESS Sabre 계열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흥미로운 건 내부 디지털 부문의 특별한 설계인데 MBL 측에선 CD의 표준 규격 중 16비트의 다이내믹레인지 한계, 즉 96dB로서는 충분한 다이내믹 헤드룸을 갖추고 있지 못해 클리핑이 생길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True Peak’ 디지털 기술을 통해 3dB 정도를 추가로 확보해 음원 파일의 품질을 저하시키는 과부하를 없앴다고 한다.
한편 이번에 테스트한 1611F는 조금 특별하다. 기존에 국내 소개된 제품은 DAC로서만 기능하는 제품이었지만 이번엔 네트워크 옵션 보드가 장착된 버전이다. MBL은 기존의 DAC 등 디지털 제품들에 대해 이러한 옵션 보드 형태로 네트워크 스트리밍을 지원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유럽은 여전히 CD나 음원 파일 재생의 사용 빈도가 여전히 높아 보이지만 네트워크 스트리밍이라는 대세를 따르지 않을 순 없었을 것. 이 네트워크 옵션 보드는 ROON을 사용하는 사용자들을 위해 제작된 것으로 ROON 사용자는 별도의 네트워크 플레이어 없이 1611F 한 대로 소스 기기를 대체할 수 있다. 물론 PC나 전용 ROON 코어, 즉 서버를 필요로 한다.
청음
이번 테스트는 평소 사용하는 나의 레퍼런스 시스템에 연결해 진행했다. 우선 룬을 사용해 재생하기 위해 웨이버사 시스템즈의 Wocore에 1611F를 랜 케이블로 연결했다. 프리앰프는 클라세 델타 CP800MKII, 파워앰프는 패스랩스 XA60.5 모노블럭을 사용했다. 마지막으로 스피커는 락포트 테크놀로지스의 Atria를 활용했음을 밝힌다. 재생 또한 당연히 룬에서 1611F를 활성화시켜 세팅한 후 룬 리모트로 평소 자주 듣는 곡들을 시청했다.
클랑 – ‘Don’t cry’
참고로 평소엔 웨이버사 Wstreamer와 MSB Analog DAC를 사용하던 자리를 MBL 1611F가 대신한 상황이다. 음색이나 거의 모든 부분에서 상당히 대비되는 사운드를 들려주어 흥미로웠다. 일단 전체적으로 소리가 풍성해진 경향이 느껴진다. 예를 들어 클랑의 ‘Don’t cry’ 같은 단출한 구성의 보컬곡에서 무척 넓은 공간을 꽉 찬 음향으로 채운다. 소리 자체는 허물 없이 시원하게 뽑아져 나오지만 절대 감상자에게 공격적으로 다가와 피로감을 주는 소리가 아니다. 좀처럼 에지 있게 각을 세우지 않고 부드럽게 그러나 감정을 실어 전달해주는 느낌이 강하다.
리 오스카 – ‘San Francisco bay’
이전에 카덴자 시리즈로 출시된 C41을 리뷰하면서 느꼈던 MBL의 질감은 1611F에서도 일부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정보량이 훨씬 더 풍부하고 꽉 차 있는 밀도감을 실감할 수 있다. 한편 전체적으로 토널 밸런스가 어둡지 않고 상당히 밝고 화사한 스타일이다. 6010 프리앰프 같은 경우 상당히 녹진한 사운드를 들려주는데 1611F는 그에 비해 화려하고 색감이 총천연색으로 표현되는 것처럼 다채롭다. 이런 특성 덕분에 같은 음악이라도 좀 더 입체감 있고 지루하지 않게 재생해준다. 리 오스카의 하모니카가 겹겹이 공간을 애워싸며 너울거리는 표정이 무척 싱싱하다.
아트 페퍼 – ‘You’d Be So Nice To Come Home To’
확실히 냉정하고 깔끔하게 치고 빠지는 말끔함보다는 잔향을 좀 더 놔두고 자연스럽게 공간에 펼쳐내는 스타일이다. 마치 진공관을 투입한 것이 아닌가 할 정도로 이색적인 잔향 표현이 악기 소리 주변을 감돈다. 악기들의 두께가 MSB로 들을 때보다 약간 더 살집이 있다. 또한 표면의 물리적 질감은 말랑말랑해 딱딱하게 들리지 않으면서 좀 더 음악과 쉽게 친해지게 만든다. 아트 페퍼의 블로윙은 특히 그 호흡이 좀 더 크고 사실적으로 들린다. 뭔가 조탁한 인공적인 맛보다는 그냥 평소처럼 꾸밈없이 툭툭 드럼 페달을 밟고 심벌을 두르리는 느낌이다.
앨리스 사라 오트 /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 – ‘그리그 : 피아노 협주곡’
피아노가 공간을 가르며 휙 지나갔다. 어느 순간 지나간 자리엔 약간의 여운이 남는다. 시스템에 따라 편차가 있고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겠지만 이 정도의 여운은 누구나 선호할만하다. 깔끔하게 뒷맛을 지우면 기분은 상쾌하지만 음악이라는 컨텐츠는 그런 맛이 없으면 조금은 아쉽고 서운하다. 앨리스 사라 오트의 피아노가 나긋나긋하게 그러나 어둡거나 왜소하지 않게 또랑또랑 예쁘게 울린다. 전체적인 사운드 스테이징도 1611F의 중후장대한 몸체 디자인처럼 절대 작지 않다. 평온하고 고급스러운 윤기가 음악 전체에 흐른다. 마이크로 다이내믹스보단 매크로 다이내믹스가 뛰어난 편으로 대편성 녹음에서 특히 매력적인 재생음을 선보였다.
총평
MBL 하면 떠오르는 건 아마도 대부분 무지향(전지향) 스피커일 것이다. 공간의 중심에 널찍이 배치해놓으면 사방으로 소리를 펼쳐내면서 자극 없이 편안하면서도 입체적인 울림이 마치 콘서트 홀에 와 있는 듯한, 또 다른 의미의 음향적 쾌감을 준다. 마치 수많은 꽃봉오리에서 음악적 향기를 마구 뿜어내는 듯한 상상을 하게 된다. 이번 1611F에서도 그런 인상을 받았다. MBL이라는 브랜드가 추구하는 사운드 철학이 디지털 기기에서도 오롯이 드러나는 모습이다. 게다가 이젠 MBL 사운드를 룬으로 간편하게 즐길 수 있다는 것도 강점이다. 다만 다른 네트워크 프로토콜을 다양하게 지원하지 않고 전용 앱이 없다는 게 아쉽긴 하다. 요컨대 1611F를 들으면 누구나 무척 고급스럽고 음악적 여유가 넘치는 재생음에 매료될 것이다. MBL 디지털 사운드의 향취에 취해보길 권한다. 디지털 기기에서 아날로그 사운드를 만났다.
글 : 오디오 평론가 코난
제품 사양
D/A Converter Technology : Multi level Delta Sigma
Sample Rates : 96, 48, 44.1, 32 kHz
Resolution : 24 bit linear
Signal-to-noise ratio : 117 dB
Digital inputs : 1 x XLR (AES/EBU) + 1 x optional
1 x RCA (S/P DIF) + 1 x optional
1 x BNC (S/P DIF) optional
1 x Glas ST optional
1 x Toslink + 1 x optional
1 x USB Link
Digital outputs : 1 x RCA (S/P DIF)
Analog outputs : 2 x RCA, 1 x XLR
Weight : 23 kg
제조사 : MBL Akustikgeräte GmbH & Co. KG(독일)
공식 수입원 : ㈜ 샘에너지
공식 소비자가 : 54,200,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