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전문 분야도 마찬가지지만 오디오에서도 여러 해묵은 레토릭과 대결 구도가 많다. 예를 스피커라면 돔이냐 평판이냐 혹은 밀폐형이냐 저음 반사형이냐에 대해 어느 것이 더 좋은지 설전을 벌이기도 한다. 요즘 같아선 트위터 중 베릴륨이냐 다이아몬드냐에 대해 토론할 만도 하다. 디지털 부문으로 가면 델타 시그마 방식이 역시 지금까지 시장을 지배하게 된 이유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 앞에서 R2R의 소리를 역설하기도 한다. 단지 시장성을 이유로 권좌에서 내려온 R2R이 사실은 가장 뛰어난 DA 변조 방식이라는 것이다. 어느 한쪽에 경도된 사람들에게 상대방에 대한 포용력을 기대하기란 이미 글렀으나 세상은 그렇게 흑백논리로 돌아가지 않는다.
앰프 부문도 마찬가지로 여러 어젠다를 끌어올릴 수 있다. 비근한 예로 진공관 앰프가 최고며 솔리드스테이트는 가격 대비 성능만 좋지 배음 측면 때문에 몹쓸 앰프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한편 솔리드스테이트 앰프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진공관 앰프의 SN비 고조파 왜곡을 문제 삼기 좋을 것이다. 모두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솔리드스테이트가 여러 면에서 우수한 건 맞지만 진공관 앰프가 그 뒤쳐져 보이는 스펙으로도 훨씬 더 오랜 시간 인류와 함께 해오고 있기 때문이다.
대체로 하나의 신념을 가지고 한 쪽 편에 섰던 브랜드는 끝내 반대편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고집스럽게 초심을 유지한다. 리본 트위터의 성능을 역설하던 브랜드가 돔 트위터를 레퍼런스 반열에 올리지 않으며 델타 시그마 변조 방식을 최고로 쳤던 브랜드가 갑자기 R2R로 선회한다면 그들의 갑자기 신념은 부끄러운 것이 되고 헤레티지는 휴지조각이 될 것이며 추종자들은 흩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애초에 양 쪽의 주장을 모두 포용하고 그 때 그 때 활용할 줄 아는 브랜드도 있는 법이다.
T+A 같은 브랜드가 그렇다. 사실 이들이 지금 만들어내고 있는 앰프들은 일면 솔리드 스테이트 방식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그들은 알고 보면 진공관 앰프를 사랑한다. 예를 들어 25주년을 기념해 T+A는 V10이라는 진공관 인티앰프를 출시한 적이 있다. 출력관으로 EL509를 사용하고 드라이버, 위상 반전에 EC99, 입력 초단엔 6BM8, 프리앰프 섹션엔 ECC83을 사용한 멋진 디자인의 앰프였다. 내가 T+A라는 브랜드를 처음 알게 된 것도 이 모델이었다. 이것은 순간의 해프닝이 아니었다. 현재 국내 수입되고 있지 않은 모델 중 M40HV라는 모노블럭 앰프가 있는데 이것은 하이브리드 방식으로 무려 T+A 설립 40주년 기념이라는 의미심장한 가치를 가진다.
A 3000HV
T+A가 파워앰프 하나를 출시했다. 모델명은 A 3000HV로 표면적으로 그리고 설계에서 소자들까지 솔리드 스테이트 방식임을 천명하고 있다. 알루미늄 섀시에 묵직하고 탱크 같은 모습이지만 헤어라인 등 마감은 역시 독일산답게 매끄럽고 야무지다. 전원을 켜니 좌/우로 커다란 레벨미터가 시야를 가득 메운다. 그래, 이 맛이지. 앰프보다는 마치 측정기 같은 모습과 기계적 완성도가 남자들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사실 이런 케이스 품질이 그저 멋지게 보이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아니, 되레 음질적인 부분이 우선 고려된 설계로 볼 수 있다. 내부를 보면 전압, 전류 증폭 회로가 분리된 구획 안에 내장되어 있다. 한편 주 전원부와 출력단은 하단부에 위치시켜 차폐시켰다.
이러한 구획 분리는 단순히 설계 및 조립, 분해 등 편의성을 위한 것이 아니다. 제작비도 많이 들 뿐만 아니라 손도 많이 가게 되는 구조다. 하지만 이런 철저한 분리 설계는 차폐, 절연 등 전기적 간섭을 최소화하는 데 효과적이다. 상단과 하단 회로를 분리하기 위한 격벽 두께는 10mm 정도이며 전압 증폭 및 전류 증폭단 사이에 갈바닉 절연 기술도 투입하고 있다. 혹시라도 스피커의 드라이브 유닛이 작동하다가 발생하는 역기전력이 증폭단으로 인입되는 피드백이 있더라도 완전히 차단하게 된다.
내부 회로를 보면 좌/우 완전하 대칭 구조로 기판까지 모두 나누어져 있어 두 개의 앰프가 하나의 섀시에 담긴 모습을 볼 수 있다. 좌/우 시그널 관련 어떤 간섭도 일어나지 않게 하려는 의도다. 한편 전압 증폭 부문은 과대역의 차동 캐스코드 증폭 설계로 싱글 엔디드 클래스 A 스테이지로 연결된다. 전류 증폭 부문, 즉 출력단은 MOSFET 드라이버와 함께 바이폴라 출력 트랜지지스터가 핵심으로 T+A에선 이 조합으로 인해 엄청난 양의 전류 전달 뿐 아니라 매우 좋화로든 사운드를 얻을 수 있다고 한다. 한편 출력단 트랜지터의 작동에 대해 모니터링 시스템을 마련해 일정한 작동 온도를 유지하고 순간적이 부하 변동에 관계없이 왜곡 없는 증폭을 해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잠시 후면을 살펴보면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스피커 출력단으로 두 조를 지원하고 있다. A, B 두 조를 간편하게 선택해 즐길 수 있는데 하이엔드 파워앰프 중에선 흔치 않은 설계다. 특히 스피커 터미널의 경우 고순도 황동 소재에 로듐으로 도금한 단자를 사용하고 있다. 은만큼 전도도가 높고 백금만큼 내구성이 좋으며 금에 필적할 정도로 내부식성을 갖는 로듐은 탁워한 소재로서 케이블 단자 도금 소재로 많이 활용된다.
T+A A 3000HV 파워앰프는 8옴 기준 스테레오 모드에서 RMS 출력이 300와트며 4옴에선 500와트 출력을 갖는다. 한편 이 모델은 한 조를 더 추가해 모노 브리지 모드로 작동시킬 수 있게 설계되어 있다. 이 때 8옴 기준 RMS 출력은 380와트, 4옴에선 650와트 출력을 내준다. 한편 이 모델엔 별도의 외부 전원 장치를 연결해 그 성능을 업그레이드할 수 있다. PS 3000HV가 그 주인공으로 무려 1200VA 용량 전원부에 240000 μF수준의 대규모 정전용량을 갖는 전원부다. A 3000HV에 더 충분한 전원을 공급하며 더불어 내부에서 생성될 수 있는 아주 작은 간섭 현상으로부터 시그널을 보존할 수도 있는 일거양득의 효과를 볼 수도 있다.
청음
이번 테스트는 T+A A 3000HV의 성능을 최고조로 밀어붙이는 세팅을 취했다. T+A A3000HV 스테레오 파워앰프를 두 대 사용해 모노 브리지로 셋업하고 여기에 더해 각 파워앰프에 위에서 언급한 PS 3000HV 전원장치를 연결했다. 한편 프리앰프는 P 3000HV를 사용했고 소스 기기로는 MP 3100HV 플레이어를 사용했다. 마지막으로 스피커는 윌슨 베네시 Omnium을 사용해 막강한 진용을 꾸렸다. 참고로 테스트는 청담동 소리샵 제 1 시청실에서 진행했음을 밝힌다.
※ 사용 기기
파워앰프 : T+A A3000HV 모노 브리지(+PS3000HV)
프리앰프 : T+A P3000HV
소스 기기 : T+A MP3100HV 플레이어
스피커 : 윌슨 베네시 Omnium
구스타프 레온하르트 – 바흐 ‘Goldberg Variations’
가끔 정말 오디오적 쾌감이 극단에 달한 소릴 들으면 잠시 행복하다. 그러나 이내 피로가 몰려온다. 나이 탓인가? 생각도 해보지만 이번 Omnium은 쾌감도 높지만 피로하지 않고 오래 시청이 가능했다. 챔발로의 복잡한 배음과 잔향 표현이 귀를 거쳐 가슴으로 전해왔고 긴장을 늦추고 소파에 기대게 만들었다. 그러나 깃털 같은 작은 음표도 유령처럼 거기 보였다. 아주 작은 앙금도 놓치지 않으며 부드러우면서 동시에 섬세한 음결로 챔발로 사운드를 더욱 아름답고 정밀하게 증폭해주는 모습이다.
얀 가바렉 – ‘Officium’
파워앰프가 단순히 베이스 우퍼 드라이빙에만 그 임무가 한정된다고 착각하곤 한다. 그러나 파워앰프는 스피커라는 트랜스듀서가 전기 신호를 진동, 소리 에너지를 바꾸기 바로 전단계에서 최종 사운드메이킹 역할을 한다. 나는 되레 중고역에서 T+A의 정체를 추적해보곤 했다. 최근 200 시리즈도 좋지만 확실히 본래 이들의 정체성은 플래그십에 있다. 소스 기기로부터 받은 신호를 그 최대한의 정보량, 해상도로 증폭, 스피커에 흘려주는 모습. 고해상도면서 억지스러운 착색이 없고 종종 진공관 같은 배음 표현이 놀라울 때도 있다.
리 릿나워 – ‘Papa was a rolling stone’
다발의 베이스 우퍼를 설계해 양질의 저역을 구사하은 것은 단지 스피커만의 능력으로만 이뤄지지 않는다. 한치 오차 없이 어택 강도와 스피드 그 힘과 양의 완급조절이 긴밀하게 이뤄질 수 있는 파워앰프의 역할이 많은 영향권 아래에 있다. 이 대형 파워는 그 크기와 무게와 달리 재빠르게 우퍼를 움직이며 높은 트랜지언트 특성을 보여준다. 기존엔 버메스터 앰프가 Omnium 스피커를 강도 높은 힘으로 뚜렷한 골격을 보여주며 조련했다면 T+A와 조합에선 더 중립적이고 좀 더 그라이데이션이 돋보여 부드러우면서 강력한 힘이 공존하고 있다.
티에리 피셔/유타 심포니 – 말러 1번, 4악장
그럼에도 불구하고 높은 볼륨에서 소리가 으깨지거나 악기들끼리 어긋나고 엉키는 등 물리적인 모양이 원본 신호에서 조금도 파괴되지 않는다. 커다란 다이내믹스 표현 아래에서 모든 악기들이 질서정연하게 도열한다. 더 강력하게 치고 나왔으면 하는 부분도 없지 않지만 혹시나 이 진공관처럼 부드럽고 탄력 넘치는 표면 질감이 탁하고 거칠어질까 두렵다. 어마어마한 다이내믹스 표현에선 확실히 대형기와 매칭에서 드러나는데 롤러코스터같은 광폭한 느낌이 아니라 섬세하고 부드러운 질감 표현으로 쾌감은 있지만 피로하지 않고 아주 자연스러운 사운드 스펙트럼을 선보인다.
총평
한 줌도 안되는 음악과 오디오 경험에서 얻은 지식이 고착화되어 진공관이 아니면 안된다거나 R2R이 아니면 DAC도 아니라거나 하는 신념을 가진 사람들은 이런 브랜드 앞에서 무력해지기 일쑤다. 이렇게 넓은 포용력은 이론과 응용이라는 이름의 T+A 브랜드 네이밍으로부터 나온다. 철저히 검증된 이론 아래 이를 응용해 음향기기를 설계, 제작하는 집단이 T+A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T+A는 그들 주장대로 ‘우리는 사실 과학자들입니다’라는 말이 이를 모두 부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 분야에서 어느 경지에 오르면 아집과 편견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무한한 포용력이 자리하게 된다. T+A의 A 3000HV는 솔리드 스테이트와 진공관 사이 편견의 강을 훌쩍 뛰어넘은 경계에서 독야청청하고 있는 모습이다.
글 : 오디오 평론가 코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