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공예, 디자인 그리고 음악
북유럽의 폐쇄적인 지리적 악조건과 자원 부족 등은 또 다른 곳에서 반작용을 일으켰다. 지난한 일상과 추운 날씨가 그들에게 여유 시간의 사유와 함께 손재주를 발전시킬 수 있는 우연한 기회를 선사한 것이다. 게다가 자연 친화적이며, 거기에 장인 정신까지 더해지면서 가내 수공 명품들을 탄생시켰다. 알바 알토, 아르네 야콥센, 핀 율 등 북유럽의 유명 디자이너들이 탄생할 수 있었던 데엔 그들의 라이프스타일이 있었다. 이 모든 것이 풍요가 아닌 결핍이라는 딜레마에서 탄생되었다는 점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그리고 인구 6백만 정도의 작은 국가 덴마크도 그중 하나였다. 뱅앤올룹슨, 달리, 다인오디오를 비롯해 오토폰, 링돌프, 비파 등 수많은 유명 오디오 브랜드가 덴마크에서 태어났다. 뛰어난 디자이너의 산실이며, 수공예, 즉 제작 측면에서 비옥한 토양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부 영국, 미국 브랜드조차도 북유럽 국가들에서 인클로저를 제작해 들여오는 걸 보면 단순히 인건비나 기타 실리적 제반 요소 외에 그들의 ‘솜씨’를 따라잡기 힘들기 때문 아닐까? 여기 또 하나의 하이파이 오디오 브랜드가 있다. 바로 오디오벡터. 덴마크 출신으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것 아니냐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실제로 최근 10년간 오디오벡터의 성장률은 대단했으니까.
과거에 음악 관련 일을 했던 나는 덴마크 쪽 재즈 레이블과 연락해 재즈 음반을 수입, 라이선스 하기 위해 샘플을 요청했던 적이 있다. 이름도 모를 재즈 뮤지션들의 녹음을 듣고는 깜짝 놀랐다. 그 수준이 매우 높았는데, 재즈의 본산 미국의 그것과도 확연히 구분되는 창의성이 대단히 생소하면서도 빼어난 음악적 완성도를 지녔기 때문이다. 실제로 미드 센추리(mid-century), 미국의 재즈 뮤지션들이 유럽으로 떠나 음악적 낭인 생활을 한 것은 유명하다. 미국 내 인종 차별 및 재즈에 대한 사회적 인식 때문이다. 그리고 당시 덴마크 역시 재즈맨들이 선호했던 곳 중 하나이다.
몽마르트 재즈 하우스는 재즈의 성지였고, 그중엔 향후 오디오벡터를 설립하게 되는 올레 클리포드(Ole Klifoth)도 재즈 팬으로서 문지방이 닳도록 그곳을 들락거렸을 것이다. 음악에 대한 열정은 덴마크의 디자인, 수공예 기술, 그리고 창의적이며 진보적인 엔지니어링과 만났다. 한 집 건너 한 집이 특허 기술의 성지라는 농담이 있을 정도로 북유럽은 소규모 특허 집단이 수두룩하다. 국내처럼 일부 대기업이 나라 경제를 이끌어가지 않는다. 음악 애호가들 사이에 인기 있는 타이달은 스웨덴, 노르웨이 합작 회사로 출범했고, 스포티파이도 스웨덴 출신이다.
R8 Arrete와 함께 한 오후
최근 덴마크 출신 하이파이 스피커 브랜드 오디오벡터를 만났다. 오디오벡터에 대해선 수많은 리뷰와 청음 시간을 가졌지만 이번엔 그들의 명실상부한 최상위 모델이다. 기존에 R11이 있었으나 이젠 R8이 그 자리를 모두 아우르고 있는 형국이다. 참고로 오디오벡터 R 시리즈는 모델마다 총 세 개 버전이 존재한다. Signature, Avantgarde, 그리고 Arrete로, 가장 높은 등급이 Arrete다. 하지만 R8 같은 플래그십 모델은 오직 Arrete만 존재한다. 타협 없이 만들겠다는 의지의 반영이다.
우선 외관은 최근 본 어떤 하이엔드 스피커보다도 아름답다. 알루미늄, 목재 혹은 수지 계열을 사용하는 현대 하이엔드 스피커들 중 아마도 이 정도로 아름다운 나뭇결을 살려 완성도 높은 인클로저를 만들 수 있는 곳은 거의 없을 것 같다. 곧게 뻗은 전면 배플을 중심으로 뒤로 깊게 휘어져 돌아가는 곡선이 유려한 느낌을 자아낸다. 전면 회색 배플을 마련해 드라이브 유닛을 단단하게 장착한 것도 돋보인다.
한편 바닥 면을 지탱하는 베이스 플레이트 같은 경도 회색의 별도 플랫폼을 제작해 본체와 연결해놓고 있다. 디자인이 마치 하이힐을 신은 듯한 모양으로 우아한 자태를 만들어내고 있다. 상판을 위해서 보면 이른바 류트 형으로 인클로저로 인한 회절을 피하기 위한 디자인이다. 이 모든 디자인은 심미적 아름다움으로 귀결되지만, 사실 그 근간에 음향적인 배려가 숨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드라이브 유닛은 총 일곱 개를 사용하고 있다. 전면에선 네 개만 보이니 나머지 세 개를 어딘가에 숨겨놓았다는 의미다. 일단 전면 배플 맨 상단엔 AMT 평판 트위터가 자리한다. 오스카 헤일이 곤충의 날갯짓에서 영감을 얻어 개발한 고역 트랜스듀서 형식으로, 마치 아코디언처럼 접었다 폈다를 반복하면서 주파수를 발생시킨다. 평판이지만 비축에서도 dB 감쇄가 적은 편이며, 평평하게 배치된 진동판 덕분에 좌/우로 방사된 음파가 벽을 맞고 감상자에게 도달하는 간접음이 적은 편이다. 따라서 공간의 벽으로부터 반사, 왜곡된 소리가 적고, 직접음 위주의 순도 높은 사운드를 극대화하고 있다.
그 아래로는 총 세 개의 6.5인치 미드 베이스 우퍼가 함께 한다. 외부에서 볼 때 진동판 표면은 카본 직조 문양이 분명하지만 카본만 사용한 것은 절대 아니다. 카본에 아라미드 섬유, 그리고 여기에 목재 수지를 첨가해 샌드위치 방식으로 굉장히 단단하게 결합시킨 일종의 하이브리드 타입 진동판을 사용하고 있다. 내부 마그넷, 코일 보빈 등 좀 더 구체적인 유닛 구조를 발표하진 않고 있지만 상당히 공들여 만든 유닛으로 보인다.
흥미로운 건 전면 배플 외의 공간에 설치되어 있는 유닛들이다. 과연 어디에, 왜 숨겨놓았을까? 하나는 스피커의 후방에 있다. 미드 베이스 우퍼 중 최상단 정도 위치의 후면에 위치한 이 유닛은 중역을 재생하는 유닛이다. 그리고 구경은 4인치다. 폴리프로필렌 소재 멤브레인을 사용하고 있으며 후면 배플의 포트 안쪽에 위치해있다. 이런 유닛을 일부 브랜드에선 이른바 앰비언스 유닛이라고 한다. 때론 트위터, 때론 미드레인지를 부착해 음원에 담긴 현장의 어쿠스틱 룸 특성과 관련된 음향적 세부 정보를 재생해낸다. 이로써 음악에 담긴 공간 특유의 음악적 뉘앙스 표현을 극대화할 수 있다. 실제 녹음 시 앰비언스 마이크를 사용하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두 개의 유닛이다. 아마도 하이힐 구두를 신은 듯 발뒤꿈치를 살짝 들고 있는 디자인을 보았을 때 뭔가 짚이는 게 있었을 것이다. 이런 디자인으로 완성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본체 하방을 향해 두 개의 우퍼를 설치했고, 하방으로 일종의 포트, 벤트를 마련할 공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우퍼는 6인치와 8인치 두 개를 사용했는데, 이를 통해 일종의 아이소베릭 우퍼 시스템을 구현해놓고 있다. 대개 이런 아이소베릭 시스템 설계는 두 개의 동일한 우퍼를 기반으로 하지만, 각기 다른 구경을 쓴 이유에 대해 오디오벡터는 가속 개념을 이야기한다. 6인치 우퍼가 8인치 우퍼에 가속을 주어 능률, 성능을 극대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치 단체 빙상 스포츠 중 스피드 스케이팅에서 첫 번째 주자가 후발 주자를 밀어주는 걸 연상시킨다.
청음평
R8 Arrete는 덴마크의 대표 브랜드 오디오벡터가 자사의 모든 기술적 역량을 집약시켜 만들어낸 플래그십이다. 어떤 브랜드의 최상급이라는 것은 가격 고하를 막론하고 분명히 짚고 넘어갈만한 부분이 있기 마련이다. 이 스피커의 저역 하한은 22Hz, 고역은 52kHz에 이르는 광대역 스피커다. 이를 위해 AMT 평판을 사용하고 저역은 아이소베릭 등 난도 높은 설계를 적용한 것. 4웨이, 7스피커 타입이며, 후방, 하방 모두 포트로 열어놓아 자연스러운 후방 에너지 방사를 돕고 있는 모습이다.
크로스오버는 100Hz, 250Hz, 3kHz에서 끊고 있으며, 공칭 임피던스는 8Ω, 감도는 92.5dB다. 전반적으로 자연스럽게 공간에 유유히 퍼져나가는 소리를 아주 쉽게 낼 수 있도록 고안된 설계로 보인다. 한편 이번 테스트엔 소스 기기로 T+A의 MP3100 HV, 프리앰프에 부메스터 077, 파워앰프에 부메스터 218 모델을 사용했다. 참고로 파워앰프는 총 두 대를 동원해 모노 브리지 접속을 시도했다.
이전엔 R8 Arrete를 부메스터 218 스테레오 파워앰프 한 대로 테스트해 본 적이 있다. 물론 한 대로도 이 스피커를 드라이빙하는 데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두 대를 모노 브리지로 세팅하면 더욱 스케일 큰 사운드를 만들어낼 수 있다. 셸비 린의 ‘Just A Little Lovin’’ 같은 단출한 구성의 녹음에서도 풍성한 저역과 함께 웅장한 스테이징이 그려진다. 특히 저역 구간에서 옥타브 구분이 확실한데, 골격을 뚜렷하게 잡아내는 부메스터를 매칭해도 R8 Arrete는 너무 타이트하게 조여진 저역보단 풍성하고 유려하게 공간에 밀려드는 저역을 만들어낸다.
최신 하이엔드 스피커들은 정교하고 극도의 해상도를 보이는 만큼 예민하며, 따라서 과거의 녹음이나 녹음 퀄리티가 떨어지는 음악은 듣기 힘든 경우가 많다. 하지만 R8 Arrete는 높은 해상도와 사운드 스테이징 능력을 보여주면서도 음악의 녹음에 대해 관용적이다. 듀크 조던의 ‘No Problem’ 같은 곡을 들어보면 육중하면서도 리듬감 넘치는 섹션이 시청실을 가득 메우며 역동성 있게 추진한다. 너무 긴장된 모습이 아니라 적당히 넥타이를 푸르고 퇴근 후 여유 시간을 음악과 즐기는 듯한 기분을 만끽하게 된다. 어택, 디케이를 지나 서스테인까지 매우 자연스러운 흐름을 보인다.
R8 Arrete는 모드 유닛의 후방을 열어놓은 저음 반사형이지만, 포트가 후방에 네 개, 하방에 한 개로 많다. 더군다나 AMT 후방을 활짝 연 유닛 구조에 후방에 앰비언스 유닛을 추가해 소리를 최대한 사방으로 자연스럽게 흘려보내는 타입이다. 덕분에 공간의 어쿠스틱 특성이 청음실에 충실히 전해진다. 리 오스카의 ‘San Francisco Bay’를 들어보면 마치 해당 공간에 내가 서있는 듯 여러 백색 소음들마저 정겹게 느껴진다. 미세 약음들이 소름 돋을 만큼 생생하게 전해진다. 이것이 바로 실체감의 충실한 구현이라는 점에서 오디오벡터의 음악, 음향에 대한 철학이 감지된다.
조성진이 유럽 실내 관현악단과 함께 한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0번’은 아마도 최근 가장 많이 들은 음악 중 하나일 것이다. 이 정도 스피커라면 우리가 바라는 것이 있다. 넓은 공간에서 실 사이즈에 가까운 무대를 눈앞에 펼쳐주는 것이다. 실제로 이 스피커의 크기만큼 공간을 넓게 활용하면서 공간을 높은 음압으로 가득 메워준다. 원래 음원에 담긴 위치 정보를 칼처럼 재단하거나, 또는 본래 관현악의 번뜩이는 음색을 정제시켜 표현하는 것이 스튜디오 모니터라면, 이 스피커는 넓은 공간에 걸쳐 최대한 현장음 같은 푸근함과 생동감을 가감 없이 전해준다. 최근 미국 하이엔드 스피커들의 그것과는 확실히 사뭇 다른 차원의 사운드 스펙트럼을 구사하는 스피커임을 알 수 있다.
총평
최근 필자는 윌슨 오디오 사샤 스피커를 사용하면서 다양한 매칭을 시도해 보고 있다. 오디오에 있어 매칭은 절대 정해진 것이 없다. 게인, 임피던스 등 극히 일부의 제한된 가이드라인만 지킨다면 그 외 부분에선 자유롭다. 저음압 밀폐형 스피커를 5W 짜리 삼극관 싱글 앰프에 매칭해 음색 위주로 즐긴다 한들 그건 개인의 자유다. 같은 맥락에서 사샤를 845 싱글, A 클래스 진공관 앰프로 울리면서 나오는 그 싱싱한 날 것의 사운드는 기존에 사샤에 대해 가지고 있던 선입관을 일거에 소거해버렸다.
오디오벡터 R8 Arrete의 경우 굳이 이런 시도를 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싱싱하고 자연스러운 잔향과 풍부한 울림을 가진 스피커다. 게다가 높은 감도 덕분에 앰프 매칭에 있어 자유도가 높다. 한 브랜드의 플래그십에서 시도한 설계엔 수십 년 역사의 지혜가 담뿍 녹아나기 마련. 오디오벡터가 추구한 사운드의 비밀을 R8 Arrete에서 십분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글 : 오디오 평론가 코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