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로그가 그리울 때
세상이 모두 디지털로 바뀌었다지만 여전히 디지털이 대체하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음악 또한 디지털 스트리밍의 시대를 맞이했지만 음원도 음원 나름이다. 앨범도 누가 믹싱하고 마스터링 했느냐에 따라 수많은 버전이 존재한다. LP 쪽으로 살펴보면 버전마다 그 판본에 따른 음질은 물론 음악 자체가 다르게 들리는 경우가 태반이다. 최근 리빙 스테레오 LP를 종종 찾아듣고 있는데, 다시금 온라인에서 듣던 음악과 천지차이임을 절실히 깨닫고 있다. 샤를 뮌슈가 지휘한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 프리츠 라이너가 지휘한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 그리고 야사 하이페츠.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는 음악들이다. 그중 최근 다시 듣는 앙세르메의 로열 발레 갈라 퍼포먼스는 그것이 1950년대라곤 믿을 수 없는 연주와 음질로 벨 에포크 시대를 회고하게 만든다.
이런 LP를 듣고 있자면 나의 스피커인 윌슨오디오 Sasha나 락포트 Atria 같은 스피커보다는 좀 더 그윽한 질감을 가진 스피커가 생각난다. 둘 다 너무나 좋아하는 스피커지만 하나의 스피커가 모든 장르, 개인의 모든 취향을 반영하기란 그토록 어려운 것이다. 때론 BBC 계열인 하베스나 스펜더가 듣고 싶어지고, 최근엔 그라함 스피커가 다시 당긴다. 리바이벌 오디오나 다인오디오 계열 중 구경이 좀 큰 우퍼를 가진 스피커들도 생각난다. 때론 저 멀리 데카나 RCA 리빙 스테레오 LP를 듣던 당시 세상을 주름잡던, 지금은 빈티지라고 불리는 스피커를 들어보고 싶기도 하다.
아마도 그런 녹음을 LP로 듣는다면 또 하나 생각하는 브랜드가 있을 것이다. 바로 영국 하이파이 오디오의 역사를 함께 해온 브랜드 프로악(ProAc)이다. 스튜어트 타일러가 만든 하이파이 오디오의 세상은 프로악이라는 이름으로 요약된다. 그 역사도 깊어 현재까지 만들어온 모델을 열거하면 책 한 권은 거뜬히 채울 수 있을 것이다. 그중에서 핵심 라인업을 하나 고르라면 당연한 리스폰스(Response) 라인업이다. Response 4 같은 모델은 대륙을 건너 미국에서도 호평을 받았고, 프로악이라는 이름을 전 세계 하이엔드 브랜드의 반열에 올리게 만들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프로악 D48R
프로악의 대표작을 기억에서 꺼내보면 알단 1SC가 있다. 이 스피커는 첫눈에 반해 집에 들여놓고 한참을 사용했다. 투명한 우퍼에서 나오는 질감 좋은 중, 저역과 소프트 돔 트위터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치 방을 환하게 비추는 듯한 독특한 색상의 음이 아름다웠다. 이 외에 Response 2.5 같은 스피커는 그리 크지 않은 사이즈에 2웨이 플로어 스탠딩 스피커의 표준이었다. 함께 오디오 취미를 나누던 사람들 중 특히 현악, 피아노 등 클래식 음악 마니아들은 프로악과 다인오디오 파로 나뉠 정도였다.
최근 다시 만난 Response 시리즈는 D48R이다. 세월이 지나고 Response 모델도 많은 변화를 겪었다. 그러나 여전히 프로악은 프로악이다. 직각으로 꺾인 인클로저는 아름다운 원목의 마감을 그대로 가지고 왔다. 카본, 알루미늄 또는 합성수지 등 다양한 소재가 활용되고 있는 요즘 스피커들도 많지만, 여전히 목재만이 가진 고유의 울림과 아름다움이 있다. 그것을 잘 아는 브랜드 중 하나가 프로악이다. 하지만 세월의 변화에 전혀 적응하지 않는 고리타분한 브랜드도 아니다. 프로악은 나름 새로운 유닛과 설계 등, 오랜 시간 동안 조용히 스피커를 변화시키고 있었다.
일단 유닛을 살펴보면 고역을 재생하는 트위터는 리본 트위터다. 얇은 리본 박막을 움직여 소리를 내는 이 트위터는 반사음보다는 직접음 위주의 소리를 내주어 귀에 쏙쏙 박히는 지향성이 좋다. 한편 매우 빠른 반응 속도 덕분에 정위감 표현에서도 뛰어나고, 고역의 한계가 매우 높은 편이다. D48R에서 뒤에 이니셜 R이 의미하는 것도 바로 리본 트위터다. 한편 우퍼는 총 두 개를 사용해 중역과 저역을 책임지고 있다. 구경은 6-1/2인치로 특수 코팅된 진동판을 사용하고 있으며, 일종의 더스트 캡이 상당히 크게 중앙에 위치해있다.
D48R에는 이렇게 총 세 개의 유닛이 상하, 일직선으로 도열되어 있다. 그런데 그 순서가 미드 베이스 우퍼, 트위터, 그리고 다시 미드 베이스 우퍼 순서다. 요컨대 트위터를 중심으로 위, 아래 대칭으로 우퍼를 설치해놓은 것. 어디선가 많이 봐왔을 디자인인데 이를 전문 용어로 MTM이라고 한다. 말 그대로 미드, 트위터, 미드 순서로 배치한 것인데 조셉 다폴리토라는 박사가 고안한 스피커 드라이브 유닛 어레이 특허다. 이렇게 배치할 경우 정위감이 매우 우수하며 반듯한 중, 고역 균형감을 얻을 수 있다. 쉽게 말해 동축은 동축인데 가상 동축 방식이라고도 말하는 설계 방식이다.
한편 로딩 방식은 하단 포트 방식이다. 전면 또는 후면도 아닌 스피커 하방, 그러니까 바닥을 향에 포트를 설치해놓았다. 이를 위해 스피커를 받치는 베이스를 스피커와 거리를 두고 이격 시켜 포트로 빠져나오는 공기압을 좌/우로 자연스럽게 분사시키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최근 바워스앤윌킨스 등 여러 브랜드가 하방 포트 구조를 취하고 있는데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른 설계다. 참고로 인클로저 전면 배플이나 후방 포트에 비해 유닛, 특히 우퍼에서 방사되는 에너지와 간섭이 적고 후면 벽과의 거리에서 좀 더 자유로울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운영해 봤을 때, 벽과의 거리는 어느 정도 충분히 확보해 줘야 부밍 없이 좀 더 명료한 저역을 얻을 수 있었다.
D48R을 처음 마주하면 1미터 20cm로 훤칠하고 늘씬한 몸체에 아름다운 원목 마감이 누가 보더라도 고급스럽고 편안한 분위기를 풍긴다. 마치 고급 가구를 연상시키는데 무게는 무려 39kg으로 육중하다. 한편 후방에 총 두 조의 바인딩 포스트를 마련해 싱글와이어링 및 바이와이어링에도 대응하도록 했다. 전체 주파수 대역은 저역의 경우 20Hz로 인간의 가청 한계 최하단까지 내려간다고 한다. 더불어 고역은 리본 트위터의 위력으로 30kHz 초고역까지 재생 가능하다. 공침 임피던스는 4Ω, 감도는 90dB로 전체 제원만 볼 땐 그리 제어가 어렵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청음
이번 시청은 청담동에 위치한 소리샵의 제2 청음실에서 진행했다. 매칭의 경우 소스 기기는 사이러스 Stream-XR을 사용했으며, 앰프는 역시 사이러스의 Pre-XR, Power-XR 분리형을 사용했다. Stream-XR을 네트워크 플레이어 겸 DAC로 사용해 RCA 아날로그 에이블로 프리앰프에 연결했고, 프리앰프와 파워앰프 사이엔 XLR 케이블로 연결했다. 음원은 BluOS를 지원하는 Stream-XR 덕분에 바로 BluOS 리모트 앱에서 타이달로 진입해 선곡, 재생했다. 사이러스에서 BluOS를 지원하면서 여러모로 편리해진 모습이다.
사라 맥라클란 – ‘Angel’
전체 대역 밸런스는 매우 중립적인 편으로 특정 대역으로 치우치진 않는다. 특히 중, 고역대에서 감칠맛이 나며, 차갑진 않고 약간 달콤 쌉싸름한 토널 밸런스를 보여준다. 하지만 높은 저역부터는 다소 커다란 덩어리의 울림을 보여주어 포만감이 느껴진다. 클래스 D 증폭에 비하면 약간 느슨하게 이완된 소리지만, EL34 같은 진공관보다는 응집된 물리적 촉감을 보여준다. 과거의 거친 브리티시 사운드와 결이 전혀 달라 꽤 곱고 찰진 음색이 돋보인다.
도미니크 피스 아이메 – ‘Birds’
이 곡에서 프로악과 사이러스의 매칭에 대한 변곡점을 통과한다. 중, 고역이 만들어내는 사운드 스테이징은 좌우로 꽤 넓게 펼쳐지며 정확하고 흔들림 없는 핀 포인트 포커싱을 보여준다. 한편 낮은 중역부터 높은 고역이 양감이 크고, 그 이하로도 웅장한 저역을 만들어낸다. 정제되고 타이트한 저역보단 자연스럽게 공간을 넓게 적시는 저역이므로, 공간이나 세팅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 있을 것 같다.
척 맨지온 – ‘Feel So Good’
소리의 표면 질감은 무척 담백하고, 악기의 표면 질감 역시 가감 없이 펼쳐내는 스타일이다. 일부러 예쁘게 포장하지도 않으며, 반대로 너무 속을 훤히 발가벗기지도 않는다. 음원 내부의 디테일을 크게 희석시키거나 탈색시키지 않는 선에서 맛깔나게 요리해낸다. 기본적으로 탄성이 좋고 순발력도 높은 편이라 시종일관 리듬감 좋은 사운드를 즐길 수 있다. 항상 그렇지만 사이러스로 음악을 들으면 솔직, 담백하고 꾸밈이 없지만 당돌하고 날쌘 모습이 매력적이다.
랑랑 – ‘라흐마니노프 : 피아노 협주곡 2번, 1악장’
사이러스가 펼쳐내는 음악의 무대는 절대 기기의 하프사이즈 섀시처럼 작지 않다. 좌우 폭도 넓고, 특히 깊이가 깊은 편으로 음악이 나를 향해 다가오기보단 내가 스스로 음악 안으로 빨려 들게 만드는 스타일이다. 악기의 사이즈는 오밀조밀하게 맺히나, 대신 그 위치와 표정이 정밀하게 드러나므로 음악의 면모를 더 면밀히 조망하게 해준다. 특히 마이크로 다이내믹스가 빛나며, 중역의 충실도 덕분에 온도감도 있는 편. 음악에 더 집중하게 만드는 중독성이 매력적이다.
총평
사이러스가 브리티시 오디오 역사에 남긴 족적은 넓고 깊다. 한때는 린, 쿼드, 네임오디오 등과 함께 영국을 대표하는 오디오 컴포넌트 브랜드의 4대 천왕 즈음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지금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저마다 갈 길을 가고 있지만 사이러스는 여전히 독립 브랜드로서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어 반갑다. 특히 사이러스라면 하프 사이즈로 인해 작은방에서 북쉘프와 함께 옹골찬 사운드를 재생하기 좋은 앰프였다. 하지만 그것은 강점이면서 한계이기도 했다. 이번에 프로악 스피커와 함께 테스트하면서 과거의 그 한계를 꽤 많이 극복했다는 인상이다. 이젠 사이러스에 대한 선입견을 거두어도 될 때가 온 것 같다.
한편 응답(Response) 시리즈로 시대의 변화에 차근차근 “응답해온” 프로악의 D48R은 예나 지금이나 프로악 고유의 음악적 풍미로 가득했다. 따스한 거실 풍경과 TV, 약간 멋을 부린 장식장엔 조그만 앰프와 네트워크 플레이어, 그리고 그 옆으로 마치 유럽풍 가구처럼 서 있으면 딱 어울리는 스피커다. 게다가 리본 트위터를 탑재해 고역 지향성 및 주파주 한계를 한껏 끌어올린 D48R은 고해상도 시대에 대한 프로악의 응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