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요악과의 싸움
세상엔 수도 없이 많은 종류의 스피커가 있다. 어떤 건 주먹만 하고 어떤 건 집채만 하다. 단 몇 만 원대 스피커도 있지만 왜 그렇게 높은 가격이 매겨졌는지 이해하기 힘들 정도의 고가 스피커도 존재한다. 그리고 각 스피커 브랜드는 자신들이 만든 스피커가 세계 최고라고 주장한다. 일부 브랜드는 자신들의 스피커에 사용하는 유닛이 최고가 세라믹 아큐톤이다, 다이아몬드다 자랑을 한다. 크로스오버에 문도르프 등 고가의 소자를 사용했고 인클로저는 카본으로 도배했다고 홍보한다. 하지만 과연 좋은 소재를 사용한다고 해서 모두 좋은 소리를 낼까?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다들 홍보를 위해 자신들의 강점만 주장하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들이다.
그래서 그 수많은 브랜드와 스피커 사이에서 좋은 선택을 하기 위해 때론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하다. 그러나 시간은 없고 선택 장애의 병은 깊어져만 간다. 그저 좋은 소리에 멋진 디자인의 스피커를 고르고 싶다면 유명 브랜드의 잘 팔리는 제품, 트렌드를 쫓아간다고 해도 괜찮을지 모른다. 그러나 좀 더 혜안을 갖추면 단지 성능이 좋은 스피커가 아닌, 내가 좋아하는 소리를 내주는 스피커를 찾을 수 있다. 몇 가지 예시를 통해 간단히 생각해 보자.
요컨대 스피커는 필요악과의 싸움이다. 드라이브 유닛은 앞과 뒤로 소리를 내며, 이 소리가 합해지면 감쇄되어 정확한 소리를 낼 수 없다. 특히 저역은 거의 사라지다시피 한다. 그래서 인클로저라는 필요악이 생겨난다. 그러나 이 인클로저는 반대급부로 진동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진동을 저장한다. 이 때문에 역사적으로 여러 엔지니어는 나무의 두께, 내부 구조 등 다양한 연구를 거듭했다. 결론적으로 HDF, 알루미늄, 카본 등으로 굳어졌다. 소재의 발전에 많은 부분을 빚지고 있지만, 소재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유닛의 후방 에너지 소멸, 그리고 포트에 관련된 것이다. 이를 위해 다양한 인클로저 형상 및 내부 소재가 사용되고 있다.
또 하나는 크로스오버 설계에 있다. 전체 대역을 하나의 유닛이 모두 재생할 수 없으니 두 개 이상의 드라이브 유닛에 대역을 나누어 할당해야 하고, 이 할당의 의무를 크로스오버에 전가했다. 하지만 크로스오버는 앰프에서 출력되는 에너지를 상당 부분 약화시키면서 결과적으로 신호가 왜곡될 소지가 많다. 주파수 대역을 나누기 위해 필터를 사용하고 옥타브를 설정하는 등 실리를 얻기 위해 신호의 순도를 희생해야 한다. 세상에 공짜 밥은 없다. 물론 크로스오버를 없애고 하나의 유닛에서 모든 소리가 나오게 하면 되지 않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물론 그런 스피커도 있지만, 많은 부분 저역을 희생해야 한다.
결론은 필요악이라고 할 수 있는 인클로저, 그리고 크로스오버를 어떤 방식으로 설계, 제작하느냐가 결국 스피커 제작의 진검승부 지점이 된다. 단지 물성이 좋고 값비싼 유닛을 사용했다고 현혹되지 말자. 아큐톤으로 도배된 DIY 스피커가 염가 유닛을 사용한 스피커 전문 브랜드의 훨씬 더 저렴한 스피커보다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Resolution 3zero
영국의 윌슨베네시 스피커를 콕 집어서 이 스피커가 최고라고 이야기하려는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하지만 적어도 윌슨베네시가 걸어온 길, 그리고 그들의 포트폴리오를 시간 순으로 살펴보면 조금은 답이 보일지도 모른다. 사물이나 사람을 바라보는 앵글, 시선을 돌려보면 그 대상의 본질이 좀 더 명료하게 떠오르기도 하니까 말이다. 윌슨베네시는 이미 1990년대에 ACT 톤암을 내놓으면서 카본을 사용했다. 당시 목재로 스피커를 만들던 시대고 카본을 오디오에 도입한 곳은 필자가 알기로 단 한곳도 없었다. 카본의 엄청난 강도와 매우 가벼운 특성은 턴테이블 톤암이라는 기구물의 기능에 완벽히 부합하는 소재였다.
이후 윌슨베네시는 카본을 스피커 인클로저에 도입하는 등 그 가능성을 확장해나갔다. 단순히 가내수공업 형태로 청감이나 음악성 등에 의존한 감성적 이유에 그치지 않았던 것이다. 윌슨베네시는 수십 년 동안 영국 정부의 연구 프로젝트 펀딩을 받아 소재 연구에 참여했고, 그 결과를 하이엔드 오디오에 적극 도입했다. 이후 여러 스피커 브랜드들이 카본을 인클로저에 도입하는 장면을 볼 때면 윌슨베네시에 커다란 빚을 지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건 나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대덕 연구 단지 등 대규모 연구 단지 AMP, AMRC 연구소에서 에어버스, 롤스로이스 등 이름만 대면 알만한 기업들과 연구를 이어나갔으니까.
바로 그 연구 활동의 일환으로, 가장 최근인 2017년에 시작한 SUCCHY 프로젝트의 R&D 결과를 도입해 완성한 스피커 라인업이 바로 피보나치 시리즈다. 그리고 이번에 시청한 스피커는 그중 Resolution 3zero라는 모델이다. 일단 인클로저는 A.C.T.3zero 모노코크라는 생소한 이름의 소재를 사용했다. 카본과 블라스트 코어에서 다시 한번 진화를 거친 친환경 생체 복합 소재를 사용해 강도, 무게 등 모든 면에서 일신했다고 한다. 이 소재는 프랑스 브장송에 위치한 FEMTO Institute와 공동 연구를 통해 개발한 것으로, 바이오 레진 등을 사용해 고강도에 더해 더 높은 댐핑 능력을 추가했다.
한편 내부에서도 철저히 진동을 억제하기 위한 구조를 취하고 있다. 트위터와 미드레인지, 베이스 우퍼와 아이소배릭(Isobaric) 저역 시스템 등을 모두 격벽 처리해 별도의 챔버에 가두고 있는 구조다. 맨 하단의 아이소배릭 우퍼들만 인클로저 하단으로 후방 에너지를 자연스럽게 분출하도록 설계했고, 나머지 유닛은 모두 포트가 없이 밀폐형으로 설계한 모습이다. 극도로 조용한 인클로저를 만들고, 포트 잡음이 전면 유닛에 영향을 주지 않으며 내부에서 대부분 후면파를 소멸시키는 방식이다. 사실 이런 극단적인 하이브리드 설계는 극도로 높은 유닛 완성도를 요구한다. 내부 후면파와 공진 등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하기 때문이다.
Resolution 3zero가 이전 버전에서 가장 달라진 점이 바로 이 드라이브 유닛이다. 트위터와 미드, 베이스 우퍼를 보면 왜 피보나치 시리즈인지 웅변하고 있다. 바로 피보나치수열을 기하학적으로 풀어내면 생성되는 디자인이다. 바워스&윌킨스의 노틸러스 인클로저 옆면을 떠오르게 한다. 자연으로부터 얻은 황금 비율로서, 간단히 예를 들면 해바라기씨의 패턴을 떠올리면 이해가 쉽다. 이 외에 건축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되는 황금 비율, 피보나치수열 패턴 디자인을 통해 윌슨베네시는 음파의 가장 자연스러운 방사 패턴과 회절의 저감 효과를 얻어내고 있다.
이 스피커는 채널당 총 일곱 발의 유닛을 사용한다. 1인치 트위터, 7인치 미드레인지, 7인치 베이스 우퍼 각 한 발, 그리고 추가로 각각 두 개의 7인치 우퍼를 서로 마주 보게 덧댄 아이소배릭 우퍼를 두 조 사용하고 있는 모습이다. 하지만 크로스오버 디자인은 매우 간결하다. 트위터는 2차 오더에 5kHz에 하이패스 필터를 걸어 그 이상 대역만 소화하게 만들었으며, 로우 베이스는 1차, 아이소배릭은 모두 1차 오더에 500Hz에서 로우 패스 필터를 걸어놓고 있다. 흥미로운 건 중역대로, 거의 앰프와 직결되는 형태로 설계했다. 인간의 가청 영역 중 가장 민감한 1kHz~5kHz 대역을 최고의 순도로 표현해 내겠다는 설계 철학은 미드레인지 설계에서 화룡점정을 찍는다.
청음
이 스피커는 1미터 55cm 정도 높이의 훤칠한 키에 무려 98kg의 무게를 갖는 중, 대역 스피커다. 주파수 응답 특성은 +/-2dB라는 좁은 폭 안에서 저역은 30Hz, 고역은 30kHz에 이르는 광대역이다. 일반적인 기준인 +/-3dB 기준이라면 대역폭은 더 넓게 잡아도 될 듯하다. 한편 공칭 임피던스는 6Ω에 최저 3Ω까지 하강하며, 감도는 일반적인 기준(1m/2.83V) 90dB로서 스펙 기준으로는 그리 드라이빙이 어렵지 않은 스피커로 제작되었다. 참고로 이번 청음에서 앰프는 T+A의 P3100 HV 프리앰프 및 A3000 HV 파워앰프를 사용했고, PS3000 HV를 사용해 전원을 보강했다. 한편 디지털 소스 기기 또한 T+A의 MP3100 HV를 사용해 ROON으로 재생하면서 음질적인 특성을 살펴보았다.
도미니크 피스 아이메 – ‘Strange fruit’
커다란 키에 늘씬한 비율을 자랑하는 스피커는 전면 거리를 가까이 가져갈 경우 음상이 커져 빅마우스 현상이 생길 수 있음을 주의해야 한다. 그러나 이 스피커는 미드와 트위터를 MTM 방식으로 배치해 꽤 가까운 근거리에서도 음상이 흩어지지 않고 분명하다. 또한 대역 균형감이 매우 뛰어나 한쪽으로 치우치면서 피로감을 유발하지 않는다.
부슈 트리오 – ‘드보르작: ‘Dumky’ 5악장’
매우 잔잔한 약음까지 섬세하게 표현해 주어 숨어있는 소리가 없다. 한편 전면 및 좌우로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퍼져나간다. 지향성이 빼어나면서 동시에 직진성이 너무 높지도 않은 편. 분해력은 높지만 거칠거나 피로감은 낮은 편으로 가장 이상적인 소리의 지향성을 획득하고 있다. 음색 부분에서도 악기 고유의 음색을 가감 없이 정확한 배음 구조에서 빚어낸다. 물론 불필요한 추가 잔향은 없지만, 녹음에 포함된 잔향을 삭제해 건조하게 들리는 현상도 없다.
트리오 토이킷 – ‘Gadd A Tee?’
작은 유닛을 다발로 적용할 경우 큰 우퍼보단 풍부하고 커다란 임팩트를 표현하진 못하지만, 대신 빠른 속도감과 리듬감을 보인다. 아이소배릭 우퍼는 서로 기민한 반응 특성을 기반으로 마치 톱니바퀴처럼 정확히 맞물려 작동한다. 너무 억세고 쥐어짜는 소리를 내는 아이소배릭도 있지만 윌슨베네시는 얘외다. 깊고 진하며, 빠르면서도 동시에 자연스러운 저역을 얻어낸다. 아이소배릭에 한해서 이들보다 더 잘 만드는 브랜드는 찾기 어렵다.
테오도어 쿠렌치스/뮤지카에테르나 – ‘모차르트: Requiem’ 중 ’Kyrie’
피아니시모부터 포르티시모까지 매우 넓은 콘트라스트를 표현할 수 있는 스피커로서 대편성, 합창의 거대한 스케일도 무리가 없다. 음색 자체가 곱고, 분진이 느껴질 정도로 포근한 덕분에 웬만해선 공격적이거나 선을 넘어 피로도를 높이지 않는다. 최근 여러 콘서트홀에서 듣던 실연보다 되레 집중력은 장시간 유지시켜주는 면이 있을 정도다. 순하고 곱지만, 음장은 넓고 깊게 펼쳐내는 고순도 광대역 재생음의 표본적인 사운드라고 평가할 만하다.
총평
멀리서 보면 잔잔하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하이엔드 오디오 분야도 꾸준히 진화 중이다. 과거의 유물처럼 그 자리에 화석화되어 있었다면, 아마도 지금 고해상도 시대에 음악은 그 음향적 진실의 절반조차도 대중에게 전달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정축, 비축 주파수 응답 특성과 지향성 및 시간축 반응 특성, 그리고 이를 측정하기 위한 클리펠 NFS 측정도구, 인클로저 제작에 진동 가속계 및 FEA 소프트웨어 등 수많은 이론과 도구가 활용되고 있다. 그리고 현재 하이엔드 스피커 진화의 최선단에 윌슨베네시가 있다.
윌슨베네시는 현재 활동 중인 하이파이 스피커 브랜드 중 가장 진보적인 공학적 바탕과 화이트 페이퍼를 가진 브랜드가 아닌가 한다. 더불어 음악이 가진 가장 순수한 에너지를 희생시키지 않으려는 치열한 노력까지 더해지면서 그 완성도를 한껏 진보시켰다. 이번에 시청한 Resolution 3zero는 바로 그 윌슨베네시가 쏘아 올린 감성 공학의 진수다.
글 : 오디오 평론가 코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