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아날로그 관련 촬영이 많았다. 제품 설계와 기능을 분석하고 촬영하면서 음악을 듣고 음질적 특징과 운용 팁 등에 대해 고찰하며 또 몇 편의 영상이 결과물로 나온다. 이런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가끔 추진력이 떨어질 때가 있다. 리뷰어도 사람인지라 개인적으로 관심이 많이 가는 걸 넘어 가지고 싶다는 욕망이 이는 제품이 있는가하면 그냥 일로서 테스트만 하고 끝나는 경우도 더러 있다. 최근에 촬영한 제품 중에선 유독 정말 가지고 싶을 정도로 좋은 제품들이 몇 있었다.
그 중 하나는 크로노스 오디오의 퍼페추얼 턴테이블 및 디스커버리 포노앰프였다. 워낙 고가이긴 하지만 수억원대 하이엔드 턴테이블이라고 항상 누구에게나 좋은 건 절대 아니다. 하지만 크로노스 오디오는 항상 실망을 안겨주지 않는다. 게다가 블루멘호퍼와 에어타이트 앰프의 조화는 아날로그 사운드란 무엇인지 웅변해주었다. 엄청난 정확도와 정밀한 회전, 절제된 진동, 극대화된 다이내믹스 등 최신 하이엔드 턴테이블이 진공관 앰프와 고감도 혼 스피커와 만났을 때 폭포수처럼 터져 나오는 음압은 최신 주류 하이엔드 사운드에선 얻기 힘든 것이다.
또 하나는 도흐만 오디오의 헬릭스 원 MK3 턴테이블이다. 턴테이블을 오랜 시간 동안 운용해오며 최신 하이엔드 아날로그 시스템에 대해 관심을 가져온 사람이라면 알만한 천재 에니지어 마크 도흐만의 신작이다. 컨티늄 캘리번 턴테이블과 코브라처럼 생긴 코브라 톤암을 보았을 때 사람들은 모두 경악했었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 그의 최신작은 더욱 정교해지고 더욱 강력한 카리스마를 완성했다. 크로노스 쪽과 조금 다른 시스템 접근으로 솔리드스테이트 다즐 앰프에 고해상도, 광대역, 초스피드로 대변되는 카르마 EV 4D 스피커로 듣고 녹음했다.
여기서 흥미로운 건 이 시스템에서 내가 가지고 갔던 장사익의 ‘허허바다’를 재생했을 때 나오는 소리였다. 유튜브에선 절반의 절반도 표현이 안 되어 다시 한 번 놀라기도 했는데 현장에서 듣는 이 엘피의 소리는 가뿐히 디지털의 그것을 뛰어넘었다. 종종 디지털 마스터로 제작한 엘피의 경우 되레 디지털 음원보다 청감상 더 나은 경우를 보긴 하지만 이번 ‘허허바다’와 ‘꽃구경’의 경우 엘피로 듣다가 음원으로 들으면 당시 마스터링이 잘못된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다. 실제로 모두 엘피 발매를 위해 다시 리마스터링했다고 한다.
지난 주, 영국 베르테르 어쿠스틱스의 대표 투라지 모가담과 인터뷰 도중 그도 비슷한 생각을 이야기했다. 아무리 디지털 녹음이라도 마스터링, 커팅 엔지니어의 역량, 그리고 프레싱에 따라 되레 엘피에서 더 나은 사운드를 들을 수도 있다는 의견이다. 다이내믹레인지는 엘피가 현저히 떨어지지만 주파수 특성, 음색적인 부분에선 더 앞설 수 있다는 데 일부 동의한다.
오래 가요 엘피 리이슈 중 가장 큰 이슈 중 하나라면 장사익의 전작 엘피 발매다. 이미 ‘기침’과 ‘자화상’이 발매되었고 최근엔 ‘허허바다’와 ‘꽃구경’이 출시 대기 중이다. 도흐만 턴테이블 리뷰 촬영시 이 엘피를 1억원대 턴테이블과 4500파운드짜리 하야부사 MC 카트리지로 들어본 건 순전히 테스트 엘피를 테스트하기 위해서였다. 종종 내게 음질 테스트를 의뢰하는 음반사들이 있는데 이번에도 장사익 엘피들을 보내왔다. 물론 나의 시스템에서도 들어보았지만 초하이엔드 턴테이블에서 들어보는 호사는 또 남달랐다. 아래는 장사익의 디스코그래피다.
1집 하늘 가는 길(1995년)
2집 기침(1999년)
3집 허허바다(2000년)
4집 꿈꾸는 세상(2003년)
5집 사람이 그리워서(2006년)
6집 꽃구경(2008년)
공연실황 라이브 앨범 ‘따뜻한 봄날 꽃구경’(2009년)
7집 역(2012년)
8집 꽃인 듯 눈물인 듯(2014년)
9집 자화상(2018년)
10집 사람이 사람을 만나(2024년)
이번에 발매 예전인 3집, 6집에 더해 기존에 출시된 2집, 9집까지 합하면 현재까지 네 장의 엘피 발매가 완성되었다. 그리고 현재 대망의 1집 ‘하늘 가는 길’의 엘피 출시를 준비 중이라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하지만 상당히 난항이 있다는 전언. 알다시피 1집은 피아니스트 임동창의 매우 강력한 피아노 타건이 다수 있어 다이내믹스 잡기가 꽤 힘들다고 한다. 이 때문에 하프 스피드 마스터링을 시도 중이라고 한다. 기존에 출시되었던 디지털 음원은 물론 열악한 음질로 발매된 엘피의 음질을 생각하면 가장 기대되는 엘피이기도 해서 기대가 크다.
수년간 엘피 붐이 지속되면서 국내/외로 정말 많은 앨범들이 엘피로 출시되었고 지금도 출시되고 있다. 하지만 일부 레이블의 상혼 가득한 엘피들, 그리고 한정반 아닌 한정반 난립으로 이 시장도 조금씩 쇠락하고 있는 분위기가 감지된다. 이 와중에 국내 가요계에 한 획을 그은 장사익의 앨범들을 하나씩 하나씩 엘피로 완성해나가는 건 여러모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번 ‘허허바다’와 ‘꽃구경’은 그 완생으로 가는 하이라이트 중 한 장면이다. 지난 3, 6집에 이어 이번도 다시 제작은 어려울 듯 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