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들어낸 가치
중, 고등학교 때였다. 하루 일과가 끝나면 저녁을 빠르게 해치우고 서점으로 향했다. 그 날 서점에 도착한 음악 잡지들을 보기 위해서였다. 때론 옆에 있었던 오디오 잡지도 구경했지만 언감생심 값비싼 오디오는 그저 눈요기용일 뿐이었다. 하지만 음악 잡지에 실려 있던 앨범 리뷰 혹은 내가 좋아하는 뮤지션들의 최근 기사를 보고 나면 신보를 듣고 싶어 미칠 지경이 되었다. 때론 곡들의 가사 혹은 인터뷰 기사까지 꼼꼼히 체크해보곤 했다.
그리고는 바로 건너편에 있었단 레코드숍으로 후다닥 발걸음을 옮겼다. 방금 본 기사의 주인공이 발매한 신보 혹은 구보를 구입하기 위해서다. 때론 듣고 싶은 앨범이 너무 많이 밀려버리는 바람에 몇 장을 한꺼번에 구입하곤 했다. 일주일 단위로 약간씩 용돈을 받아 쓰곤 했는데 어떤 땐 거의 절반 이상을 음반 구입에 써버리고 만 경우도 있었다. 식사를 라면으로 때우고 친구들에게 학교 식당 식권을 꿔서 근근히 버티곤 했다.
당시 그 음반을 구입하는 순간 그 음반의 가치는 바로 내 한 달 용돈의 절반 정도 가치를 갖게 된다. 지금 생각하면 내 한 달 수입의 절반 정도이니 무시할 수준이 아니게 된다. 최근 한달에 만원이 조금 넘는 돈을 내고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를 이용한다. 전 세계에 수많은 뮤지션이 수십년간 일생을 바쳐 만든 음악을 단 돈 1~2만원에 즐긴다. 어느 순간 그 음악들은 그 정도 가치로밖에 다가오지 않았다. 그래서 과거에 처분했던 음반들을 다시 구입하곤 한다. 지구 반바퀴를 돌아와 마침내 나의 방에 도착한 음반을 듣다보면 마치 유년 시절 그 때처럼 그 음악의 가치가 너무나 소중하다. 가치는 저마다의 노력에 따라 달라지는 것 아닐까?
유독 엘피가 좋다
그 중 유독 엘피가 좋은데 그에 대해선 여러 이유들이 있다. 엘피를 구입하면 먼저 라벨을 본다. 재즈라면 블루노트부터 벌브, 임펄스를 비롯해 수많은 레이블의 군웅할거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연도에 따라 초반, 재반 등 저마다 라벨에 그 역사가 오롯이 새겨져 있다. 미리 이런 레이블에 대한 시대별 라벨 디자인 변경을 알고 있지 않다면 초반인지 재반인지, 그리고 그에 따라 가격의 합리적 마지노선을 알 수 가 없고 구입 판단에 애를 먹게 된다. 어쩔 수 없이 해외 사이트를 보면서 공부하게 될 수 밖에 없다.
여기에 이베이나 디스콕스 등 해외 사이트들에 가입해야하고 엘피를 구입해 배대지로 보내야한다. 배송대행 업체의 배대지 주소를 어디를 선택할지, 미국이면 미국내 세금, 송료가 어느 정도 될지 어느정도는 예측해야한다. 그리고 약 일주일 동안 구입해 배대지로 일제히 배송시킨다. 이후 모든 엘피가 도착하면 국내 배송을 의뢰한다. 모든 것이 끝난 후 한동안 잊고 있다가 어느날 갑자기 현관 앞에 커다란 박스가 하나 놓여 있다. 마치 선물을 받은 듯 마냥 즐겁다. 여러 경로를 거쳐 시간과 돈을 충분히 들인 엘피의 가치는 무엇과도 바꾸기 힘들만큼 값질 수 밖에 없다.
골드노트 PH-5 포노
골드노트 포노앰프를 처음 만난 건 PH-10이었다. 딱 적당한 하프 사이즈에 전면엔 여느 포노앰프에선 보기 힘든 2.8인치 디스플레이 창을 만들어놓았다. 흥미로운 건 이 디스플레이 창을 통해 MM, MC 혹은 게인 및 로딩 임피던스 등 여러 기능을 세팅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전면 우측의 노브는 볼륨 노브가 아니라 전원 ON/OFF 및 세팅용 버튼 혹은 다이얼로 기능했다. 이리 저리 카트리지를 매칭해보면서 가장 최적의 세팅을 찾는 과정은 귀찮으면서도 가장 즐거운 일 중 하나다. 이런 모든 노력과 번잡스러움이 결국 이 기기의, 엘피 사운드의 가치를 계속해서 높이기 때문이다.
PH-10에 이어 최근 나의 손에 들어온 PH-5는 마치 PH-10의 동생 같았다. 하지만 크기가 완전히 동일해 겉으로 보면 같은 모델로 오인할 수 있을 정도다. 하지만 내부 설계나 전원부 등에서 체급을 조금 낮춘 모델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하지만 PH-10을 구입하기엔 예산이 약간 모자란 경우 거의 동일한 섀시에 하위 모델을 사용할 수 있다는 건 행운일 수도 있다. 일단 입력은 RCA 입력 하나만 지원하며 출력은 RCA 및 XLR 모두 지원한다. PH-10이 두 개의 RCA 입력을 지원하는 것과 달리 하나만 지원하는 것은 약간 아쉬울 수 있다.
그 다음으로 MM 게인은 PH-10이 기본 45dB인 것과 달리 40dB로 낮다. 게다가 게인 같은 경우 디폴트 값 0dB 외에 +3dB 및 ±6dB를 지원한다. 한편 MC 게인의 경우 기본값이 역시 PH-10에서 5dB 낮아진 60dB로 설계되어 있다. 그리고 게인 조정은 MM과 마찬가지로 디폴트 값 0dB 외에 +3dB 및 ±6dB를 지원한다. 결론적으로 MM 게인은 최소 34dB에서 최대 46dB, MC 게인은 최소 54dB에서 최대 66dB까지 지원한다. 매우 낮은 저출력 카트리지가 아니라면 대체로 게인이 모자라진 않을 듯하다.
한편 로딩 임피던스 조정값은 PH-10과 정확히 동일하다. 10Ω, 22Ω, 47Ω, 100Ω, 220Ω, 470Ω, 1000Ω, 22KΩ, 47KΩ 등 총 아홉 개 값 중 선택해 세팅할 수 있다. MM 카트리지나 고출력 MC 카트리지는 대체로 47K옴에 세팅하면 되고 저출력 MC 카트리지의 경우 카트리지 제조사에서 추천하는 로딩 임피던스 값을 찾아 세팅하면 그만이다. 무려 10옴이라는 매우 낮은 임피던스 값까지 지원하는 건 이 포노앰프의 강점 중 하나다.
모노 엘피의 신선한 맛
골드노트 포노앰프가 해외에서 주목받은 이유 중 하나는 다양한 EQ 커브를 지원하기 때문이다. 과거엔 스위스 FM 어쿠스틱스의 수천만원대 포노앰프에서나 지원하던 걸 이젠 수십 분의 1 가격대 제품에서 만나보게 된 것. 사실 이런 다양한 EQ 커브가 필요한 이유는 RIAA EQ 커브로 제작되지 않은 모노 시절 엘피들이 대다수다. 데카 FFRR, 컬럼비아 Six Eye 등 이런 말을 들어보았다면 바로 그런 엘피를 본래 마스터의 주파수 특성 그대로, 제대로 듣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게 해당 레이블의 EQ 커브 세팅 기능이다.
골드노트 PH-5는 PH-10과 기능적인 부분들을 거의 모두 공유하고 있다. RIAA EQ 외에 모노 엘피를 제대로 듣기 위한 데카, 컬럼비아 커브 EQ를 내장해 선택 가능하다. 게다가 Enhanced 모드를 별도로 마련해 20kHz 이상 초고역, 즉 배음 영역에서 선형성을 대폭 증가시키는 자체 커브 모드를 내장했다. 오래된 모노 엘피 음질이 너무 별로라며 레코드 랙 깊숙이 처박아 놓은 사람이라도 종종 모노 엘피를 해당 레이블의 전용 커브 EQ를 통해 제대로 즐길 수 있게 될 것이다.
청음
이번 테스트는 최근 새롭게 꾸린 아날로그 시스템에서 진행했다. 턴테이블은 어쿠스틱 시그니처 Maximus NEO, 카트리지는 역시 어쿠스틱 시그니처의 MCX1 저출력(0.55mV) 카트리지를 사용했으며 모두 RCA 커넥터를 사용했다. 한편 프리앰프는 클라세 CP-800MKII, 파워는 패스랩스 XA61.5, 그리고 스피커는 락포트 테크놀로지스의 Atria를 활용했음을 밝힌다. 골드노트 포노앰프는 전면 디스플레이 창이 PH-10과 달리 터치 스크린으로 무척 편리하게 세팅이 가능했다. 한편 전용 전원 PSU-5도 함께 연결해 성능을 극대화시켰다.
제너퍼 원스 – Rock you gently
골드노트의 사운드는 처음 들어도 누구나 편안한 감상을 이끌어낸다. 전체적인 대역 균형감이 약간 낮은 편이어서 중, 저역 쪽으로 차분하게 깔리는 더블 베이스나 드럼 같은 악기들이 선명하다. 반대로 중, 고역은 자극적인 맛이 전혀 없이 곱고 약간 질펀한 사운드 질감을 들려준다. 어떤 면에선 트랜지스터 앰프를 듣다가 진공관 앰프로 넘어갔을 때의 그 곱고 차분하게 깔리는 잔향을 연상시키는데 순수 진공관 앰프보단 좀 더 에지가 선명하고 반듯하며 담백한 사운드 처리를 선보인다.
스틸리 댄 – Aja
리듬을 밟아나가는 특성은 영락없는 솔리드 스테이트 앰프의 그것을 숨길 수 없다. 골격도 분명한 편이며 어택에서 디테이, 서스테인까지 서슴없이 진행되어 개운하다. 하지만 역시 골드노트 특유의 잔향이 남는다. 특히 중역대를 오가는 베이스 기타나 보컬에선 진한 느낌이 배어나온다. 최근 이 가격대 포노앰프 혹은 더 값비싼 하이엔드 포노앰프들이 약간 딱딱하고 냉정해 되레 디지털보다 더 디지털 같은 소리를 내는 경향도 있은데 골드노트는 되레 약간 회고적인 느낌이 있다. 어떤 면에선 약간 올닉 진공관 포노앰프의 느낌도 있다.
소니 클락 – Cool struttin’
대역폭 자체는 충분히 넓다. 뿐만 아니라 옵션 전원부의 적용 전/후 차이는 꽤 높은 편이다. 한편 최신 솔리드스테이트 포노앰프지만 필자가 좋아하는 과거의 명연들에서 가장 마음에 드든 소리를 내준다. 예를 들어 1950~70년대 풀 아날로그 체인을 통해 녹음된 음악들이 그렇다. 약간 눅눅하면서도 소리에 온기가 적절히 스며있고 중역대 끈적한 사운드는 당시 녹음에 최적이다. 심벌 사운드는 극도의 세밀함보단 약간 뭉개면서 분위를 돋우는데 1950년대 담배 연기 자욱한 블루노트 클럽의 한가운데로 청자를 이끈다.
이슈트반 케르케스/빈 필- 드보르작 교향곡 9번, 4악장
1961년 녹음으로 초창기 스테레오 녹음이지만 정 중앙을 중심으로 나를 둘러싼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의 지휘봉에 따라 강력한 사운드로 에워싼다. 전/후로 질서정연하게 늘어선 오케스트라의 각 악기들은 서슬 퍼런 결기가 느껴지며 그 음색이 고색창연하다. 바로 이런 당시 녹음의 다소 거칠면서 대신 윤색되지 않은 생생함이 골드노트를 통해 더욱 크게 증폭된다. 디지털 음원으로 듣던 약간 먹먹하고 얇은 회고적 사운드가 아니다. 되레 더 두텁고 핵이 뚜렷하며 현대의 어떤 녹음보다 더 싱싱한 실체감이 서려 있다.
총평
골드노트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금권이나 혹은 글자 그대로 웬 황금 공책(?)이라고 웃고 넘어갔던 기억이 있다. 지금 생각해보다 골드노트는 블루노트의 변형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제작자는 확실히 최신 디지털 녹음 시절이 아닌 아날로그 황금기 미드 센츄리의 고색 창연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골드노트라고 이름 지었는지 모른다.
리뷰를 마치고 집에 와서 린 LP12로 음악을 듣고 있다. 최근 구입한 아스트러드 질베르토의 버브 레이블 당시 녹음이나 캐피톨, 컬럼비아 등 1960~1970년대 녹음들이 대다수다.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는 아날로그 황금기 시절 녹음들이 대다수다. 그런데 시청실에서 끝까지 붙들고 듣던 골드노트 포노앰프의 소리가 그립다. 그 차분한 가운데 힘 있고 핵이 뚜렷하면서도 끈끈한 중역이 그립다. 오래된 엘피를 들을 때면 아마도 계속 골드노트가 떠오를 듯하다. 필자처럼 아날로그의 황금기 시절 발매된 레코드를 주로 듣는 게 일상이라면 강력하게 추천하고 싶다. 골드노트 PH-5는 낡고 오래되었지만 그 황금 같은 시절의 레코드에 담긴 음악을 되살려줄 것이다.
글 : 오디오 평론가 코난
기술 사양
3 rail audio grade power supply
3 ultra-low noise voltage regulator
MAXIMUM VARIATION OF OUTPUT VOLTAGE : 0,05 %
LINE NOISE REJECTION : >80dB
COMMON MODE NOISE REJECTION >80dB
FULL POWER RESPONSE TIME <2,5µsec
전원
POWER SUPPLY : 100-120V / 220-240V with auto sense, 50/60Hz
POWER CONSUMPTION : 25W
DYNAMIC POWER >50W
STAND BY POWER <1W
FUSE : 0,5A T
크기
DIMENSIONS : 200mm W | 80mm H | 260mm D
무게
WEIGHT : Kg. 2 – net, Kg. 3 – boxed
제조사 : Gold Note (Italy)
공식 수입원 : ㈜ 웅진음향
공식 소비자 가격 : 2,350,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