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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아날로그의 첨병

트랜스로터 Strato Nero

transrotor thumb

아날로그의 몰락과 회생

엘피를 듣기 위한 하드웨어 턴테이블의 역사는 흥망성쇠를 거듭해왔다. 그저 단순히 분위기 좋게 엘피를 올리고 와인을 한 잔하면 편안하고 풍성한 아날로그 사운드를 즐기는 대중 입장에서는 그저 한낱 턴테이블이지만 업계는 전투장이었다. 특히 격변의 시대에 위기가 찾아온다. 1970년대 말 정도부터 일본의 턴테이블 시장 공략은 대단했다. 그것이 일반 대중 입장에선 좀 더 편리한 턴테이블의 보급에 따른 장점만 보이겠지만 영국이나 독일 등 전통적인 방식의 턴테이블을 만들어내던 브랜드에겐 위기로 다가왔다. 전통적인 아이들러, 벨트 드라이브 방식 턴테이블 메이커가 위기에 처해 사라져갔다.

cd

여기에 더해 1980년대의 막이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디지털 전송 표준이 마려되었고 아날로그 신호를 양자화해 CD라는 포맷에 담기기 시작했다. 더 이상 크고 무거운 엘피를 구입할 필요가 없어졌다. 이미 일본의 침략으로 위기에 처했던 유럽의 강호들은 더욱 숙명적인 위기의식을 느껴야했다. 그렇다고 해서 전통의 강자들이 시장에서 완전히 자리를 감추진 않았지만 시대의 변화 속에서 움츠리며 기회를 엿보았다. 장인정신이 아니라면 그 시절을 감내하진 못했을 지도 모르겠다.

트랜스로터 대표

하지만 위기를 기회 삼아 고군분투하며 심기일전한 브랜드도 있었다. 한동안 시대를 주름잡던 일본의 중, 저가 턴테이블도 자리를 감추었고 그 사이에 살아남은 턴테이블 브랜드는 좀 더 고급 턴테이블 시장에서 살아남았다. SME, 린 같은 메이커들이 대표적이다. 이런 고가 턴테이블 시장의 양상이 이어지는 가운데 독일에서 또 하나의 아날로그 브랜드가 기회를 엿보며 커가고 있었다. 바로 트랜스로터라는 브랜드다. 지금의 트랜스로터를 상상하면 곤란하지만 요헨 레케(트랜스로터 대표)는 이때부터 서서히 자신만의 턴테이블을 만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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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트랜스로터 입문

지금 와서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의 턴테이블 섭렵의 역사도 위와 같은 시대의 흐름과 일치한다. 일본과 기술 제휴를 통해 여러 하이파이 오디오를 만들어냈던 국내 오디오 메이커의 턴테이블이 나의 턴테이블의 시작이었다. 이후 대학에 입학하면서 들였던 것이 테크닉스였고 이후 켄우드 등 일본의 다이렉트 드라이브 턴테이블이었다. 제대 이후 좀 더 심도 깊게 듣고자 들였던 턴테이블은 주로 영국제들, 예를 들어 레가가 대표적이다. 이후엔 상당히 다양한 턴테이블을 섭렵했다. VPI, 프로젝트오디오 그리고 린 LP는 여러 번에 걸쳐 트윅을 해보기도 했다. 중간 중간에 마이크로세이키나 듀얼 같은 턴테이블로 세월을 흘려보내기도 했다.

그러다가 햇수로 10여 년 전 나름 큰맘을 먹고 구입했던 턴테이블이 트랜스로터 ZET-3MKII였다. 신품 구입이었기도 했고 당시 나의 쥐꼬리만 한 수입에 비하면 꽤 큰돈을 썼던 터라 선택하기 이전에 상당히 많은 공부를 했다. 트랜스로터를 선택한 이유는 일단 그 가격대에서 보기 드물게 모터가 본체와 분리되어 있다는 것이다. 턴테이블은 카트리지가 엘피의 소릿골 패임을 통한 진동을 감지해 이를 전기 에너지로 변환 후 증폭해 다시 소리 에너지로 변환하는 장비다. 따라서 그 어떤 작은 진동도 결국 소리로 변환된다. 따라서 본체보단 아무래도 분리된 형태가 좋았다. 또한 플래터 하부에 바로 스핀들이 설치된 일체형이 아니라 그 아래 내부 플래터가 따로 있다는 것. 더불어 베이스도 3층 샌드위치 구조로 역시 진동에 최적화되어 있다. 이 외에도 분리형 스피드 컨트롤러 겸 전원부 등 제법 하이엔드 턴테이블의 설계 공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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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ato Nero

이후 트랜스로터는 리뷰를 하면서 다양한 모델을 만났다. 하지만 ZET-3MKII를 내보내진 않았다. Rondino Bianco처럼 더 값 비싸고 성능이 뛰어난 모델은 있었지만 확실히 가격 대비 성능은 다른 모델이 따라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최근 다시 Strato Nero라는 트랜스로터 턴테이블을 만났다. 수입원에서 대여해준 것이지만 리뷰라는 목적보다 개인적인 호기심이 더 큰 게 사실이다. 개인적으로 트랜스로터를 사용하고 있기도 하고 여차하면 턴테이블을 하나 더 들이고 싶기도 하기 때문이다.

일단 Strato Nero는 지금까지 보아왔던 그들의 디자인에서 탈피해 보다 고전적인 모습으로 태어났다. 직사각형 플린스는 굉장히 무거워 혼자 들기 힘들 정도다. 플린스 자체는 알루미늄 코어를 두 개의 아크릴 플레이로 겹쳐 단단히 결합시킨 모습이다. 두 개 이상의 소재를 겹쳐 샌드위치 방식으로 결합시키는 설계는 보기에도 좋지만 사실 진동 저감을 위해서다. 일종의 ‘Constrained Layer Damping’이라는 진동 저감 기술에 기초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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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플래터는 POM 소재를 사용하고 있다. 이 소재는 언제부턴가 하이엔드 턴테이블에서 주로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역시 진동 저감에 상당히 효율적이며 정전기 등에서 자유로운 편이다. 흥미로운 건 모터 시스템이다. 이 턴테이블은 기본적으로 벨트 드라이브 방식이지만 어디에도 모터가 보이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모터를 분리해 플래터 곁에 두는 설계가 일반적이었는데 이번엔 트랜스로터가 모터를 내부 플래터 주변에 배치해버렸다. 게다가 모터가 총 세 개다. 대체로 트랜스로터 상위 모델은 모터 개수를 늘려가면서 업레이드를 할 수 있지만 이 모델은 기본적으로 총 세 개가 맞물려 내부 플래터를 회전시키는 방식이다. 토크가 낮은 세 개 모터를 매우 적은 진동을 가지고 회전하지만 세 개가 힘을 합하면서 토크도 높아졌다. 실제 회전시키면 빠른 시간 안에 정속에 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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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내부 플래터는 이른바 TMD(Transrotor Magnetic Decoupling) 방식으로 도입하고 있다. 이는 마그넷을 사용해 내부 플래터를 베이스로부터 살짝 이격시키는 형태다. 접촉 면적을 최소화하고 내부 진동이 플래터로 전이되는 현상을 극단적으로 낮추기 위해 고안한 방식이다. 일부 모델엔 FMD, 즉 ‘Free Magnetic Drive’ 방식이 도입되지만 TMD만 해도 트랜스로터가 작심하고 개발한 가장 이상적인 진동 전이 제거 방식으로 유명하다. 이런 구동계는 모두 플린스 아래에 내장되어 있으므로 겉으로 보기엔 사각의 육중한 본체 외엔 눈에 띄지 않는다. 따라서 겉으로는 매우 깔끔하고 심플한 디자인을 유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참고로 스피드 컨트롤과 전원부를 하나의 몸체에 담은 Kostant FMD 전원부가 함께 제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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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톤암은 TRA 9이라는 신형 트랜스로터 톤암을 사용한다. 원래 트랜스로터는 자체 톤암을 제작하지 않고 SME 혹은 젤코 같은 브랜드에 특주를 통해 공급받아왔다. 그러나 SME가 외부 공급을 중단했고 젤코는 문을 닫으면 고민이 많았을 듯한데 무척 빠른 시일 안에 자체 톤암을 개발, 제작해냈다. 그 주인공이 바로 TRA 9이다. 아마도 이 정도 수준의 톤암을 이렇게 빠른 기간 안에 개발해냈을 리는 없다. 오랜 시간 동안 테스트하고 출시를 준비해나가다가 상황이 급변하면서 예상보다 출시를 앞당긴 게 아닐까 추측해본다. 톤암 파이프 등 소재는 알루미늄 알로이며 내부에 세라믹 베어링을 사용했다. 다이내믹 밸런스 타입이며 톤암 배선은 반덴헐 실버 하이브리드 DIN 케이블을 사용하고 있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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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음

장사익

장사익 – 찔레꽃

피아노 타건부터 매우 깨끗하고 청명하다. 그 이슬처럼 투명한 소리는 어떤 음정 왜곡도 없이 시청실 안을 가득 메운다. 전체 대역 밸런스는 어떤 대역도 튀거나 왜소하게 가라앉지 않고 제법 평탄하게 유지된다. 장사익의 보컬이 밀도가 높아 단단하며 빈틈이 없이 강건한 느낌이다. 이번 엘피는 조만간 출시 예정인 재발매의 테스트 프레싱으로 검청을 위해 무척 많이 들어보았던 엘피인데 빈틈없이 고밀도에 윤곽이 분명하면서도 분명한 음악성을 일깨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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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틸리 댄 – Black cow

정적에 가까운 배경은 여느 하이엔드 턴테이블과 유사하다. 그러나 다이내믹 표현에서 트랜스로터는 독보적이다. 무척 풀랫하고 정숙한 편이지만 너무 소극적인 모습으로 움추러들지 않는다. 때론 마치 다이렉트 드라이브 턴테이블처럼 박력이 느껴져 음악의 흥을 돋운다. 필자가 자택에서 사용하는 린 LP12 같은 플로팅 턴테이블과 비교하면 완전히 정 반대편에 서있는 소리다. 특히 약음부터 강음까지 다이내믹 컨트라스트가 역동적으로 펼쳐져 계속해서 음악에 침잠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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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디 메올라, 존 멕러플린 & 파코 데 루치아 / Mediterranean Sundance/Río Ancho

최신 하이엔드 턴테이블이 항상 최선은 아닌 것은 클래시컬 음악의 정제된 사운드 표현엔 능하지만 팝이나 재즈 녹음의 열기는 오히려 축소해 표현하기고 한다. 그러나 트랜스로터로 듣는 재즈, 록, 팝 음악은 활기 넘치는 현장의 에센스를 가감 없이 표출한다. 최대한 정숙하면서도 강력한 추진력에 더해 풍부한 잔향을 표현해내는 모습. 마치 공연장의 그 풍부한 앰비언스가 내 방 안의 공기를 바꾼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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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 오우에/미네소타 오케스트라 – 라흐마니노프 : symphonic dances

트랜스로터의 이런 다이내미즘은 클래시컬 녹음 중에서 대편성에서 빛을 발한다. 군더더기 없이 낄끔하고 조용하면서도 소리의 두께가 얇거나 엷지 않다. 게다가 입체적이면서 소리가 감상자에게 호소력 있게 전달되므로 한순간도 지루할 틈이 없이 사이드 A면이 모두 지나가 버린다. 무대 자체는 전/후 깊이가 깊으며 그렇다고 해서 너무 멀리 조망하면서 음푹 들어간 스테이징이 아니라 앞으로 전진하는 스타일이라 적극적이며 역동적인 이미지를 그려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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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평

곱고 진한 음색은 사실 우마미 레드의 공이다. 그러나 다이렉트 드라이브의 힘과 역동성, 그리고 벨트 드라이브의 풍부한 앰비언스와 음악성을 겸비한 모습은 단언턴대 트랜스로터의 몫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약 8년 정도 시간 동안 트랜스로터를 부여잡고 놓아주기 힘든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 번 들여서 써보기 시작하면 웬만해선 한눈을 팔지 않게 만드는 마력이 있다. 더불어 최신 Strato Nero 같은 경우 톤암의 성능 향상이 눈부시다. 과거 젤코는 물론 SME에 비해서도 디자인, 인터페이스, 성능에서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어 놀랐다. 확실히 오랜 시간 갈고 닦아온 독일 아날로그 전문 집단다운 해석이다. 가장 진화한 아날로그 기술 위에 한층 세련되고 심플한 디자인, 셋업 및 사용 편의성을 추가한 Strato Nero는 하이엔드 턴테이블의 첨병에 다름아니다.

글 : 오디오 평론가 코난

제품 사양

섀시 : 아크릴/알루미늄/아크릴 샌드위치 구조
플래터 : POM
베어링 : Transrotor Magnetic Drive(TMD) 베어링
모터 : 3개
전원 공급 장치 : Konstant FMD
톤암 : TRA 9
기타 : 더스트 커버
크기 (WDH) : 440 x 460 x 220mm
무게 : 28kg

제조사 : Räke Hifi Vertrieb GmbH(독일)
공식 수입원 : ㈜ 샘에너지

Written by 코난

코난 이장호는 하이파이 오디오를 평가하는 평론가다. <고음질 명반 가이드북 1,2> 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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