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티앰프에 대한 생각은 작년부터 있었다. 평소 여러 제품을 수시로 테스트하고 리뷰하다 보면 간단히 인티앰프 하나로 테스트할 때가 편하기 때문이다. 프리, 파워 조합으로 매칭해놓은 나의 또 다른 시스템도 있고 진공관 앰프도 있으며 클래스 D 증폭 앰프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많이 사용하는 클래스 AB 증폭 앰프가 간절했다. 테스트나 리뷰는 나의 취향도 중요하지만 리뷰를 접하고 이를 참고하는 독자, 시청자와의 공감도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간단히 제품의 특성을 설명할 때 매칭한 제품의 면면만 보고도 기준점이 어느 정도 정해지기도 한다.

그렇다고 그저 무채색에 건조한 앰프는 나의 취향이 아니다. 아무리 객관성을 중요시한다고 하지만 한 개인의 객관은 완전히 객관적일 수 없다. 결국, 주관적이다. 나의 취향이 개입된 선택이 될 수밖에 없다. 물망에 오른 인티앰프는 그리폰 Diablo 300, 마크 레빈슨 585, 매킨토시 MA9000, 아큐페이즈 E-5000 정도였다. 이 외에도 골드문트도 있지만 소리 선이 좀 얇고 무엇보다 착색이 좀 있는 편이어서 제외했다. 그리폰도 그들만의 색상이 좀 진하게 느껴졌고 골드문트보다 차분한 컬러가 있어 좋지만 역시 제외. 매킨토시는 두루두루 괜찮은 편. 마크 레빈슨은 눈에 띄지 않고 585.5는 포노단이 계륵이 될 듯한데 585에 비해 가격이 너무 올랐다.

사실 아큐페이즈는 이전에 E-380, E-4000 등을 리뷰하면서 점 찍어놓은 적이 있었지만 미루고 있었던 터였다. 그런데 두 개가 경합할 수밖에 없었다. 플래그십 E-800과 E-5000이다. 하나는 클래스 A, 또 하나는 클래스 AB 증폭이라는 점이 차이다. 그 외에는 거의 동일하다. 사실 음색만 보자면 E-800이 낫다. 좀 더 아련하게 피어오르는 순도 높은 중, 고역이다. 그러나 시간이 좀 걸린다. 빠르게 껐다 켰다 하면서 제품을 테스트하는 데는 불편하다. 한편 E-5000은 바로 제 성능이 나온다. 더불어 저역 측면에서 스피드, 낮은 옥타브의 해상도는 좀 더 나은 편이라고 봤다. 무대 또한 넓고 깊은 편이라 사운드 스테이징 측면의 테스트에도 기민하게 반응한다.

결국 E-5000으로 결정했다. 첫인상은 상상 이상이다. 예전에도 하위 모델을 들어보았고 십수 년 전엔 모노 블록 클래스 A 파워앰프도 한동안 사용하는 등 아큐페이즈와 인연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과거에 들었던 아큐페이즈와 현역기는 완전히 다른 앰프 메이커처럼 변했다. 수입사로부터 전해 들은 바로는 사운드 튜닝을 담당하는 엔지니어를 따로 영입해 빚어진 결과라고 한다. 여기에 더해 회로 설계 측면에서도 과거 내가 알던 그 아큐페이즈에서 일신한 모습이다. 디자인이 크게 변하지 않아 예전이나 비슷할 거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첫인상은 우선 해상력이다. 정미조의 ‘귀로’ 같은 곡에서 기타 약음들, 마일스 데이비스의 ‘Concierto de Aranjuez’에서 아주 작은 미세 소리 알갱이들이 너무 섬세하게 들려 소름이 돋았다. 최근 이런 해상도를 보여준 것은 댄 다고스티노나 CH 프리시전 정도였다. 몸값이 몇 배는 넘는 녀석들이다. 한편 저역 스피드나 댐핑 능력 또한 나의 예상을 상회했다. 사실 예전에 들었던 아큐페이즈 구형은 저역 반응이 좀 느려 기민한 반응이 요구되는 음악들에서 답답한 측면이 있었다. E-5000의 댐핑 팩터가 무려 1000이며 속도감도 매우 훌륭했다. 꽤 드라이빙이 어려운 락포트 Atria에서 이 정도라면 웬만한 스피커는 거의 문제가 없을 듯하다.
아무튼, 앞으로 테스트할 스피커들은 E-5000을 사용해 테스트하게 될 것 같다. 더불어 평소 음악을 들을 때도 자주 호출할 생각이다. 사실 여유가 된다면 추가로 E-800도 구입해 집에서 사용하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다. 앰프가 마음에 드니 옵션 보드가 탐이 난다. DAC는 따로 쓰고 있는 걸 쓰면 그만이지만 AD-50 포노 옵션은 관심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