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의 공간에 들르는 일은 언제나 즐겁다. 공유하고 공감하기도 하면서 한편으로 배우기도 한다. 예전에는 동호인들의 집엘 들락거리면서 내가 사용해보지 못했던 기기와 음반에 대한 귀한 경험을 얻기도 했다. 무엇보다 좋은 건 한 사람의 음악, 음향에 대한 시선을 살펴볼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에 따라 음악, 음향에 대한 생각이 다르고 그에 따라서 접근 방식은 다르다. 같은 음악에 대해서도 평가가 다르듯 그 음악을 재생하는 방식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최근에 방문한 곳은 안나푸르나 출판사에서 운영하고 있는 공간 천변풍경이다. 솔직히 말하면 나의 책 ‘고음질 명반 가이드북’을 만든 대표의 공간이다. 세상엔 그저 돈을 위해 시시콜콜한 자기개발서나 혹은 트렌드에 올라탄 실용서만 만드는 곳도 있다. 안나푸르나는 양질의 음악 관련 책을 상당히 많이 출간해오고 있다. 그 이유는 이 공간에 들어서면 누가 설명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알 수 있다. 진짜로 음악을 좋아하고 그 도구가 되는 오디오에도 많은 정성을 쏟아부은 모습이다.

청음실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무엇보다 공간을 가득 매운 음반들이다. 수만장 정도 되어 보이는데 좌우로 엄청난 양의 LP를 장르, 알파벳 순서로 가지런히 정리해 놓았다. 특히, 팝, 록, 재즈, 가요 등 여러 장르의 음반들이 있어 좋다. 편향적이지 않은 주인장의 취향이 보인다. 종종 고가의 LP가 보이면 이루 말할 수 없이 부럽다. 오디오 시스템 뒤편에 CD가 가득하다. 나도 시청실의 시스템 후방을 이렇게 음반으로 메울까 생각했던 적이 있었는데 말이 쉽지 손이 정말 많이 가는 일이다.

이 분의 오디오를 처음 접했을 때의 기억은 선명하다. 당시 이 공간에 있는 거의 모든 것들은 자택에 보관하고 있었다. 특히 스펜더 스피커와 바쿤 조합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는 이전에 들었던 스펜더 소리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스펜더는 BBC 모니터 스피커 브랜드, 예를 들어 하베스, 그라함 등 유사한 계열 스피커에 비해서도 해상력이 조금 떨어지고 뿌연 안개 속에서 음악을 듣는 느낌이 있다. 이게 어떨 땐 이완된 분위기에 나름의 풍미가 있지만 어떨 땐 좀 답답한 느낌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시스템에선 전혀 그런 느낌이 거의 없었다. 스펜더의 따뜻하고 윤기 있는 음색이 잘 살아나면서 동시에 골격이 제법 뚜렷하고 순도가 높은 소리가 난다. 이 독창적인 스펜더 사운드의 핵심엔 바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걸 좀 지나서 깨달았다. 이번에는 정말 오랜 시간 써오던 바쿤 AMP-5521을 AMP-5522P로 바꾸었는데 해상력과 입체감, 순도 등 여러 면에서 드라마틱하게 업그레이드된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최근에 B&W 802D4를 들여서 두 개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으나 내가 들어봐도 스펜더와 바쿤 조합은 여느 하이엔드 시스템에서도 듣기 힘든 매력 만점의 사운드를 펼쳐 보인다.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조합에서 오는 오묘하고 매력적이며 음향적으로도 우수한 사운드. 역시 오디오는 자신의 단단한 음악적 취향을 기반으로 모험과 더불어 때론 결단, 창의력도 필요하다. 누가 스펜더에 바쿤 조합을 생각이나 했었을까?

이 시스템의 또 하나의 특징이라면 다양한 소스 기기들, 특히 아날로그 소스 기기다. 오디오만 좋아하는 사람들과 음악을 중심으로 음향적 즐거움에 맛을 들인 사람들의 차이점이 바로 여기 있다. 그저 음원 서비스만 즐기는 사람들의 시스템은 재미가 없다. 하지만 오랜 시간 수집해온 음반을 다양한 소스 기기로 들어보면 음악 감상의 즐거움이 배가된다. 특히 디지털 녹음이 아닌 아날로그 녹음의 경우 디지털로 리마스터링한 판본, 즉 CD는 물론 온라인 스트리밍 사이트에 올라와 있는 판본은 오리지널과 전혀 다른 소리여서 실망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다. 아날로그 레코딩일 경우 그것을 담은 그릇, 예를 들어 LP에 품질, 판본에 따라서 무척 다양한 소리를 낸다. 이 시스템엔 가라드 301에 웰템퍼드, 그리고 SME, 오토폰 롱암에 고에츠, 다이나벡터, 오디오테크니카 등 여러 아날로그 장비들로 즐길 수 있어 좋았다. 참고로 나는 요즘 들어 다이나벡터나 오디오테크니카의 정교하고 다이내믹한 소리보다 고에츠에 마음이 더 끌린다. 역시 아날로그 시대 녹음은 아날로그 포맷으로 듣는 게 최선이라는 걸 다시 뼈저리게 느낀다.

하이파이 오디오라는 취미에는 많은 돈이 든다. 하지만 오디오를 돈으로만 접근하면 낭패를 볼 수도 있다. 돈으로만 되지 않는 것이 하이파이 오디오다. 음악에 대한 이해와 열정 없이 세팅한 오디오는 그저 비싼 가구 같은 것이 될 공산이 크다. 돈이 많으면 잘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잘 사는 것처럼 보이는 것과 실제로 잘 사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이렇게 음악에 둘러싸여 있을 때 나는 가장 잘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음악에 취해 시간을 보내다가 새벽이 되어서야 천변풍경을 빠져나왔다.

※ 메인 시스템
스피커 : 스펜더 SP100r2, B&W 802D4
프리 : 바쿤 PRE-5410 MK3
파워 : 바쿤 AMP-5522P
인티앰프 : 레가 오시리스
포노앰프 : 바쿤 EQA-5620 MK3 , 레가 오라 MC
턴테이블 : 웰템퍼드 Classic, 가라드 301 (김박중 베이스)
톤암 : SME 3012, 오토폰 RMG 309(중기)
카트리지 : 다이나벡터 DV XV-1s
카트리지 : 고에츠 Rosewood Signature Platinum
카트리지 : 오디오테크니카 AT-ART1000
※ 서브 시스템
스피커 : JBL L65
인티앰프 : 매킨토시 6100
턴테이블 : 테크닉스 SL-1200MK2
포노앰프 : 골드노트 PH-10 포노앰프
카트리지 : Shure M97XE, HANA-SL-Mono
※ 이 외 카트리지 컬렉션
수미코 Blue Point Special Evo 3
고에츠 Black Goldline
오토폰 SPU Classic GM MK2
데논 DL-103R
레가 Ania Pro
레가 Exact
슈어 M97XE
슈어 M44-7
슈어 M55E
슈어 M75B
오디오테크니카 VM610MONO
오디오테크니카 AT-OC9XML
오디오테크니카 VM750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