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난
히비키 그리고 바쿤
최근 몇 년간 잊을만하면 듣는 단어가 하나 있는데 바로 히비키라는 것이다. 히비키란 한자로는 響(울릴 향)이다. 내게 히비키는 일본 위스키의 고향인 야마자키 증류소에서 탄생한 위스키 중 하나로 가장 선명하게 기억된다. 맑은 물과 천혜의 자연환경에서 대대로 내려온 위스키 제조 장인들이 만들어낸 일본의 위스키들. 이름만 들어도 그 빛깔과 향이 나를 덮쳐올 것만 같다. 야마자키, 하쿠슈 같은 싱글 몰트 위스키는 물론 히비키 같은 블렌디드 위스키는 이제 국내에서도 유명하다. 바로 여기에서 히비키, 향이 등장한다.
히비키를 다시 생각하게 한 건 생각지도 못했던 오디오, 그 중에서도 앰프였다. 바로 일본 구마모토 현에서 최초 깃발을 올린 이 메이커는 아키라 나가이 씨가 수장을 맡아 이끌고 있다. 사토리가 천혜의 자연에서 위스키를 빚듯 바쿤은 구마모토 산속 적막강산 같은 연구소에서 바쿤 앰프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산속의 적막 속에서 최고 수준의 맑은 SN비를 구현해냈다. 그 핵심은 사트리(SATRI)라는 회로에 있다. 일반적인 트랜지스터를 사용해 증폭하는 앰프 회로가 아니라, 전류 입력과 전류 출력 회로를 구성하고, 볼륨은 입력단과 출력단의 저항 비율로 게인, 즉 소리의 크기를 조정하는 회로다.
사트리 회로는 몇 가지 강점이 있다. 우선 네거티브 회로를 구성하지 않고 오직 저항만 사용하기 때문에 신호의 순도를 최대한 보존해 출력이 가능해졌다. 이렇게 회로를 구성하면 일반적인 볼륨이 아니라 게인으로 소리의 크기를 결정하게 된다. 게인은 입력단에서 조정되며 볼륨을 출력단에서 소리 크기를 말 그대로 감쇠(에테뉴에이션)시키는 방식이라 SN비에서 이득을 얻을 수 있다. 일반적인 앰프는 볼륨을 내릴수록 음악 신호 대비 노이즈의 비율이 커지기 때문에 SN비가 낮아지지만 바쿤은 SN비의 변화가 없으므로 낮은 볼륨에서도 왜곡 없이 깨끗한 소리를 내준다. 바로 이 사트리 회로를 더욱 진화시켜 신호 순도를 극대화한 것이 바로 HIBIKI 회로다. 증폭단에는 MOSFET 출력 소자를 사용해 음악적인 뉘앙스와 출력 대비 강력한 스피커 제어력을 구현한 모습이다.
디자인/인터페이스
최신 HIBIKI 회로는 이미 바쿤의 신형 앰프들, 예를 들어 SCA-7511MK4에서 사용되었으며, 이제 레퍼런스 파워앰프 AMP-5522P에도 적용되었다. 게인은 23.5dB. 일반적인 볼륨과 전혀 다른 회로를 가지고 있지만 전면 게인을 조정해 일반적인 인티앰프의 볼륨처럼 사용 가능하다. 한편 입력은 RCA, XLR, BNC 등 세 조를 지원한다. BNC를 사용하는 것이 회로 설계상 가장 이상적이지만 다른 단자를 사용해도 바쿤 사운드는 충분히 즐길 수 있다. 만일 BNC 입력이 여의치 않다면 차선으로 RCA를 선택하기를 권장한다. 참고로 각 입력단 임피던스는 10KΩ(XLR), 100KΩ(RCA), 25Ω(BNC)으로 각각 상이하다.
박스에서 방금 꺼낸 5522P는 바쿤 고유의 디자인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어두운 패널에 더해 전면에는 오렌지 빛깔의 세 개 노브가 마치 열매처럼 매달려 있다. 좌측이 입력 선택, 중앙이 게인, 우측이 전원 ON/OFF 기능을 담당한다. 상판으로 시선을 옮기면 중앙에 방열판이 전/후로 가로지르고 있다. 출력단 쪽에서 발생하는 열을 빼내기 위한 디자인이다. 흥미로운 건 이전에 바쿤 앰프에서 보기 힘들었던 디스플레이 창이다. 이를 통해 입력 선택, 게인값 등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단순한 기능만 지원하지만 리모컨도 제공하므로 사용 편의성은 나쁘지 않은 편이다.
청음
이번 테스트는 내 시청실에서 진행했다. 소스 기기로는 최근 테스트 중인 루민 P1 MINI를 사용했고 네트워크 스위치 허브로 루민의 L2를 활용했다. 한편 스피커는 리바이벌 오디오의 Atalante 5를 사용해 테스트했다. 참고로 5522P는 채널당 58와트에 불과하다. 최대출력이 채널당 70와트라고는 하지만 정력 출력은 58와트가 맞다. 과연 12인치 우퍼를 장착한 Atalante 5를 제대로 요리할 수 있을까?
앨런 테일러 – Colour to the moon
이전에 들을 수 없었던 음색이 펼쳐진다. 고역은 더욱 달콤하고 동시에 싱싱하다. 형용 모순 같은 두 가지 특성이 동시에 느껴져 놀랍다. 기타의 잔향이 충만해 기타 사운드가 일반적인 트랜지스터 앰프보다 더 여운을 뿜어낸다. 그렇다고 해서 토널 밸런스를 심하게 왜곡하진 않는다는 점이 놀라워 앨런의 보컬은 눈을 감고 들어도 앨런이 분명하다.
타이니 아일랜드 – Vaquero
바쿤이 만들어내는 중고역의 미묘한 질감은 이전에도 맛보았던 것으로 7511MK4의 그것을 떠올린다. 하지만 5577P는 중저역이 더 보강되어 더 힘 있고 심지가 뚜렷하게 들린다. 특히 각 악기들의 포커싱이 핀 포인트로 맺히며 사운드 스테이징이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이다. 타악의 울림과 기타의 음색 구분은 물론 위치가 매우 선명하게 형성되는 편이다.
핑크 – Maker
사실 사트리 회로를 적용한 바쿤은 따뜻하고 달콤한 음색이 핵심이다. 와중에 잃지 않는 순수한 울림이 현대인의 삶 속에 오아시스 같은 느낌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5522는 무척 입체적인 음장감에 더해 어택부터 디케이, 서스테인까지 가파르고 깔끔하며 릴리즈에서 약간 여운이 감도는 수준이다. 따라서 반응 속도 또한 빠르며 명쾌한 타격감을 선사한다. 절대 흐릿하고 진한 멜랑콜리로만 승부하는 앰프가 아니다.
알렉상드르 타로 – 라흐마니노프 : 피아노 협주곡 2번, 1악장
저역 제어에 관해서는 하위 모델과 상당히 큰 차이를 보인다. 필자가 운용하는 스피커 중에선 락포트까진 아니더라도 리바이벌 아탈란테5 및 윌슨오디오 사샤는 제법 만족스럽게 제어한다. 덕분에 대편성 교향곡도 대형 스피커들과 위화감 없이 어울린다. 뛰어난 악기 분리도와 하이엔드급 정위감에 더해 바쿤 고유의 촉촉하며 영롱한 울림이 양립되었다.
총평
響(울릴 향)을 의미하는 히비키 위스키는 그들의 말에 의하면 브람스의 교향곡 1번, 4악장을 상상하면서 만들었다고 한다. 흥미로운 건 향이라는 한자는 우리에게 익숙한 교향곡에 들어가는 그 향과 동일한 한자다. 바로 그들은 하모니를 중요시한다는 의미에서 향을 뜻하는 히비키를 만든 것이다. 몰트 위스키와 그레인 위스키 등을 블렌딩한 블렌디드 위스키 히비키는 바로 그런 하모니, 즉, 조화를 최고의 미덕으로 삼아 빚었던 것이다.
바쿤의 앰프를 들을 때마다 나는 위스키, 그 중에서도 히비키 위스키의 향과 맛을 음미하는 듯한 상상에 빠진다. 그리고 이번 5522P는 그 바쿤의 소리 신호에 대한 그들의 이상이 가장 극대화되어 표현된 모델이다. 만일 바쿤을 조그만 서재 혹은 데스크탑 전용 앰프로 생각하고 있다면 5522P를 듣는 순간 깜짝 놀랄지도 모른다. 지난 오디오쇼에서 윌슨 오디오 와트/퍼피 신형에 5522P를 매칭한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글 : 오디오 평론가 코난
사진 : 월간 오디오
사양
최대 출력 70W(8Ω, 10% 왜곡), 58W(무 왜곡)
아날로그 입력 XLR×1, RCA×1, SATRI-LINK×1
주파수 특성 20Hz(0-0.14dB)-100kHz(0dB)
입력 환산 노이즈 -105dB
왜율 0.054%(RCA, 1W), 0.18%(RCA, 10W)
댐핑 팩터 16(50W), 13.3(10W), 12.2(1W), 13.42(1mW)
게인 15(23.5dB)
입력 임피던스 10㏀(XLR), 100㏀(RCA), 25Ω(BNC)
게인 컨트롤 10비트 릴레이에 의한 디지털 컨트롤
원격 제어 적외선 리모컨(애플 리모컨 사용)
크기(WHD) 44×17×36cm
무게 11kg
제조사 : 바쿤 프로덕츠 (일본)
공식 수입원 : 바쿤 매니아 (https://cafe.naver.com/bakoonmania)
공식 소비자 가격 : 9,400,000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