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은 오디오파일에겐 진공관의 계절이다. 마치 애착 인형처럼 진공관을 끼고 살게 된다. 누군가 싸고 높은 출력에 준수한 S/N비와 낮은 고조파 왜곡을 가진 트랜지스터를 놔두고 굳이 진공관 앰프를 쓰는 이유가 뭐냐고 묻는다면 나는 음색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소리의 질을 정형화된 스펙과 측정 수치로 이야기한다면 대체로 트랜지스터 앰프가 우수하다. 그러나 실제로 들어보면 때론 더 낮은 출력과 S/N비, 그리고 상대적으로 높은 고조파 왜곡을 가진 진공관 앰프에서 음악적 감동을 얻기도 한다.

여러 진공관 앰프를 사용해왔지만 요즘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좀 더 고전적인 앰프가 당겼다. 특히 오래 전 사용했던 EL84(6BQ5)를 채용한 앰프가 생각난다. 맨리 Stingray를 처음 들었을 때의 그 상쾌하고 동시에 달콤했던 중, 고역이 떠오른다. 더 오래 전엔 국내 SIS 전자에서 출시했던 마에스트로 BQ도 생각난다. 다들 자그마한 사이즈에 EL84의 매력을 극대화했던 앰프들이다.

요즘 많은 진공관 앰프 메이커들은 점점 트랜지스터 앰프가 되고 싶어하는 듯하다. 마치 로봇을 연상시키는 디자인에 음색도 자꾸만 트랜지스터 앰프를 따라간다. 트랜지스터 앰프가 있어도 굳이 진공관 앰프를 하나 정도는 구비하려는 이유는 진공관 앰프 고유의 음색이 좋아서다. 고역은 약간 롤오프되어도 따뜻한 잔향을 뿌리며 포근하게 공간을 감싸는 안온함. 저역은 약간 뭉개지는 경우가 있다고 해도 너무 강하고 냉정하게 찍어누르는 것이 아니라 차분하고 풍부하게 바닥에 내려앉은 느낌. 종종 이런 소리가 나는 좋다.

최근 레벤 CS300XS를 꺼내들었다. 그라함 LS5/9이 이제 푹 익었는지 좋은 소리를 내고 있는데 진공관 앰프가 당겼다. 이전엔 네임오디오를 사용했었고 크게 불만은 없었지만 겨울이 되니 여지없이 진공관 앰프 소리가 그리워진다. 그 중 레벤은 21세기에 만들어진 앰프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빈티지 앰프의 디자인을 하고 있어 더욱 정감이 간다. 게다가 내가 좋아하는 EL84를 채널당 두 알씩 사용하고 있다. 초단엔 쌍삼극관 12AX7를 사용했는데 아주 간단한 진공관 구성에 소소한 튜브 롤링의 재미도 쏠쏠하다.

소리는 역시 내가 기억하던 그 EL84, 6BQ5의 소리가 맞다. 예쁘고 싱싱하며 달콤하다. 상위 CS600X도 있지만 나는 음색적 매력이라는 측면에선 오히려 동생인 CS300XS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집에선 주로 LP를 듣는데 LP의 온전한 아날로그 사운드가 더욱 더 증폭되어 들린다. 솔직히 LS5/9을 완벽히 구동한다는 느낌은 없다. 하지만 작은 볼륨으로 틀어놓고 책을 읽거나 글을 쓸 땐 이보다 더 좋은 매칭이 또 있을까싶다. 게다가 플레이어는 린의 LP12. 함께 세팅해놓고 보니 마치 1970년대 어느 도시의 가정집 한켠으로 돌아가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다. 최신의 기술을 투입한 오디오도 좋지만 종종 사람의 마음을 건드리는 건 과거의 기술로 만든 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