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일본에 간 적이 있다. 주로 신주쿠 등을 중심으로 여러 레코드숍을 탐방하며 LP 디깅을 했다. 너무 많은 레코드숍을 다녔는지 걷는 것도 힘들 정도로 지쳤는데 디스크유니온 한 귀퉁이에서 일본 재즈 LP 코너를 발견하고 반가웠던 기억이 있다. 사실 아주 귀한 앨범들은 구할 수 없었으나 한동안 잊고 지냈던 뮤지션들의 타이틀이 꽤 있어 몇 장 집어서 결제하고 나왔다. 일본 재즈는 나조차도 그리 많이 들어보진 못했다. 하지만 들어보면 볼수록 과거 일본의 재즈 씬은 정말 대단했다는 생각이 든다. 최근 마주한 스티브 마거스의 앨범은 그 중에서도 진수라고 할 수 있다.
이 앨범은 재즈 역사에서 매우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는 일본 재즈의 명반이자, 세계 최초의 상업적 디지털 녹음 앨범으로 유명하다. 1971년 일본 Nippon Columbia에서 발매된 이 LP는 실제 녹음은 1970년에 이뤄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선 스티브 마커스는 미국의 테너/소프라토 색소폰 연주자다. 1960년대 Vortex 레이블에서 자유분방한 사이키델릭 재즈(예: The Lord’s Prayer 등)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런 그가 허비 만( Herbie Mann)과 우디 허먼(Woody Herman) 밴드와 함께 일본 투어 중에 이나가키 지로(Jiro Inagaki)의 초대를 받아 이 세션을 하게 되었다. 재즈가 그렇듯 불확실성, 즉흥 음악의 대명사이듯 그들의 음악적 우정은 그렇게 이어졌고 이 앨범이 태어나게 된다.
여기서 이나가키 지로와 소울 미디어(Jiro Inagaki & Soul Media)에 대해 짚고 넘어가자. 이들은 일본의 전설적인 재즈/퓨전 그룹을 회자되곤 한다. 이나가키 지로(Jiro Inagaki)는 스티브 마커스처럼 테너 색소폰 주자로서 일본 재즈/소울/퓨전의 거장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 당시 최고의 세션맨들로 구성된 소울 미디어(Soul Media)가 합세했으니 보증수표급 연주를 기대해도 좋다.

한편 이 앨범은 최초의 디지털 재즈 녹음으로도 유명해 종종 언급된다. 당시 NHK(일본 방송)의 프로토타입 PCM 디지털 레코더로 녹음된 세계 최초의 상업 앨범이라는 데에 가치가 높다. 1982년에 CD가 나오기 11년 전이라, 당시에는 아날로그 LP로만 발매됐으니 디지털 오디오 역사의 중요한 마일스톤이 되는 녹음이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오디오 애호가들이 “1970년 녹음치고는 놀라울 정도로 깨끗하고 다이내믹하다”고 평가하는 데는 이런 녹음 스토리가 존재한다.

※ 초창기 PCM 레코딩에 대한 참고 자료
https://highfidelity.pl/@main-1492&lang=en
https://highfidelity.pl/@main-1536&lang=en
각설하고 참여 뮤지션들의 면면을 좀 더 살펴보자.
스티브 마커스 – 테너/소프라노 색소폰
이나가키 지로– 테너 색소폰
사토 마사히코 – 피아녹, 일렉트릭 피아노
카와사키 료 – 기타
아라카와 야스오 – 베이스
이시마츠 하지메 – 드럼
타나카 세이지 – 드럼

수록곡은 네 곡으로 비틀스의 곡이 포함되어 있어 친근하게 느껴진다. ‘Something’은 비틀즈의 명곡을 재즈-퓨전으로 재해석한 트랙으로 색소폰 듀오의 강렬한 인터플레이가 인상적이다. 한편 ‘Fairy Rings’ 녹음에 참여한 사토 마사히코가 작곡한 곡으로 타이트하고 모던한 퓨전 넘버. 이 앨범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만하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또 하나의 사토 마사히코 작곡 ‘Serenity ’은 무려 11분이 넘는 러닝 타임 동안 일본 재즈의 깊이와 자유를 만끽하게 해준다. 마지막으로 다시 ‘Something’를 13분 넘게 연주한다. 타이틀곡의 확장 버전으로 피날레를 장식한다. 보너스 트랙처럼 취급되지만 끝까지 들어보면 앨범의 수미쌍관을 완성시켜주는, 빼놓을 수 없는 연주다. 사이드 A 연주보다 더 길고 자유로운 즉흥 연주가 펼쳐진다.
전체적으로 색소폰 듀오 중심의 강렬한 블로잉과 즉흥 연주 그리고 전자 피아노와 기타가 더해진 초기 퓨전 재즈 사운드의 만찬이다. 자유롭고 에너지 넘치면서도 멜로디를 유지하고 있는 느낌이다. 비틀즈 커버가 있다고 해서 그저 비너스나 유러피언 재즈 트리오 등 국내에서 인기 있는 그런 일본 스탠더드 재즈와는 차원이 다른 연주다. 전체적으로 아방가르드/프리 재즈 성향 강하므로 초심자가 접근하긴 어려울 수 있지만 디지털 녹음의 서막이자 미국, 일본 재즈 뮤지션들이 국경을 넘어 만난 특별한 순간을 아름답게 담아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