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빛낸 역전 노장
영원할 것 같았던 청춘도 언젠간 끝난다. 활짝 만개했던 꽃이 시들 듯 그들도 우리도 언젠간 리즈 시절의 끝을 보게 될 것이다. 하지만 시들었다고 해서 생명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또 새로운 계절이 돌고 돌아 봄이 오면 다시 어디선가 새싹이 돋는다. 생명이 끝날 때까지, 끝날 때까지 끝난 건 아니다. 종종 1990년대 하이엔드 오디오의 커다란 물결 위에서 멋지게 유영하던 사람들이 하나 둘 사라져갔다. 은퇴하고 세상을 등지는 등 한 시대가 저물어갔다. 그러나 알고 보면 은퇴할 나이를 한참 지나서도 현역을 연장하는 사람들을 보면 존중을 넘어 존경의 메시지를 마음속으로 건네게 된다. 이제 세상을 떠났지만 윌슨 오디오의 데이브 윌슨이 그랬다. 그리고 크렐을 떠나 단 다고스티노를 설립해 승승장구 중인 그를 보면 놀랍기도 하다.
그러나 메인스트림 아래 언더그라운드 어디선가 여전히 열정의 끈을 놓지 않고 있는 베테랑들이 있다. 예를 들어 최근 몇 년간 미국에서 높은 가격 대비 성능으로 가장 뜨거운 지지를 받고 있는 쉬트 오디오를 보라. 신진 메이커 같지만 사실 이 브랜드를 이끄는 수장 둘 중 한 명인 제이슨 스토다드는 수모(Sumo)라는 굴지의 앰프 브랜드 출신이다.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인 마이크 모팻은 DAC와 프로세서 등 디지털 분야에서 한 획을 그은 세타(Theta) 출신이다. 또 누가 있을까? 앰프질라, SAE의 본 조르노 옹은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지만 그와 함께 컨스텔레이션을 이끈 피터 매드닉은 사실 알고 보면 오디오 알케미 출신으로 몇 년 전 엘락과 합병으로 엘락 알케미를 론칭시켰다.
퍼페추얼 테크놀로지스 P1A + P3A + Monolith PSU
갑자기 오디오 알케미를 함께 이끌었던 마크 쉬프터가 떠올랐다. 그의 이름을 선명히 기억하는 것은 그가 독립해 만들었던 DAC를 직접 구입해 사용하면서 받았던 감흥 때문이다. 1990년 오디오 알케미 설립 후 1999년 사업을 접은 후 2천 년대 들어 퍼페추얼 테크놀로지를 설립해 당시로선 상당히 독창적인 설계의 DAC와 DDC 등을 만들었고 전용 전원부 등을 옵션으로 설계해 빼어난 음질을 선사했다. 오디오 알케미의 설계 철학을 이어받았지만 좀 더 향상된 음질과 디자인으로 한동안 나의 시스템을 기쁘게 만들었다.
베라-파이
최근 생소한 이름의 베라-파이라는 브랜드를 알게 되었다. 리뷰를 의뢰받았는데 생전 처음 보는 브랜드지만 멋진 마감과 디자인, 게다가 말도 안 되는 가격으로 흥미를 끌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이 브랜드를 이끌고 있는 수장이 다름 아닌 오디오 알케미와 퍼페추얼 등 소싯적 재미있게 들었던 그 브랜드의 마크 쉬프터인 것이다. 이젠 기억 속으로 저 멀리 사라진지 오래고 이미 은퇴했을 거라 생각했던 마크 쉬프터가 살아 돌아온 것 마냥 놀라웠다. 베라-파이 그리고 스피커 이름은 Vanguard Scout다.
LSA Signature 50
여기서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그가 만든 스피커의 협력 브랜드다. 원래 베라-파이는 앰프, 전원 장치 등 하이파이 오디오용 액세서리를 개발해 소소하게 판매하는 브랜드다. 그런데 어느 날 스피커를 개발해 내놓은 것. 스토리는 XSA Labs라는 브랜드를 빼놓고 설명할 수 없다. XSA Labs는 LSA 시그니처 스피커 시리즈를 출시해 한 때 커다란 인기를 얻었던 메이커로서 스피커 전문 브랜드다. 언더우드 하이파이와 협력해 만든 스피커들로서 높은 가격 대 성능으로 오디오파일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인기를 얻었다.
이를 설계한 XSA Labs의 엔지니어는 비엣 응우옌이라는 인물. 그가 운영하는 XSA Labs에선 Vanguard라는 스피커를 내놓은 바 있는데 외부 디자인은 BBC 스피커를 연상시키며 실제로 LS3/5A의 현대적 계승을 목표로 만든 스피커였다. 마크 쉬프터가 바로 그와 협력해 만든 것이 바로 베라-파이의 Vanguard Scout이라는 스피커다. 어찌 보면 Vanguard의 좀 더 대중적 트리클 다운을 목표로 한 게 아닐까?
고성능 소형 스피커
이번 스피커는 오디오 마니아들로부터 커다란 호평을 얻었던 LSA 시그니처의 설계자가 마크 쉬프터의 베라-파이와 협력해 만들었다. 당연히 LSA 시그니처의 설계를 어느 정도 계승하고 있지만 가격은 LSA 시그니처 시리즈가 1천불에서 약 3천불에 이르는 것과 비교할 때 훨씬 더 저렴한 가격대에 위치하고 있어 일단 흥미를 유발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그리 크지 않은 사이즈여서 작은 사이즈의 거실이나 서재 혹은 조금 넓은 책상 위에서도 운용할 수 있을 듯하다.
직접 박스에서 꺼내보면서부터 놀라운 마감에 마음을 빼앗겼다. 로즈우드 베니어 마감으로 아름다운 붉은 빛에 나뭇결이 그대로 살아 있다. 게다가 커팅한 부분들도 이 가격대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깔끔하고 고급스럽다. 후방으로 가면 바이 와이어링은 지원하지 않고 오직 한 조의 바인딩포스트만 장착되어 있다. 플라스틱 캡으로 마감된 단자인데 가격을 생각하면 이해가 가는 정도다. 별도의 그릴을 기본 제공하고 있으며 그릴 자체는 평범한 천 소재를 사용하고 있다.
우선 유닛을 살펴보면 1인치 실크 돔 트위터로 표면이 검게 반짝여 깜찍한 인상을 준다. 그리고 주변을 금속 프레임으로 마감하고 총 여섯 개의 나사로 고정해놓았다. 그 아래로는 5.25인치의 작은 미드/베이스 우퍼를 채용했다. 구형 스캔스픽 우퍼를 연상시키기도 하는 진동판이 돋보이는데 요즘엔 그리 흔치 않은 페이퍼 진동판이다. 폴리프로필렌, 카본 등 다양한 수지 계열 혹은 알루미늄이 대세지만 페이퍼만의 독보적인 음색은 여전히 매력적일 수 있다. 되레 요즘 흔치 않은 페이퍼 우퍼 진동판의 음질을 마구 들어보고 싶어진다.
Vanguard Scout는 2웨이 북셀프 스피커다. 로딩 방식은 저음 반사형으로 후방에 포트가 큼지막하게 마련되어 있는 모습이다. 마지막으로 또 하나, 바로 크로스오버 네트워크인데 마치 LSA 시그니처 50의 크로스오버를 연상시킨다. 어떤 소재인지 정확히 밝히진 않았지만 베라-파이에 의하면 이 스피커보다 열 배 더 비싼 스피커에서도 사용하는 필름 커패시터 및 인덕터 등을 사용했고 자랑하고 있다. 참고로 공칭 임피던스는 8옴, 감도는 84.5dB. 여기서 감도를 보고 깜짝 놀랐다. 비교적 최근 출시되는 스피커 중 이렇게 감도가 낮은 스피커는 처음이다. 아마도 필자가 사용하는 85dB짜리 케프 LS50 Meta 이후 가장 낮은 감도를 갖는 스피커인 듯하다.
청음
이번 테스트엔 필자의 청음실 시스템을 그대로 사용했다. 아래는 이번 테스트에 사용한 시스템 목록이다. 감도가 매우 낮기에 코드 일렉트로닉스 ULTIMA를 활용했고 소스 기기는 본랜 윌슨 Sasha 혹은 락포트 테크놀로지스 Atria 등 필자의 레퍼런스 스피커를 매칭해 사용하던 것들이다. Vanguard Scout엔 과한 면은 있지만 그만큼 성능을 최대한 끌어낼 수 있었다.
하모닉 디스토션
주파수 응답 특성
임피던스 특성
※ 테스트 시스템
룬 코어 : 웨이버사 Wcore
네트워크 플레이어 : 웨이버사 Wstreamer
DAC : 반오디오 Firebird MKIII
앰프 : 코드 일렉트로닉스 ULTIMA 인티앰프
일단 이 스피커를 처음 들었을 때 귓가에 들려오는 달콤하고 싱싱한 중, 고역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매우 검은 트위터는 반짝이는 도료를 도포한 듯한데 요즘 유행하는 다이아몬드나 벨릴륨 등 금속 트위터가 아닌 과거 모렐 같은 트위터를 연상케 한다. 예를 들어 캔디스 스프링스의 ‘Breakdown’을 들어보면 작은 사이즈에도 불구하고 시청실의 넓은 공간을 꽤 풍부하게 메운다. 더불어 중역대엔 페이퍼 진동판 특유의 텍스처가 느껴진다. 너무 매끈하거나 냉정하게 다듬은 중역이 아니라 보컬, 악기들의 표면 질감이 잘 표현되어 음악 듣는 재미를 고조시킨다.
이 스피커는 무척 달콤하며 싱싱한 고역과 질감 표현이 뛰어난 중역을 가지고 있다. 현대 하이파이 스피커, 예를 들어 바워스앤윌킨스, 케프 같은 브랜드가 추구하는 평탄하고 투명한 사운드와 반대편에 있다. 되레 BBC 모니터 불셀프의 밀도 높고 탄탄한 중, 저역에 과거 다인오디오에서 들려오던 독특한 색상의 음색을 가지고 있다. 올레 에드바르 안톤센의 ‘홀베르크 모음곡’을 들어보면 예쁘면서 달콤한 중, 고역이 빛난다. 고역 끝이 30~40kHz 이상으로 치솟는 광대역은 아니지만 가청 영역 안에서 충분히 호소력 짙은 사운드를 내뱉는다.
낮은 중역부터 높은 저역 사이의 밀도감은 중, 고역의 느낌과 사뭇 다르다. 더 밀도 있고 강력하며 꽤 두꺼워 이 사이즈 북셀프 치곤 느끼기 힘든 묵직한 펀치력이 잘 느껴진다. 예를 들어 밥 제임스 트리오의 ‘Rocket man’을 들어보면 중, 고역대를 오가는 피아노는 상쾌하고 달콤하게 빛나는 반면 중, 저역을 오가는 리듬 악기들은 두텁고 단단하며 역동적인 움직임을 보인다. 과거 스캔스픽의 일명 ‘쭈구리’ 우퍼 혹은 어셔의 BE-718 같은 스피커의 그것을 떠올린다.
모양만 보았을 땐 그저 작은 사이즈에 서재에 놓고 가벼운 팝이나 실내악만 즐기기 좋은 스피커 같지만 다양한 클래시컬 음악 녹음에서도 나름 높은 기량을 뽐낸다. 예를 들어 조성진/유럽 실내 관현악단이 연주한 ‘모차르트 : 피아노 협주곡 20번, 1악장’을 들어보면 서서히 고조되는 음량의 강, 약 다이내믹스가 미시적인 차이로 대비되면서 싱싱한 실체감을 부각시킨다. 특히 관악과 현악의 중, 고역 표현에 있어선 상당히 매력적이고 개성 넘치는 음색을 펼쳐낸다. 그에 반해 저역을 오가는 악기들은 힘 있고 묵직하게 대비되어 들린다. 이러한 표현력 덕에 이 정도 사이즈에서 표현하기 힘든 깊고 진한 음색과 그에 따른 호소력이 짙게 다가온다.
총평
오디오 알케미, 퍼체추얼 테크놀로지스 등 여러 브랜드를 운영하며 자연스럽게 확보된 제작 노하우는 마크 쉬프터의 것이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이 스피커를 설계하고 튜닝한 장본인은 XSA Labs의 누엣 응우옌인 것으로 보인다. NASA 엔지니어로서 우주 항공 분야 수십 년의 커리어를 가진 엘리트 엔지니어로서 누구보다 음악과 오디오를 좋아하는 그는 이제 오디오 분야에서 스스로 일가를 이룬 듯하다. 낮은 감도 등 몇 가지 소소한 단점도 있지만 음질과 그 음색의 매력은 그 모든 것을 덮어버리고도 남는다. 갈수록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높아만 가는 요즘 하이파이 오디오 분야에서 Vanguard Scout는 거의 횡재에 가까운 가격 대비 성능을 보여준다.
글 : 오디오 평론가 코난
제품 사양
Drivers:
1 x 5.25” treated paper cone woofer
1x 25mm silk dome tweeter
Sensitivity: 84.5dB
Power Handling: 50W
Nominal Impedance: 8 Ω
제조사 : Vera-Fi Audio LLC
공식 수입원 : ㈜샘에너지
공식 소비자 가격 : 699,000원
구입 문의 : 파인에이브(www.fineav.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