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아침 일어나 컴퓨터를 켜고 어제 쓰다가 만 원고를 뒤적이다가 퇴고를 마쳤다. 블로그에 쓸 그리 길지 않은 뉴스거리였다. 요즘은 정말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기술로 무장한 디지털 기기들이 쏟아지니 디지털 관련 뉴스가 풍년이다. 스포티파이, 타이달 등 북유럽에서 시작된 디지털 스트리밍은 전 세계 음악 시장을 집어삼켰다는 게 실감난다. 게다가 미국의 거대 공룡 애플은 애플 클래시컬 서비스까지 론칭시킨 마당이며 또 다른 IT 대기업 아마존도 아마존 뮤직을 론칭해 순항 중이다. 그러다보니 여기에 대응할 새로운 프로토콜, 전송방식도 제각각이며 하드웨어 제조사들은 그 어느 때보다 바빠졌다. 그들에겐 그저 그 옛날의 SPDIF 전송 방식 하나면 끝나던 과거 CDP 시절이 그리울 지도 모른다.
글을 쓰면서 잠시 상념에 잠겼다 빠져나왔다. 정신을 붙잡고 나니 슬슬 허기가 몰려왔다. 일단 카메라와 외투를 챙겨 밖으로 나와 식사를 했다. 오늘은 오후에 대사관에 갈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마음이 급해 택시를 잡았는데 반대 방향으로 잡은 건 유턴을 하는 기사님을 보고는 알아차렸다. 1호선 시청역에서 도보로 3분이라곤 하지만 바쁜 마음에 종종 택시를 잡아 타는 건 요즘 들어 조금 나쁜 습관으로 자리 잡았다. 이내 가까운 곳까지 가다가 골목길을 돌아 들어선 곳은 마치 옛날의 그 풍경을 거의 그대로 간직한 듯 여유롭고 한적했다.
이곳은 영국 대사관이다. 평생 타국의 국내 대사관을 갈 일은 그리 많지 않을테다. 기껏해야 비자를 발급받을 때 정도 아닐까? 나 또한 영국 대사관저는 처음이라서 서울, 그것도 종로라는 서울 한복판임에도 다소 옛된 거리 풍경과 고택의 정문을 보니 낯설기는 외국인의 시선과 다르지 않을 듯했다. 시간이 가까워지자 입장이 가능했고 가이드를 자처한 직원의 안내에 따라 정문을 지나 뒤편으로 올라갔다. 옆으로 스쳐지나가는 건물은 영락없는 영국식 가옥이다. 그렇다. 이 곳은 영국 대사관이다. 몇 분이 지났을까? 대사관저로 입장하는 커다란 문을 통과하자 오늘 내가 여기 왜 왔는지 그제야 정신을 퍼뜩 들었다.
디지털에 대한 잠깐의 상념은 다시 깨어났다. 바로 오늘의 주인공은 영국을 대표하는 디지털 오디오 메이커 메리디안이기 때문이다. 메리디안은 미국이 와디아, 크렐, 마크 레빈슨 등 하이엔드 브랜드가 시디플레이어로 디지털 부문을 주름잡던 시기 영국의 떠오르는 디지털 제국 같은 느낌이었다. dCS, 린와 함께 영국의 디지털 기술로 세계를 재패라도 할 기세였다. 나 또한 2천년을 전후로 메리디안의 디지털 기기를 자주 사용하면서 음악 그리고 음향에 빠졌으니 내게도 메리디안의 디지털 DNA는 꽤 친숙하다. 메리디안 506부터 507, 508, 588 같은 500 시리즈에서부터 시작해 G 시리즈까지 시디 플레이어 중에 가장 많이 사용했던 브랜드가 메리디안이었으니까.
메리디안 디지털은 현재 진행형이다. 알고보면 메리디안 초유의 네트워크 플레이어 Sooloos의 소프트웨어 팀이 나와 독립한 회사가 룬랩스(Roonlabs)며 대표 밥 스튜어트가 만든 코덱이 MQA였다. 밀레니엄 전후 시디플레이어로 세계를 주름잡던 메리디안은 스트리밍 시대에서 보면 일찌감치 스트리밍의 밭에 씨를 뿌린 선구자 중에서도 으뜸이었다. 그렇다면 현재 메리디안 내부에선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오늘 영국 대사관씩이나(?) 방문에서 알아볼 일은 과거의 메리디안이 아니라 현재 메리디안의 초상이다.
영국 대사관이 왔으니 대사가 자신의 집에 온 걸 축하한다는 인사를 받았다. 그리고 이어서 국내 메리디안 디스트리뷰터 케이원에이브이 대표 그리고 메리디안에서 내한한 글로벌 마케팅 매니저 제레미 브라운의 프리젠테이션이 이어졌다. 첫 번째 주자는 아무래도 엘립스(Ellipse)다. 메리디안에서 야심차게 준비한 올인원 스트리밍 스피커다. 집에서 편하게 자리를 옮기면서 사용하기 딱 알맞은 제품 사이즈로. 좌우 너비가 412mm, 깊이가 223mm, 높이가 171mm다. 무게는 단 3.9kg. 우선 외관은 상당히 콤팩트하면서 다부진 인상이다. 현대적인 디자인에 강력한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듯 날렵한 모습이다.
스피커는 총 세 개를 사용하고 있다. 내부 중앙엔 저역을 담당하는 베이스 우퍼를 심어놓았다. 일명 ‘레이스트랙’ 베이스 우퍼로서 진동판이 마치 운동장 트랙 같은 디자인이다. 한편 양옆으로는 일명 와이드 레인지 드라이버를 장착해놓았다. 중, 고역 주파수를 재생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메리디안의 인월 스피커 모델 중 하나인 DSP320에 쓰였던 드라이버다.
이 세 개 유닛을 총 세 개의 앰프로 각각 구동된다. 그저 사용 편의성과 기능성만을 위주로 만든 스피커가 아님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앰프는 우퍼에 30와트, 그리고 와이드 레인지 드라이버엔 각 25와트 출력의 앰프를 내장했다고 한다. 아마도 클래스 D 증폭이리라. 전체 주파수 대역은 3dB 기준 40Hz에서 20kHz까지 비교적 넓은 대역을 커버한다. 웬만한 거치형 스테레오 북셀프 정도의 주파수 응답이다.
아무래도 이런 컨셉의 제품은 무엇보다 기능이 중요하다.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로 음악을 즐기는 인구가 전체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요즘이다. 우선 무선 블루투스는 기본이며 에어플레이도 대응한다. 이 외에 구글캐스트 및 스포티파이 커넥트, 타이달 커넥트에 대응하며 ROON 인증도 마쳤다. 기본적으로 UPnP 렌더러 기능을 하기 때문에 UPnP에 대응하는 스트리밍 서비스를 사용한다면 모두 이 스피커로 음원을 재생할 수 있다. 이 외에도 USB-C 및 미니 토스링크 광 입력 및 스테레오 아날로그 이력을 통해 24비트 음원 재생이 가능하다.
아무래도 오늘의 주인공은 엘립스였다. 가장 많은 곡들을 재생해주면서 여러 설명을 이어갔다. 고고 펭귄의 ‘Raven’을 재생하자 커다란 공간을 꽤 묵직하게 메워주었다. 이어 두아 리파의 ‘Break my heart’ 같은 대중적이면서 비트가 있는 곡들이 이어졌다. 이 외에도 파슬스의 ‘Overnight’, 자넬 모네의 ‘Make me feel’ 같은 곡들이 흘러나왔다. 일반 대중들을 위한 올인원 스피커지만 확실히 하이엔드 디지털 기술의 명가 메리디안의 사운드는 엘립스에서도 엿볼 수 있는 경험이었다. 말끔하고 유연하며 감상자를 편안하게 감싸는 사운드고 그리 차갑지 않는 디지털 사운드다.
다음은 정면 양 옆으로 세팅되어 있는 스피커다. 사실 처음부터 이 스피커가 궁금했던 것이 사실이다. 바로 메리디안의 스테레오 액티브 스피커 DSP9이다. 트위터와 미드레인지, 베이스 우퍼 드라이버 등 모두 멀티 웨이 구성으로 내부에 앰프를 내장하고 있으며 DAC로 탑재하고 있는 스테레오 액티브 스피커다. 메리디안 라인업에선 DSP8000XE와 함께 그들의 대표적인 하이엔드 액티브 스피커 모델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DSP9은 일단 트위터가 베릴륨 돔 타입이다. 한편 미드레인지 드라이버는 160mm 구경, 베이스 우퍼는 8인치 폴리프로필렌 우퍼로서 트위터는 한 발, 미드레인지도 한 발 등 두 개의 유닛을 전면 배플에 탑재하고 우퍼는 채널당 두 발씩 사이드 패널에 장착해놓고 있다. 액티브 스피커이므로 당연히 앰프를 내장하고 있다. 트위터엔 클래스 AB, 150와트(4옴) 앰프를, 미드레인지에도 역시 클래스 AB, 150와트(4옴) 앰프를 투입했다. 하지만 베이스 우퍼로 가면 양상이 다르다. 작은 사이즈에 대출력, 고효율을 낼 수 있는 클래스 D 증폭 앰프를 선택한 것. 클래스 D 앰프 네 대를 브릿지 시켜서 드라이빙하는 형태다. 저역과 초저역 우퍼를 각각 구동하는 것으로 각각 240와트 출력을 자랑한다.
DSP9 시연엔 메리디안 소스 기기를 별도로 연결해 시연하는 모습이었다. 첫 곡으로 이글스의 ‘Desperado’라는 친숙한 곡이 흘러나와 반가웠다. 요즘 일부 하이엔드 스피커처럼 너무 차갑고 음악을 모두 분해해놓은 듯한 편집증적인 소리가 아니라 편안하면서도 해상도 좋은 소리다. 이 외에 로드 스튜어트의 ‘Sometimes when we touch’가 넓은 공간을 상당히 부드럽게 감싸주었다. 이 외에 웅산의 ‘Love letters’, 사라 맥라클란의 ‘Angel’ 등 편안하게 휴식하면서 듣기 좋은 레퍼토리가 줄지어 공간을 적셨다. 마지막으로는 마이클 잭슨의 ‘Thriller’를 재생해주었다. 선곡 중 메리디안의 다이내믹스, 리듬감 등을 가장 여실히 보여준 음악으로 내장된 앰프와 스피커가 완벽한 호흡을 이루면서 우렁차면서 절도 넘치는 사운드를 들려주었다.
여기까지 들어보고는 밖으로 나서지 거실에 여러 그림과 조각들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가 영국 대사관임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예술 작품들이었다. 영국의 대표적인 작가들의 작품들이었는데 책에서 본 조각상이 하나 눈에 들어왔다. 다름아닌 헨리 무어의 청동 조각상이다. 영국 대사관은 예상과 달리 무척 편안하고 친숙한 분위기였고 특히 이러한 자국의 예술작품을 통해 자연스럽게 영국에 관심을 갖게 만드는 면이 있었다.
뜰로 나가니 두 대의 차가 마치 미션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나란히 주차되어 있었다. 하나는 기 K8, 또 하나는 SUV 차량인 EV9이다. 기아와 메리디안은 최근 몇 년간 메리디안과 협력을 맺어 여러 차량에 메리디안이 설계, 제작한 카오디오를 탑재하고 있다. 이 지점에선 사실 기아와 함께 현대 모비스의 존재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차량용 오디오는 일반적인 홈 오디오와 달리 내부가 매우 좁으며 그 좁은 공간에 여러 다양한 기구물들이 배치되어 있는 음향적으로 왜곡될 소지가 굉장히 많은 공간이다.
이 부분은 메리디안과 함께 소프트웨어로 상당 부분 해소하면서 음질적 완성도를 높인 모습이다. 예를 들어 일텔리큐, 호라인즈, 리큐 같은 특허 기술들이 그 주인공이다. 대사관저 안에서 들었던 엘립스나 DSP9 같은 경우도 베이스&스페이스, 프리큐, Q싱크 등 다양한 음향 보정 기술을 적용하고 있는데 같은 맥락이다. 이런 특허 기술들을 이미 오래 전에 개발해 놓았단 사실에서 메리디안의 기술력이 얼마나 진보적이었는지 새삼 놀랍다. 아무튼 두 대의 차량에서 다시 한 번 메리디안 사운드의 매력을 경험해보면서 정문을 빠져나왔다.
대사관은 수교를 맺은 국가에 머물러 있으면서 해당 국가의 일을 처리하고 외교활동을 하는 곳이다. 비자 등 여러 증명서 발급은 당연하고 자국민을 보호하는 일을 맡는다. 때로는 문화교류의 장이 되기도 한다. 담장 하나 사이로 영토가 바뀌는 이곳은 영국 대사관이다. 건물과 내부 인테리어 모두 지극히 영국적이다. 하지만 대사관 실내에서 묘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장면을 하나 발견했다. 메리디안 엘립스가 한국의 전통적인 가구 위에 놓여져 있었던 장면. 최신 테크놀로지가 집약된 엘립스가 오래 전 한국의 집 한편에 놓여있을 법한 가구 위에 전시된 장면은 많을 걸 생각하게 했다. 작지만 한국 안의 영국 영토에서 되레 우리네 생활공간보다 더 한국적인 모습을 마주친 것이다. 누가 상사이나 했을까? 종종 서로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것들끼리 만났을 때 무척 창의적인 시너지가 폭발한다. 메리디안 사운드가 세상을 더 짙게 물들이고 있었다.
글 : 오디오 평론가 코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