턴테이블을 처음 산 건 중학생 때였다. 시내에 나가 인켈 턴테이블을 사서 이고 지고 4km를 걸어왔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당시 책가방을 메고 대리점에 와서 “턴테이블 사겠습니다”라고 말하는 학생을 보던 매장 직원은 날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그때는 그저 LP를 듣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지금도 그때가 떠오른다. 마이클 잭슨, 메탈리카 등 당시 레코드샵 쇼윈도우에 걸려 있던 LP들이 얼마나 갖고 싶고 듣고 싶었는지.
성인이 되어 처음 부푼 꿈을 안고 들인 턴테이블은 테크닉스였다. 30만 원이면 중고로 살 수 있는 모델은 SL-1200MK2 같은 것들이었다. 하지만 진짜 감동을 준 건 역시 레가였다. 그중에서도 P3는 충격 그 자체였다. 어떻게 이렇게 얇고 단순해 보이는 바디에서 이토록 정갈하고 담백한 사운드가 나올 수 있는지. 역시 톤암의 힘이었다.

레가 P5
그 후로도 레가에 대한 애정은 전혀 식지 않았다. VPI나 토렌스 같은 더 화려한 디자인에 이름 있는 턴테이블을 써보다가도 결국 다시 레가로 돌아오곤 했다. 그만큼 비용 대비 소리가 좋았기 때문이다. 레가를 처음 만난 지 벌써 20년이 훌쩍 넘었는데, 25주년 기념 모델 P25도 기억에 남는다. 당시 거의 레퍼런스급인 RB600 톤암을 보너스처럼 달고 나와 가격 대비 정말 훌륭한 소리를 들려주었다. P5도 좋았다. 사실상 30주년 기념 모델이라고 볼 수 있는데, 톤암이 RB700으로 업그레이드되고 플린스 디자인도 한층 세련되어졌다. 지금도 그때 우드 플린스가 참 멋있었다고 종종 생각한다.
하지만 레가는 원래 톤암은 뛰어난 반면, 플린스와 발(피트)은 늘 약점으로 지적받아 왔다. 톤암이 그 약점들을 거의 다 커버할 만큼 성능이 뛰어난 건 맞지만, 그래도 한계는 있었다. 그래서 레가 덕분에 먹고사는 업체들이 정말 많았다. 교체가 비교적 쉬운 발은 물론이고, 모터 관련 액세서리까지 종류도 다양했다. 심지어 Origin Live처럼 레가 톤암을 개조해서 판매하기 시작한 브랜드가 나중에는 어엿한 턴테이블 제조사로 성장한 경우도 있었다. 해외 유명 메이커들 중에는 톤암을 자체 개발할 실력이 부족해서 아예 레가 OEM 톤암을 달고 나오는 곳도 많았고, 지금도 그렇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레가 업그레이드·개조 키트들이 시장에서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레가 스스로가 지적받던 약점들을 착실히 개선해 나갔기 때문이다. 예전 P5와 지금의 레가를 비교해보면 플린스 소재와 디자인부터 완전히 달라진 걸 알 수 있다. 이번에 테스트한 Planar 3 Eco Special만 봐도 과거 P3와는 뼈대 기본 구조를 제외하면 거의 같은 부분을 찾기 힘들 정도다.

우선 RB330 톤암은 파이프와 베어링 등 모든 면에서 예전 RB300과는 차원이 다르다. 나 역시 SME, REED 등 여러 하이엔드 톤암을 써봤지만, RB330은 가격을 떠나 진짜 좋은 톤암이다. 레가를 세계적인 브랜드로 만든 그 톤암의 현재 진행형이라고 할 만하다. 모터 성능도 크게 향상되었고, 발도 과거 그 물렁물렁한 고무 피트에 비하면 훨씬 단단해졌다. 하지만 가장 큰 변화는 단연 플린스다. 일반 Planar 3보다도 성능 향상에 가장 크게 기여한 부분인데, HLP(High Pressure Laminate) 코어에 알루미늄 스킨을 입힌 샌드위치 구조다. 만져보면 단단하고, 두드려보면 댐핑이 매우 잘 되어 있어 진동 감쇄가 확연히 좋아졌다.

톤암 축에서 플래터 센터까지 이어지는 더블 브레이스(Double Brace)는 정말 신의 한 수였다. 단순히 무거운 금속 플린스로 진동을 누르는 방식이 아니라, 구동계와 톤암 사이의 상호 간섭을 근본적으로 차단해 주는 구조다. 무겁고 거대한 플린스를 선호하는 일부 미국·독일 브랜드와는 완전히 다른 철학이다. 레가는 오히려 최대한 가볍고 작고 단순하게 만든다. 그 결과 겉보기엔 심플하기 그지없지만, 실제 소리를 들어보면 ‘작은 괴물’이라는 표현이 절로 나온다.

최근 Planar 3 Eco Special이 국내에 정식 수입되어 리뷰를 진행하게 되었는데, 들어보고 나서 너무 마음에 들어 공동구매까지 열게 되었다. 사실 테스트하면서 “이 정도면 음악 듣는 데 더 무엇이 필요한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현재 닥터 파이크트, 트랜스로터, 린 등 하이엔드 턴테이블 세 대를 운영하고 있는데 솔직히 조금 허탈할 정도다. 성능이 Planar 3RS에 근접하는 듯하며, Planar 3 스탠더드 버전보다는 확연히 좋다. 그런데 공동구매 가격이 워낙 착하게 나와서 깜짝 놀랐다. 50대 한정이라고 하니, 나도 하나 구입해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