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일본 여행을 갔을 때 그 곳의 공기는 뭔가 달랐다. 그리고 열차를 타고 숙소로 가던 사이 펼쳐지던 바깥 풍경은 소담하고 고요했다. 뭔가 떠들썩한 서울을 떠나 그리 오랜 시간 걸리지 않는 곳이지만 사뭇 다른 풍경과 독특한 분위기. 숙소에서 창물을 열고 창 밖 풍경을 바라보았을 때 담배를 꺼내 물을 수밖에 없었다. 어떤 작가의 흑백 풍경이 되살아난 듯했다.
동시에 음악이 하나 생각났다. 키스 자렛의 [Sun Beart Concerts]다. 이 녹음은 1976년 11일부터 18일까지 일본을 여행하면서 키스 자렛이 녹음한 것들을 빼곡히 담고 있다. ‘Sun Bear’라니? 투어 중 일본의 한 동물원에서 본 태양곰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 앨범에 애칭처럼 붙였다.
교토와 오사가 그리고 나고야와 도쿄, 삿포로. 그리고 다시 앙코르 공연까지 CD로는 여섯 매, LP로는 열 장으로 발매되었다. 1977년 11월에 [My Song]을 녹음했으니 약 1년 전 녹음이다. 그리고 솔로 피아노 녹음 중 가장 명반으로 회자되는 [Koln Concert]가 1975년 1월 녹음이니 약 3년간 얼마나 절정의 기량에 다다랐는지 알만하다.
앙코르 공연 외엔 수록곡이 곡당 기본 30분이 넘어가는 이 앨범은 그의 솔로 피아노의 정점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마치 흑백 사진 속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공허한 어느 도시 풍경, 낯선 도시에서 만나는 새로운 계절을 떠올리게 만든다. 때론 프랑스에서 때론 독일, 이탈리아 그리고 스위스에서 그는 그 도시에 몰입되어 그 장소만의 특별한 울림을 피아노에 오롯이 담아낸다.
오디오파일로서 흥미로운 건 녹음 엔지니어다. 다름 아닌 일본의 유명 평론가로서 아시아를 대표했던 오디오 평론가 스가노 오키히코가 녹음에 참여했다. 몇 년 전 8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지만 오디오는 물론 음악과 레코딩에 대한 날카로운 시각과 주관을 가졌던 인물. 단순한 테크니컬 라이터가 아닌 진정한 평론가였던 스가노의 손길이 담겨 있어 더욱 애정이 간다. 물론 만프레드 아히어의 프로듀싱은 두말할 나위 없겠지만. CD와 SACD 등으로 발매되었고 LP도 여러 차례 발매되어 구하기 어렵지 않으나 다시 들어보면 연주와 녹음 등 모든 면에서 대단한 오라가 뿜어나는 앨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