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트키
오디오는 마치 건축물을 설계하고 지어올리는 것 같은 일이다. 토목 공사에 이어 터를 파고 골조를 만든 후 전기와 수도를 넣는다. 외부 유리창 창호도 넣고 내/외부 마감을 하는 등등.각 분야 많을 인력이 투입되며 정확한 순서와 규칙 하에 체계적으로 마감한다. 그런 인고의 시간 후에 준공이란 말을 붙일 수 있다. 전기가 공급되고 물이 나오며 적절한 차양과 환기가 가능해 쾌적한 실내 환경이 마련된다. 어느 것 하나도 허투루 이뤄지는 것이 없다.
한낱 오디오에 무슨 거창하게 건축을 들먹이냐고 하지만 오디오도 나름의 순서와 규칙이 있다. 자신의 취향과 예산을 고려해 일단 스피커를 세우고 옆으로 앰프를 골라 매칭한다. 간단한 소스기기를 테스트 삼아 가지고 앰프를 여러 개 빌리거나 구입할 수 있다면 가장 좋다. 이후엔 어떤 음악 소스를 즐기는지에 따라 시디피, 턴테이블 또는 요즘 유행하는 네트워크 플레이어를 구입해 적용해본다. 여기서 흐트러지면 다시 앰프로 되돌아가 가장 좋은 매칭을 찾아본다.
마치 끊임없이 돌덩이를 산 위로 올리는 시지포스처럼 이 과정의 반복이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를 때가 있다. 정말 만족해서든 아니면 조금 지쳐서든 더 이상 스피커부터 소스기기까진 안정 국면으로 들어가는 시점이 오고야 만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다. 전원과 케이블 그리고 룸 튜닝까지 더해져야 완벽해질 수 있다. 여기서 케이블은 정말 마지막 끝단에 왔을 때 해보는 것이 좋다. 다른 것들이 완전하지 않은 상태에서 케이블로 끝장을 보겠다고 덤볐다간 나중에 다시 처음부터 사고 팔고 테스트하는 일을 두 번, 세 번 더 해야하는 번거로움을 맛보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 재미있는 일이 숨어 있다.
과장해서 표현하면 일종의 ‘치트키’ 같은 것이라고 할까? 물론 귀를 속이는 일은 아니다. 음식에서 마지막으로 적당한 간을 하고 양념을 치듯 케이블링으로 멋지게 마무리를 하는 것이다. 더 깊게 들어가면 케이블에서도 다양한 접근법이 나온다. 케이블 자작을 해본 사람이라면 그것은 단자가 될 수도 있고 어떤 이는 오디오용 전원 공사가 될 수도 있다. 이번 리뷰에선 그 중 가장 작은 단위의 케이블링이다. 바로 스피커에 사용하는 점퍼 케이블이다.
점퍼 케이블링의 묘미
먼저 싱글 와이어링만 지원하는 스피커를 사용하고 있다면 이 즈음에서 이 글은 지나쳐도 좋다. 왜냐하면 점퍼 케이블은 바이와이어링을 지원하는 스피커에서 싱글 와이어링용 스피커 케이블을 사용할 때 필요한 케이블이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실 바이와이어링을 지원하는 스피커엔 바이와이어링 또는 더 나아가 싱글 와이어링 케이블 두 조를 사용한 더블 런이 가장 이상적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스피커 케이블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앰프도 바이앰핑 세팅을 하는 것이 이상적이다.
이는 모두 역기전력과 관계가 있다. 마그넷과 코일로 이뤄진 스피커 유닛이 피스톤 운동을 하면서 본래 신호와 반대되는 역기전력을 발생시키는데 이는 주로 베이스 우퍼에서 발생해 고역으로 타고 올라가 음질을 훼손시킨다. 바이와이어링이나 더블 런 또는 극단적으로 바이앰핑 셋업을 하면 이 역기전력을 많은 부분 막아낼 수 있다. 하지만 일단 바이와이어링만 해도 일반적인 싱글 와이어링 케이블보다 훨씬 비싸다. 그래서 차선으로 사용하는 것이 바로 점퍼 케이블이다. 손가락 길이 정도의 케이블로 인입된 신호를 트위터나 베이스 우퍼 쪽으로 ‘점프’시키는 역할을 한다.
실텍 9세대 실버/골드 점퍼 케이블
최근 필자는 실텍 점퍼 케이블을 테스트해보았다. 이번 리뷰는 무척 반가울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미 380L 스피커케이블을 사용하고 있으며 동시에 점퍼 케이블은 아쉽게도 구형 330L을 사용 중이기 때문이다. 마음 속으로는 계속 스피커 케이블과 제짝으로 나온 신형 점퍼 케이블 조합을 완성해야겠다고 생각만 하다가 이래저래 자잘한 일에 치여 잊고 있던 차였다. 그리고 어느 날 380L을 비롯해 680L 그리고 최상위 880L까지 손에 넣게 되었다.
잠시 이번 9세대 실버/골드 도체를 활용한 클래식 레전드에 대해 짚고 넘어가자. 이전 라인업은 클래식 애니버서리로서 G7 도체를 사용했다. 사실 G7 도체만 해도 워낙 치열한 연구 끝에 개발해낸 도체기 때문에 나무랄 데 없는 성능을 보여주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그 완벽에 가까운 도체를 다시 한번 G9으로 진화시킬 수 있었을까? 필자는 직접 실텍의 CEO 에드윈과 인터뷰에서 질의를 한 적이 있는데 그만한 노력의 결실이라는 걸 이해할 수 있었다.
우선 이 스피커 케이블의 도체 G9을 탄생시키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우선 표면적을 기존 G7 대비 두 배 더 넓게 제작했고 이 덕분에 전도도 등 여러 측정 수치에서 약 2.5배 더 나은 결과치를 보여준다는 게 실텍의 설명이다. 도체는 물론 절연과 차폐 등 케이블에서 도체만큼 중요한 부분들에도 모두 대대적인 매스를 들이댔다. 덕분에 다이내믹스 폭은 더욱 넓어졌으며 반대로 신호 전송시 야기되는 디스토션은 극도로 낮추어 더 맑고 깨끗하면서 생생한 사운드를 내주는 데 공헌하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실제 380L 스피커 케이블은 나의 시스템에서 붙박이가 되었다.
청음
테스트는 기존에 쓰던 케이블 그리고 신형 세 개 케이블을 비교 시청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물론 상위 케이블로 올라갈수록 가격만큼 성능이 높아져 결국은 880L이 주요 테스트 대상이 되어버렸다. 테스트 시스템은 웨이버사 Wcore 및 마이트너 MA1 그리고 레가 RP10(Apheta2) 그리고 앰프는 프리마루나, 스피커는 베리티 오디오 Rienzi 등으로 이뤄진 세팅으로 진행했다.
음질적 차이는 금방 드러난다. 토널 밸런스를 완전히 바꾸는 것은 아니며 실텍의 사운드 스펙트럼은 그대로다. 하지만 수직 상승하는 면모가 보인다. 클레어 해밀의 ‘When I was a child’를 들어보면 보컬이 더 힘있고 호소력 짙게 들린다. 후방의 어쿠스틱 악기들이 더 입체적인 공간 안에서 연주하는 듯 앰비언스 표현도 상승한다. 한 음 한 음 더 짙고 명징하며 이 모든 것들의 기저엔 해상도 상승이란 반론할 수 없는 케이블 특성 향상이 존재한다고 밖에 설명할 길이 없어보인다. 첫 음부터 너무 다르니 약간 기운이 빠져버리는 면도 있다.
파우스토 메소렐라의 [알카트라즈 라이브] 중 ‘Sonatina Improvvisata D’inizio Estate’를 들어보면 확실히 정보량이 올라간 듯 풍부한 배음이 느껴진다. 또한 기타 현 끝단 울림까지 흐리거나 뭉게지 않고 모두 선명하게 표현해준다. 이런 능력은 과거 구형보다 확실히 비교되는 지점으로 모든 악기들의 발음이 명확해졌다고 느껴진다. 덕분에 이런 라이브 실황 녹음에서 박수 소리 등 주변 소음과 실제 악기 연주 사이에 분명한 거리가 생겼다. 분리도가 높아졌으나 온기는 그대로인 것은 놀랍다.
피니어스 뉴본 주니어의 ‘Harlem blues’에선 타건에 힘이 더 실린다. 가볍고 얕게 흩어지는 타건이 아니라 묵직하고 임팩트 있게 때리는 타건이다. 하지만 낮은 레벨의 음악 신호들도 살뜰하게 포착해낸다. 예를 들어 심벌은 더 높게 더 멀리 살아서 빛난다. 이런 특성들은 음악에 생동감을 더욱 더 부여해 마치 현장에 있는 듯한 싱싱한 무대를 나의 눈 앞에 펼쳐낸다. 빠르고 정교하지만 냉랭한 분위기로 일관하는 케이블에서 실텍 점퍼만 추가해도 이런 특성들은 다소 증가한다. 처음엔 테스트를 위해 음향에 집중하며 감탄했지만 조금만 지나도 음향이 아닌 음악에 빠져들게 만드는 힘이 있다.
마치 자신의 죽음을 예견이라도 한 듯 2019년 11월 미국 카네기 홀에서 펼친 마리스 얀손스의 브람스 교향곡 4번 교향곡.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과 함께 한 녹음에서 실텍 점퍼 케이블은 더 섬세하고 더 유연하게 음악 속으로 침잠하게 만들어준다. 880L 스피커 케이블은 아니지만 그 향취가 점퍼 케이블에서도 드러난다. 무대는 깊고 광활하며 절대 감상자를 향해 수선을 떨지 않고 세밀하고 또렷하게 악곡을 쌓아올린다. 특히 현악의 세심하며 명료한 터치는 이번 클래식 레전드에서도 변함이 없어 안심이다.
총평
더 높은 정보량을 통한 배음 표현력의 증가 그리고 그로 인해 높아진 각 악기들의 독자적 음색 표현. 더 나아가면 약음 포착 능력의 상승으로 인한 다이내믹스 표현 증가 등이 눈에 띈다. 더불어 밀도감, 음의 명료도 등 세세하게 따지고 들어가면 많은 것들이 바뀐다. 점퍼 케이블 하나가 만들어내는 작지만 작지 않은 변화들이 흥미롭다. 그리고 그것들은 사실 모두 G9이라는 도체로 모두 연결되어 있다.
이미 실텍 380L 스피커 케이블을 사용하고 있는 입장에서 내 시스템에 들어온 380L, 680L, 880L은 신형 클래식 레전드의 사운드 스펙트럼을 더욱 공고히 하는데 일조했다. 이전에 880L 스피커 케이블 리뷰 테스트를 진행하면서 상상했던 것들이 이제야 어느 정도 완성되고 있다는 느낌이다. 단순히 리뷰 때문만이 아니라 나의 시스템 튜닝의 마지막 조각을 맞추는 데 있어 이번 점퍼 케이블은 나의 오디오 라이프를 풍족하게 만들어주었다. 실텍 점퍼 케이블은 시스템 튜닝의 마지막 한 조각 같은 존재다.
글 : 오디오 평론가 코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