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음악은 사회, 역사적 토양의 거름을 먹고 자라난다. 사회 격변기나 이데올로기 등이 충돌한 때 비판적이며 파격적인 음악들이 튀어나오기도 한다. 한편 평화로운 나날의 태평성대가 지속될 땐 또 다른 창의적 컨텍스트 속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의 음악들이 자유롭게 활개 친다. 어쨌든 대중음악은 사회, 역사적 맥락 속에서 즉각적으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역동적으로 변화하고 움튼다.
강산에의 데뷔작 [Vol.0]도 지금 생각해보면 변화의 바람 속에서 잉태된 작품이다. 미국에선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고 소련 또한 해체 수순을 밟으면서 냉전시대의 종말을 고했던 시절이었다. 정치적 배경이 거의 없었던 빌 클린턴의 당선으로 새로운 시대에 대한 염원이 담겼다. 1990년대 초반 당시 나는 스콜피온즈의 [Crazy World]에 수록된 ‘Wind of change’를 흥얼거렸다. 당시엔 변화의 바람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국내에선 노태우 정부 말기 즈음이었던 것로 기억한다. 이후 최초의 문민정부 출정을 코앞에 둔 시점에 강산에의 데뷔작이 조용히 발매되었다. 1992년 초반엔 김현식의 ‘내 사랑 내 곁에’ 그리고 김완선의 ‘가장무도회’가 가요 톱텐을 장식하던 때였다. 그리고 신승훈의 ‘보이지 않는 사랑’을 흥얼거렸던 기억도 있다. 그러나 후반부로 가면서 서태지가 등장했고 김종서의 솔로 앨범, 넥스트의 데뷔작이 발매되면서 가요계에도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던 시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강산에의 데뷔작도 창의적인 음악들로 번뜩이고 있었다. ‘할아버지와 수박’, ‘라구요’ 등은 한국적인 정서를 포크 록에 실어 대중의 감성에 자연스레 녹아들었다. 달콤한 발라드와 무의미하게 쿵쾅거리는 댄스 뮤직 사이에서 진지하고 토속적인 가사와 포크 록이 결합한 음악이었다. 가식이 없었으며 솔직 담백하게 툭툭 내뱉는 노래는 기존 당시 가요와 다른 맥락 속에서 가슴에 스며들었다.
최근 이 앨범이 엘피로 재발매되었다는 소식이 기뻐 직접 들어보고 있는데 오리지널 커버 아트웍을 그대로 살리고 새롭게 마스터링해서 꽤 훌륭하게 뽑아낸 모습이다. 최근 재발매 가요 엘피들이 거의 팬시 상품화된 것과 대조적이다. 이전에 강산에의 [연어]는 최초 엘피 발매하면서 ‘One Step Process’ 방식으로 제작해 훌륭한 품질로 재발매했는데 이번에도 음질은 믿을 만하다.
우선 프리즘 사운드 및 독일 출신 토르센 셰프너라는 엔지니어에게 의뢰해 마스터링 및 래커 커팅을 거쳤다고 한다. 프레싱은 독일의 옵티멀에서 진행한 모습. 확실히 제작사가 엘피 제작에 있어 음질적으로 어떤 부분이 중요한지 제대로 알고 엔지니어 및 프레싱 회사를 선정, 진행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더불어 CD 버전과 다른 엘피 커버를 살리고 해설과 가사를 담은 인서트도 삽입해 놓았다. 개인적으론 커버도 팁-온 슬리브로 만들었으면 금상첨화였을 것 같지만 음반 자체 퀄리티는 재발매치곤 만족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