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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치 않는 클래식

레가 Planar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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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완전한 매혹

어떤 ‘완벽함’에 매료되는 이들이 있다. 인물이나 물건 또는 어떤 지고의 예술 작품들이나 완벽한 것을 찾는다. 그리고 그것에 한번 매혹된 이후엔 그 모든 것에 위대한 가치를 덧대어 칭송한다. 이론적으로 완벽한 것은 있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사실 우리가 살고 있는 실체는 남루하기 그지없다. 그래서인지 이 세상 것이 아닌 것 같은 그 위대한 ‘완벽’을 만들려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종종 오히려 완벽하지 못한 것들에 끌릴 때가 있다. 불완전하며 어딘가 갸우뚱 기울어져 있고 뒤틀려 있는 것들. 표면이 거칠고 구부러져 있으면 닳고 해져 그 모양이나 표면 질감만큼이나 모순적인 것들이다. 가만히 보면 그 모순과 균열 속에도 마치 우주의 섭리와 균형 감각이 완벽하게 조화되어 있는 장면을 보곤 한다. 가시를 잔뜩 품고 있는 장미처럼 또는 온 몸을 마치 철갑처럼 가시로 잔뜩 두르고선 배를 불뚝 내민 복어처럼. 그러나 장미는 아름답고 복어는 맛있는 살로 종종 나의 숙취를 책임져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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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뭇 완벽해 보이는 디지털 음원으로 반세기가 훌쩍 넘은 음원을 완벽 복원해냈다는 홍보 문구에 속아 산 시디가 꽤 많았다. 오리지널 아날로그 레코딩을 다시 마스터링 했다고 해서 들어보았지만 오래 전 단 돈 5천원에 구입했던 철지난 라이센스나 엘피보다 못한 적도 꽤 있었다. 종종 세월을 못 이기고 모서리가 터지고 재킷 표면은 쭈그러진 엘피들을 보면 지금도 눈망울이 커진다.

해지고 닳고 엘피엔 눈에 보일만큼 상처가 났지만 실제 들어오면 최근 발매된 재발매 엘피 그 어떤 버전보다도 음질이 좋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런 음질에 버금가는 재발매 엘피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훨씬 더 많은 비용을 지출해야한다. 세월을 못이긴 그 해지고 거칠어진 불완전한 것들 속엔 세월을 가로지른 생생한 음악이 소릿골을 따라 오롯이 저장되어 있음이 놀랍고 신기하다. 완벽한 오리지널 아날로그 녹음의 음질에 대한 욕구가 때론 불완전하고 값싼 것들에 숨어 있기도 하다.

planar 8 hero 02

레가

레가를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이 단순하고 뭔가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심플함 속에 완전한 아날로그가 숨 쉬고 있다. 약 20여년 전 처음 레가 턴테이블을 들였을 때가 지금도 생생하다. 그저 작고 간단한 턴테이블을 구하다가 마주친 레가였다. 그 전에 테크닉스 같은, 저렴해도 묵직한 무게와 든든한 덩치를 가진 턴테이블을 사용하다가 레가를 보니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Planar 1, 2, 3까지 모두 그랬고 25주년 Planar 25도 조금 나아지긴 했지만 얇은 나무판 하나 더해진 게 전부였다.

지금은 그래도 무척 세련된 디자인과 고품질 합성 플라스틱 소재 그리고 번뜩이는 톤암이 레가 라는 브랜드의 체신을 살려주고 있다. 놀라운 건 그렇게도 볼품 없어 보이는 레가 턴테이블에서 쏟아지는 질 좋은 사운드였다. 아주 간단해서 더 이상 뭔가 만져볼 것도 없고 오디오 마니아들이 좋아하는 튜닝도 해볼 것이 별로 없는 텅 빈 듯 한 몸체. 하지만 가는 톤암을 올리면 자신의 진수는 소리에 있고 이 모든 디자인은 바로 이 소리를 위해서 모두 희생한 대가라는 듯 풍부한 아날로그 사운드를 유유히 뿜어냈다.

planar 8 gallery 02

내력과 외력의 싸움 속에서

Planar 8은 레가의 설계 의도가 정확히 구현된 제품임에 틀림없다. 마치 날렵한 스포츠카 같은 플린스 위로 속이 어둡게 투영되는 유리 플래터가 유유히 회전한다. 하지만 무게는 매우 가볍다. 최근 미국이나 독일 등의 브랜드들이 무겁게 만들어 공진을 줄이고 있지만 진동에 대한 레가의 입장은 그 반대다. 질량이 높으면 그 에너지를 저장하고 또 그 에너지가 손실되면 음악도 손실된다는 것. 따라서 최대한 경량으로 만들려 노력한다. 대신 강도를 최대한 높이려는 노력을 지속해왔다. 결국 Planar 8에 와서 Tancast 8 폴리우레탄 폼을 폴라리스 고압 래미네이트 사이에 끼워 플린스를 제작해냈다.

베어링도 최대한 낮은 질량을 유지하려 애쓰고 있는 모습. 황동 하우징과 알루미늄으로 만든 서브 플래터는 작고 가볍지만 매우 정교하게 가공되어 있다. 이 서브 플래터의 가공 정밀도는 실로 대단해서 오일을 교체한 후 스핀들 홀에 꼽을 경우 오일이 틈으로 전혀 새지 않는다. 따라서 오일 교체시 아주 적당량의 오일만 주입해야 할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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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터는 유리 플래터로서 평범해 보일지 모르지만 부드럽게 깎아지른 디자인 안에 숨은 비밀이 있다. 외측은 두텁고 내측은 얇게 가공해 놓은 것. 단순히 멋있어 보이려는 것이 아니다. 강성과 질량을 희생하지 않으면서 최대한 관성 모멘트를 높게 끌어올리려는 영민한 설계다. 이른바 ‘플라이휠 효과’를 노린 것. 요즘엔 짐 콜린스 교수가 아마존의 베조스 회장에게 조언을 주면서 한 말로 유명한데 사실은 일종의 관성으로 인한 가속도를 의미하는 물리학 용어다. 게다가 Planar 8에 사용하는 유리 플래터는 하위 모델과 달리 필킹톤과 함께 만든 고품질의 유리 세 장을 압착해 샌드위치 구조를 띄고 있다. 옆에서 보면 확인도 가능하다.

모터 그리고 메인 베어링에서 아주 조금이라도 생길 수 있는 소음도 톤암에 전이되면 그것은 음질을 훼손한다. 대개 이를 위해 무거운 베이스 하나로 해결하거나 톤암 베이스를 플린스와 물리적으로 디커플링 시키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레가는 플린스의 무게를 증가시키지 않으면서 이를 해결하고 있다. 바로 메인 베어링과 톤암 사이 플린스에 두 겹의 페놀 수지를 결합해 강도를 극대화하고 있다. 이는 톤암과 메인 베어링 축 사이에 응력(재료에 압축, 인장, 굽힘, 비틀림 등의 하중(외력)을 가했을 때, 그 크기에 대응하여 재료 내에 생기는 저항력)을 높이고 에너지의 흡수와 방출로 인한 진동을 최소화시켜준다.

모터는 아주 간단하다. 저소음의 모터 어셈블리는 외부 플래터를 걷어내면 서브 플래터 바로 옆에 배치되어 있고 24V 동기식 저 진동 모터를 사용한다. 대개 모터의 진동이 플래터로 전이되는 것을 막기 위해 모터를 본체와 분리시키지만 레가는 한 몸체 안에 넣고 대신 모터는 저진동, 저소음에 역시 가벼운 것을 사용한다. 더불어 벨트 같은 경우도 45년간 그 균질한 두께와 탄성을 위해 노력한 결과 거의 공차가 없는 레퍼런스 EBLT 벨트를 개발해 채용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내력과 외력의 싸움을 최소한의 질량 그리고 매우 높은 강도, 응력으로 해결하고 있는 모습. 전 세계 턴테이블 메이커 중에서도 가장 과학적이면서 그 해석과 응용 면에선 독보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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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업 & 시청

카트리지는 Ania Pro를 사용했고 역시 RB880에 장착했다. 레가는 톤암으로 일어선 메이커이기 때문에 톤암에 대해선 그 성능에 의구심이 거의 없다. 개인적으로도 레가 톤암은 거의 대부분 사용해보았는데 그 미니멀 디자인 속에서 뿜어내는 트래킹 능력은 감탄스럽다. 게다가 세팅도 아주 쉽고 특히 다이내믹 밸런스 톤암은 거친 들판을 유연하게 달려가는 오프로드 자동차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필자의 경우 내부 포노 케이블만 좀 더 상위 모델로 업그레이드하고 싶은 욕구가 가끔 스멀스멀 올라오곤 하는데 이 외엔 불만이 없다.

shelby

셸비 린의 ‘Just a little lovin’ 같은 곡에서 그녀의 목소리는 아주 크지도 않은 크기의 음상을 드러낸다. 앞으로 튀어나오지 않고 후방에 둥글고 자연스러운 포커싱으로 맺힌다. 이 엘피의 경우 미국의 QRP에서 제작한 것으로 SACD로도 출시되었는데 게인이 LP 쪽이 좀 더 마음에 든다. 테스트한 시스템이 베리티오디오 Rienzi와 프리마루나 EVO400 그리고 패러사운드 Zphono XRM임을 감안할 때 무척 풍부한 잔향과 편안하고 차분한 대역 균형감을 보여주는 소리다. 볼륨은 9시에서 10시만 해도 충분했다.

sonny

전체적인 사운드의 질감 표현은 모니터 스피커 같은 스타일은 아니만 한 쪽으로 지나치게 기울어 착색된 소리는 아니다. 또한 시간축 특성, 예를 들어 리듬감이나 페이스, 타이밍 측면에서도 아주 냉정하고 가파른 어택, 서스테인이 아니라 조금은 온화하면서 묵직한 느낌이 다분하다. 예를 들어 소니 롤린스의 ‘St. thomas’를 들어보면 더블베이스와 드럼 등 리듬파트가 묵직하고 힘차게 추진한다. 한편 색소폰은 풍부한 배음 특성과 적당한 잔향 시간을 통해 음향 뿐 아니라 음악적 뉘앙스를 최대한 살려낸다. 확실히 진한 중역대는 레가의 트레이드마크라 할만하다.

dire

같은 엘피지만 턴테이블, 톤암 그리고 카트리지에 따라 매우 예민하게 그 소리가 변한다. 하지만 레가는 그리 까탈스럽지 않다. 톤암을 바꿔보진 않았지만 경험상 카트리지를 바꾸어도 레가 사운드의 큰 틀이 완전히 바뀌지 않는다. 소리도 그렇다. 예를 들어 다이어 스트레이츠의 ‘Money for nothing’은 시작 부분에서 약간 긴장하게 만드는 면이 있다. 하지만 레가는 회사에서의 긴장은 잠시 내려놓고 맥주 한 잔 해도 좋다고 친근하게 말을 건네는 듯하다. 예리하게 가슴을 파고 들거나 머리를 쭈뼛하게 만들기 보단 낼 소리는 다 내주면서도 감상자를 편안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heifetz

클래식 레코딩을 들어보면 Ania Pro MC 카트리지의 성능이 제대로 발휘되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리빙 스테레오 녹음 중 야사 하이페츠와 시카고 심포니가 함께 한 시벨리우스 바이올린 협주곡을 들어보면 약간 피곤하게 느껴질 수 있는 바이올린도 부드럽고 진하게 뽑아낸다. 편안하면서도 하이페츠의 바이올린 특유의 음색을 농도 짙게 표현해준다. 이런 중, 고역 밸런스는 오토폰이나 다이나벡터, 라이라 같은 소리와도 다르다. 오히려 벤즈 마이크로와 유사하다. 올라운더로서 팝부터 재즈, 클래시컬 음악까지 균형을 잃지 않고 자신의 방식대로 굳건하게 밀고 나가는 뚝심이 느껴진다.

ania pro 3

총평

오랫동안 간직했던 만년필, 세월이 변해도 오롯이 그 탄력과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안경테 한 점, 레가도 비슷하다. 유행을 타지 않은 클래식이란 이런 것이다. 한 때 화려한 이미지로 세상을 놀라게 했다가 몇 해만 지나도 누추해지고 촌스럽게 느껴지는 제품을 우리는 많이 보아왔다. 레가는 아주 간단한 몸체 위에서 엘피가 기록해놓은 음악의 세월을 오롯이 긁어내고 있다. 그것에만 충실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그 단순해 보이는 구조 안엔 레가가 꿋꿋이 지켜오고 진화시켜온 과학이 숨어 있었다. 불완전에 대한 매혹의 기저엔 완벽에 대한 갈망과 R&D가 있었다.

글 : 오디오 평론가 코난

TECHNICAL SPECIFICATIONS

Selectable Speed
33 1/3 rpm, 45 rpm

Planar 8 Turntable Dimensions (with dustcover fitted) (W x H x D)
420 x 125 x 315 mm

Neo PSU Dimensions (W x H x D)
180 x 50 x 155 mm

Turntable Weight
​4.2 kg

Neo PSU Weight
0.6 kg

Written by 코난

코난 이장호는 하이파이 오디오를 평가하는 평론가다. <고음질 명반 가이드북 1,2> 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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