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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노앰프의 모범

베르테르 어쿠스틱스 PHONO-1 MKII

vertere phono side

아날로그의 끝단

엘피를 플래터에 얹고 살금살금 카트리지를 엘피 위에 놓는다. 음악이 시작하는 시간이다. “엘피를 듣는 일이란 그저 계속해서 플래터를 돌리는 일일 뿐이다”라고 호기롭게 이야기하곤 하지만 사실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걸 조금만 운용해보면 알 수 있다. 그저 모든 것들, 심지어 카트리지도 기본으로 장착되어 있고 포노앰프도 내장되어 있다면 다행이다. 하지만 이렇게 애피타이저부터 디저트까지 알아서 척척 준비되어 나오는 코스가 아니라 하나하나 신경 써서 고르고 매칭을 고민해야한다면? 그 때부턴 약간 머리가 아파온다. 진지한 하이파이 아날로그 마니아들의 세계로 온 걸 환영(?)한다.

miles giles

턴테이블을 고르고 톤암의 종류에 걸맞은 카트리지를 고를 때만 해도 마냥 행복한 시간이다. 하지만 그 카트리지와 잘 맞는 포노앰프를 고르기란 쉽지 않다. 물론 요즘엔 MM, MC 카트리지에 모두 대응하며 충분한 게인을 가진 포노앰프들을 합리적인 가격대에 구할 수 있다. 그러나 소리란 그렇게 게인만 확보된다고 좋은 소리를 내진 않는다. 여기에 취향까지 변수로 가세하면 경우의 수는 그만큼 커지고 잘못하면 결정 장애에 빠지기 일쑤다.

그래서 포노앰프를 고르는 일은 아날로그의 화룡점정이 될 수 있는데 일단 시중에 수많은 포노앰프 중 하나하나 제외해나가는 방법도 좋다. 합리적인 가격대에서 편리하게 앰프 하나로 해결하고 싶다면 승압트랜스는 일단 제외하자. 저렴한 것들은 거기서 거기고 좋은 소릴 내는 것들은 빈티지 기기들이라 보편적으로 누구나 좋아할지 미지수다. 그렇다면 대중적인 헤드앰프 방식이 좋을 것이다. 당장 필요하지 않더라도 MC 카트리지에 대응하면 좋고 그렇다면 로딩 임피던스 및 다양한 게인 조정이 가능한 것을 고르자. 일단 여기까지 이해 가능하다면 성공. 다음 차례를 브랜드를 선택하는 것이다.

vertere phono 1 3

베르테르의 승부수

최근 이런 조건에 부합하는 포노앰프가 하나 나왔다. 브랜드는 젊은 시절 한번 즈음은 읽어봤음직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바로 그 베르테르다. 국내에선 사실 케이블로 인기를 끌었지만 베르테르는 그 이름처럼 낭만적인 아날로그 전문가 집단이다. 이미 여러 턴테이블을 개발해 해외에선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뿐만 아니라 톤암은 물론 최근엔 카트리지까지 출시하면서 저력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이들을 추종하는 사람들 중에 비틀즈의 다섯 번째 멤버로 불리든 조지 마틴의 아들 자일스 마틴이 있다는 건 전혀 우연이 아니다. 게다가 애비로드 스튜디오의 커팅 엔지니어이자 하프 스피드 마스터 커팅을 유명한 마일스 쇼웰도 베르테르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내고 있다.

이 정도면 베르테르의 성능에 대해선 믿음이 가는 정도를 넘어서 환상이 생긴다. 그러나 아날로그 시스템을 이루는 여러 구성 요소 중 베르테르가 정복하지 못한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포노앰프다. 아날로그 전문 메이커라면 포노앰프까지 제대로 만들 줄 알아야한다. 린, 레가 등 같은 영국의 다른 메이커들처럼 말이다. 그리고 이 상상이 끝나지도 않았을 무렵 베르테르가 포노앰프를 출시한다는 이야기가 해외 웹진에서 들려왔다. 드디어 베르테르가 아날로그 시스템의 끝단 포노앰프에 승부수를 던진 것이다.

vertere phono internals

PHONO-1 MKII

베르테르가 던진 승부수는 PHONO-1 MKII라는 포노앰프로 귀결되었다. 그리고 최근 테스트해볼 기회를 얻었는데 포장을 제거하자 하프 사이즈의, 약간 볼품없어 보이는 몸체가 드러났다. 정말 꼭 써야할 정도의 섀시만 만들어 조립한 듯한 모습. 내부도 마찬가지다. 철저히 써야할 부품만 써서 꼭 지켜야하는 물리적, 전기적 조건에 충실하게 제작한 모습이다. 역시 베르테르에게 뭔가 화려한 것을 기대한 것은 무리였다.

PH12inside23n

그러나 내부 설계 및 기능을 살펴보면서 역시 베르테르의 비범함이 전해져오기 시작했다. 우선 기판 자체를 오디오 신호가 흐르는 PCB와 전원부 회로를 완전히 분리해놓았다. 오디오 신호에 영향을 주는 상호 간섭을 회피하려는 설계로 옆에 칸막이까지 동원해 분리시켰다. 제조사의 설명을 살펴보니 스테인리스 스틸을 사용, 이중 차폐를 강조하고 있다.

포노앰프라는 것이 어찌 보면 단순한 기능을 갖지만 자세히 보면 또 하나의 작은 세계다. 아주 작은 신호를 수백, 수천 배 증폭을 통해 메인 앰프의 라인 입력 단으로 건네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아주 작은 노이즈도 문제가 되는 경우가 많다. 베르테르는 일단 전원부와 신호 증폭부의 회로를 최대한 분리 설계해 간섭을 줄였고 정확한 RIAA 회로 구성을 위해 엄격한 허용 오차 안에서 소자를 선별, 사용한 모습이다. 심지어 기기 사이 상이한 접지방식 때문에 유도될 수 있는 험을 없앨 수 있도록 세 개의 접지방식을 마련해놓았을 정도다.

setting

기능적으로 이 포노앰프는 대단히 훌륭하다. 입력단과 출력 단은 단 한 조씩만 지원하지만 MM과 MC 카트리지에 대해 광범위한 세팅을 적용할 수 있다. 일단 게인의 경우 좌/우 채널 각각에 대해 14개 세팅이 가능하다. 더불어 6.4dB를 추가할 수 있는 ‘하이 게인’ 옵션 버전을 선택하면 0.2mV 미만의 매우 낮은 저출력 MC 카트리지까지 대응 가능하다. 일반 버전은 40.2dB부터 62.8dB, 하이 게인 옵션 버전은 46.6dB부터 69.2dB까지 세팅할 수 있다.

입력 임피던스 또한 다양하게 세팅 가능하다. MM의 경우 47kH 옴에 맞추면 되지만 MC 카트리지의 경우 제조사, 모델마다 다양하기 때문이 반드시 필요한데 MC에 대해선 14개 세팅 값이 마련되어 있어 이 중에서 선택해 세팅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커패시턴스에 대해서도 다양한 세팅이 가능하다. MM의 경우 100pF, 430pF 등 두 개 값을 지원하며 특이하게도 MC에 대해서도 총 7개 세팅 값을 지원하고 있다. 출고시 기본 세팅 값은 베르테르의 MC 카트리지인 Mystic에 최적화된 1.4K옴/430pF로 조정되어 있으니 처음 제품을 개봉하면 이를 다시 세팅해 주어야한다.

vertere phono rear

셋업

테스트는 평소 듣던 트랜스로터 대신 최근 들어 자주 듣고 있는 레가 턴테이블을 활용했다. 레가 RP10 턴테이블에 톤암도 레가 RB2000 다이내믹 밸런스 톤암 구성이며 별도의 트윅은 없는 상태다. 카트리지도 역시 레가 Apheta 2를 사용했다. 포노앰프는 서덜랜드 PHD와 패러사운드 Zphono XRM 두 대를 번갈아 사용하곤 하는데 이번엔 베르테르 PHONO-1 MKII를 적용해 비교해보았다.

액세서리는 몇 종 사용했는데 모두 카본 나노텍을 사용한 아츠 오브 오디오의 아이솔레이션 플랫폼 그리고 다양한 종류의 스테빌라이저들이다. 이 외에 스피커 같은 경우 베리티오디오 Rienzi, 앰프는 프리마루나 EVO400을 사용했다. 출력이 0.35mV인 저출력 MC 카트리지로서 로딩 임피던스는 100옴을 요구하는 카트리지로서 베르테르 카트리지에서 모두 대응 가능했다.

Apheta 3 side view on arm 1

게인은 디폴트 56.4dB 세팅에 하이 게인 버전이라서 자동으로 6.4dB를 더해 62.8dB를 얻을 수 있었다. 더 높일 수도 있었지만 나의 시스템에선 이 정도가 적합했다. 이는 개인 시스템이나 듣는 환경에 따라 다를 수 있으니 테스트해본 후 자신에게 맞는 값을 찾길 바란다. 한편 MC 카트리지에 대한 커패시턴스 조정도 가능한데 1000pF를 요구하는 레가 MC 카트리지에 꼭 맞는 값은 찾을 수 없어 가장 가까운 값인 430pF 디폴트 세팅에서 테스트했다. 기왕 커패시턴스 값을 조정할 수 있게 만들 거라면 1000pF 커패시턴스 정도는 마련해놓았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청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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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테르 포노앰프는 진작 접해보았던 그들의 카트리지와 유사한 사운드 스펙트럼 위에 놓여있다. 일단 배경이 무척 정숙한 편이다. SN비가 어느 정도인지 숫자로 표기되어 있지 않지만 마치 새벽녘 눈이 소복이 쌓인 길을 처음 걸으면서 발자국을 내는 기분이다. 예를 들어 주디 실의 [Heart Food] 앨범 사이드 A를 죽 들어보면 처음부터 깨끗한 배경 위로 보컬은 물론이고 여타 악기들이 사실적으로 분리되어 들린다. 전체적인 음조의 균형은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어느 틈으로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고 평탄하며 동시에 단단하다.

dire

이번엔 베르테르 어쿠스틱스의 기기를 아주 좋아하며 직접 사용하는 엔지니어의 작품을 감상해보기로 했다. 바로 커팅 엔지니어 마일스 쇼웰이다. 이른바 하프-스피드 마스터링을 고집하는 몇 안 되는 현존 커팅 엔지니어다. 그가 작업한 다이어 스트레이츠의 [Brother In Arms] 중 ‘Money for nothing’ 같은 곡을 들어보면 아주 편안하게 소리를 뽑아낸다. 볼륨을 올려도 다이내믹스가 훼손되어 거칠거나 시끄럽지 않다. 전형적으로 잘 만든 포노앰프의 특성으로 자꾸 볼륨을 올리게 만든다.

sibelius

그만큼 다이내믹 헤드룸이 넓어 쥐어짜는 느낌이 없다는 방증인데 작은 범위의 마이크로 다이내믹스는 물론 큰 범위에 걸친 매크로 다이내믹스 표현까지 거침이 없다. 최근 감명 깊게 들었던 시벨리우스 트리오의 앨범 중 [Fire & Fancy]를 꺼내들었다. 레가 PSU에서 45rpm 버튼을 누르고 기다리자 이슬처럼 맑은 피아노 사운드가 귀에 들어온다. 더불어 현악들의 스타카토가 매우 정교한 타이밍으로 펼쳐진다. 소리의 결 자체는 단단하면서 정교하지만 날선 분위기는 아니다. 오히려 음색 자체는 담백하다. 한편 빠른 스피드와 정확한 강, 약 표현 덕분에 충분한 실체감을 얻어냈다.

milstein

일단 베르테르 포노앰프를 시스템에 투입하면 뭔가 강하게 어필하는 부분도 없으나 그 대신 뭔가 거슬리는 부분도 없다. 일부 진공관 앰프나 트랜지스터를 가리지 않고 디지털과 구분 짓기 위해 심한 착색을 즐기는 분들도 있지만 그런 포노앰프의 심각한 단점은 금세 질려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나단 밀슈타인의 [Masterpieces]를 들어보면 아주 단아하고 곱고 단단한 현악이 일체의 흔들림 없이 균형 있게 펼쳐진다. 정확한 피치를 바탕으로 고결한 느낌까지 받을 만큼 밀도 높으면서 활시위처럼 팽팽하게 당겨 있는 사운드를 유감없이 펼쳐낸다.

vertere phono 1 5

총평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베르테르는 처음 들을 땐 약간 증류수 같은 무미건조한 소리로 들리다가 계속 며칠간 듣다보면 그 소리에 그만 빠져버린다. 그리곤 계속해서 음악을 깊게 음미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여서 그 이유가 무엇일지 나조차도 궁금해졌다. 나의 사유는 그것이 매우 뛰어난 밸런스와 함께 실제 엘피의 소릿골 속에 저장된 소리의 진실을 들려주기 때문이라는, 매우 평범한 결론에 도달했다.

소리를 보다 세밀하게 표현해 주어야하는 리뷰어 입장에선 정말 어이없을 정도로 간편한 표현으로서 일단락 지어진 셈. 하지만 그것만이 가장 적확하고 명료한 표현이다. 특히 기음과 배음의 조화와 악기 간의 충분한 거리감은 음악에서 조화와 균형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된다. 더불어 볼륨을 키워도 산만하거나 스트레스를 주는 일이 거의 없었다. 엘피 표면의 상태만 좋다면 녹음 자체가 좀 떨어지는 엘피도 충분히 즐길만한 조건을 만들어주었다.

베르테르가 알려준 음악의 진실은 무척 진솔하고 평탄하며 한편으로 체계적이고 치밀하다. 포노앰프가 뭔가 자신을 화려하게 빛나고 싶어 한다면 다른 걸 알아봐라.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묵묵히 정직하게 자신의 일을 해내는 모범적인 포노앰프를 원한다면 PHONO-1 MKII는 절대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글 : 오디오 평론가 코난

Technical Specifications

Type
MC/MM Preamplifier
Main Phono Circuit on Separate Gold Plated PCB

Power Supply
Linear, Int. Switchable
Transformer on Separate Gold Plated PCB

Gain Settings
40.2dB to 62.8dB
In 12 Steps – See Manual
High Gain version – Add 6.4dB to all settings

Input Impedance Settings Resistance
47k for MM
78R to 47K for MC – in 14 Steps – See Manual
100pF & 470pF for MM

Capacitance
100pF to 1.02uF for MC – In 9 Steps – See Manual
20Hz – 20kHz

Frequency Response +/- 0.2dB
Noise < -78dB – AWD
THD-N 0.03%

Finish Front Panel Options
Vertere Orange, Silver, Black

Dimensions 210 x 235 x 55mm
Weight W x D x H (Incl. Switches & Feet) 2.00Kg

제조사 : 베르테르 어쿠스틱스 (www.vertereacoustics.com)
공식 수입원 : 반오디오 (http://bannaudio.com)
공식 소비자 가격 : 1,980,000원

Written by 코난

코난 이장호는 하이파이 오디오를 평가하는 평론가다. <고음질 명반 가이드북 1,2> 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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