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파이 오디오의 세계엔 두 가지 부류의 사람이 있다. 케이블의 효용을 믿는 자, 그리고 그 효용을 믿지 않는 자들이다. 고백하자면 나 같은 경우 전자인 동시에 오디오 평론가로, 케이블 관련 글을 쓰면 종종 케이블 무신론자들에게 공격의 대상이 되곤 한다. 실제로 몇만 원짜리부터 시작해 케이블의 차이를 실감한 현재는 수백만 원대 케이블을 사용하기도 하는 나로서는 답답한 노릇이다. 음악을 좋아하고 오디오도 조금 하는 친구마저도 이해를 해주지 않는 건 마찬가지다.
야, 누가 전깃줄에 200을 태워? 그 돈으로 차라리 스피커 업그레이드를 해.
케이블이 아무리 좋아도 한계는 분명한 거 아니냐?
그들의 의견은 너무나 단순하기 그지없다. 명품 옷도 아니고 자동차도 아닌, 정말 아무 쓸모도 없어 보이는 케이블(그들 말로는 ‘전깃줄’)에 돈을 낭비하느냐는 거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도 하이파이 케이블 옹호론자들은 공격의 대상이 되기 일쑤다. 그래 솔직히 얘기해보자. 이건 답답한 걸 넘어서 억울한 일이다.
내가 케이블에 꽂히게 된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오디오 애호가, 즉 오디오파일이 아닌 사람들은 오디오파일이 나만의 오디오를 ‘창조’해낸다고 하면 의아해할 것이다. 어차피 상용 제품을 매칭하는 데 그 소리가 얼마나 크게 달라지겠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어떤 소스 기기에 어떤 앰프와 어떤 스피커를 매칭하느냐에 따라 사운드는 북한과 남한만큼 달라지기 마련이다. 처음 오디오에 빠졌던 나 역시 고심에 고심을 한 끝에 ‘나만의 오디오’를 완성했다.
덴마크 다인오디오의 스피커를 처음 들였을 때였다. 마치 코트를 사는 건 그에 맞는 팬츠와 슈즈를 찾기 위한 여행의 시작이듯, 스피커에 맞는 앰프를 찾는 여정으로 오랜 시간을 고민했다. 여러 앰프들을 고민하다가 들인 것이 프라이메어였는데 음색은 아주 곱고 차분해서 좋았지만 윤곽이 너무 없고 저역이 퍼졌다. 이후 여러 앰프들이 들락날락했다. 그러다가 찾은 것이 나드 S300이라는 앰프였다. 확실히 이 앰프에 물리니 다인오디오 스피커의 중·저역이 두툼하게 뿜어져 나왔고 그 밸런스가 좋았다. 자극적이었던 고역이 차분해졌고 윤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남들과 다른, 나만의 특별한 오디오였다. 그렇게 믿었다.
그런 내가 ‘나만의 것’이 얼마나 만들기 힘든지 체감한 건 처음 동호회에 나가서였다. 막상 동호회에 가보니, 사람 생각이 다 거기서 거기라고, 모인 사람들이 가진 오디오 대부분이 비슷한 브랜드의 비슷한 기기들로 꾸며져 있었다. 당연히 사운드도 고만고만했다. 나름 독창적인 오디오 시스템으로 나만의 소리를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남들도 다 아는 평범한 소리에 불과했다. 나는 절망했다.
그때 나를 구원한 것이 바로 케이블이다. 어느 때부턴가 고역이 마음에 안 들어 고민하다가 점퍼 케이블을 바꾸어보았다. 실버·골드 도체를 사용한 실텍 케이블이었다. 기껏해야 젓가락 정도 길이의 케이블이었지만 소리의 변화는 예상했던 것보다 컸다. 그런데 문제는 저역이 약간 풀어지는 것이었다. 재미를 붙인 나는 아예 스피커 케이블을 통째로 바꾸었다. 킴버사의 케이블인 모노클을 체결하자 부밍이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깊고 타이트한 저역이 가슴을 때렸다.
그것은 마치 사막을 헤매던 사울에게 나타난 신의 부르심과도 같았다. 왜 우리는 오디오에 빠지는가? 사실 오디오 애호가에게 매칭이 재미의 거의 전부가 아닌가? 소스 기기에서 시작된 파형이 앰프 그리고 스피커를 거치며 내가 원하는 소리로 흘러나오는지를 살피는 그 재미 말이다. 그런데 왜 그동안 나는 그 파형을 전달하는 케이블의 존재를 무시했었나? 생각해보면 케이블은 마치 유명 럭셔리 브랜드들 속에서도 단연 빛나는 보석 같은 액세서리로, 작은 터치(물론 100만원대가 넘어서는 것도 있지만) 하나만으로도 내 오디오 시스템을 남들과 구분 짓기 충분했다.
어떤 날은 내 손목 굵기만 한 파워 케이블을 구입해 앰프에 꽂은 후 다이내믹해진 소리에 새벽녘 미친 놈마냥 흐뭇한 미소를 지었고, 다른 날엔 스피커에 연결할 케이블에 한 달 원고료 수준의 돈을 써버리기도 했다. 새벽녘 방에서 방방 뛰며 음악을 듣다가 아래층 할머니의 원성을 들은 적도 있다. 그래도 행복했다. 이 작은 케이블 하나로, 남들과 다른 나만의 소리로 음악을 즐길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한계효용 체감이라는 법칙이 있다. 소비되는 재화의 수량이 증가할수록, 어느 시점부터는 재화가 추가되더라도 거기서 오는 만족감, 즉 한계효용은 감소한다는 의미다. 공기보다 다이아몬드가 비싼 것도 이 법칙으로 설명된다. 돈만 계속 쓸 경우 어느 순간부터는 사운드의 변화 없이 오디오의 덩치만 자랄 터였다.
나는 좀 더 독창적인 것을 원했다. 소리의 값어치는 높아지되 한계효용은 감소하지 않길 원했다. 내겐 케이블이 그 역할을 훌륭하게 해준 셈이다. 예를 들어 윌슨 베네시와 컨스텔레이션 앰프는 그 자체로 무척 훌륭한 조합이다. 돈만 있다면 누구나 구입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소리는 돈 많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낼 수 있을 게 아닌가? 그러나 의외로 케이블로 인한 차이를 몸소 체험하면서 좀 더 개성 넘치는 소리를 만들어내겠다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도체의 종류를 예를 들면 동선은 두께가 충분하고 저역이 단단하며 착색이 적다. 한편 은선은 대개 견고함은 조금 줄지만 하늘거리며 화사하게 빛나는 고역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답다. 도체는 소재는 물론이며 그 구조 그리고 순도, 굵기에 따라서도 소리가 천차만별이다. 전도도는 은이 가장 좋지만 기기의 조합에 따라서는 구리가 더 좋은 경우도 태반이다. 기본적으로 산화를 막기 위해 단자에 도금을 하지만 그 소재가 금이나 은, 팔라듐이냐에 따라서도 소리는 변한다.
물론 반론이 있을 수 있다. 누군가는 어설픈 과학적 지식을 들어 내 견해에 반론을 제기한다. 그러나 내 귀에 들리는 극명한 차이를 무시할 수는 없다. 극단에 이르면 단 1%가 승부를 가른다. 왜 그런 ‘전깃줄’ 따위에 수백, 수천만 원을 쓰느냐고 묻는 건 그렇기에 오지랖이다. 믿는 자들에겐 그 작은 부분에서 소리의 성패가 갈리기 때문이다. 스피커나 앰프, 또는 DAC, 턴테이블 그리고 그 사이를 잇는 케이블이 모여 독창적인 사운드를 만든다. 지금 만약 자신만의 소리를 찾는 누군가가 어딘가에서 갑갑해하고 있다면, 내가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조언은 이것이다. 케이블을 바꿔보시라.
일터에서 회의와 업무를 반복하던 도시인들이 파김치가 되어 지하철과 버스에 오르는 저녁. 비슷한 양복을 입고 비슷한 스마트폰을 든 이들이 비슷한 자세로 꾸벅꾸벅 졸다가 익숙한 역 이름을 말하는 안내 방송에 퍼뜩 깨 후다닥 내린다. 그러나 나의 일은 그때 시작된다. 마침 몇 달 전부터 궁금했던, 네덜란드산 케이블이 막 도착한 터였다. 이 작은 케이블 하나가 만들어낼 마법은 어떤 모습일까?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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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 김현유
WRITER 이장호
Illustrator 노준구
DIGITAL DESIGNER 김희진
출처 : https://www.esquirekorea.co.kr/article/51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