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M이 내게 말했다. “나 음악동호회 친구들한테 생일선물로 LP를 받았어. 무슨 판인지 궁금하지?” 얼마나 대단한 레코드인데 저리 반색을 할까. 당시는 골수 음반수집가의 입에 오르내리는 레코드가 존재했다. 요즘으로 치면 300만원을 호가한다는 아이유의 ((꽃갈피)) 레코드랄까. 당연히 음악의 장르는 다르지만 말이다.
M은 광화문 사거리에 위치한 레코드점에서 알게 된 인연이다. 1987년 5월이었다. 머리를 산발한 내 또래의 여자애가 가게로 들어왔다. 나를 본체만체하던 주인은 그를 보자마자 설레발을 치기 시작했다. 아직 그가 찾는 음반을 구하지 못했다는 주인의 말이 들려왔다. 모르긴 해도 단골손님이 아닐까 싶었다.
순간 5평 남짓한 가게가 너구리굴로 변했다. M과 난 담배연기를 공유하며 관심가는 음악가와 각자 소장한 레코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취향이 비슷해 보이기도, 그렇지 않아 보이기도 했다. 어쨌거나 우린 의기를 투합해 한남동의 음악카페로 향했다. 레코드가 맺어준 이성친구와 함께 보낸 토요일이었다.
학생운동에 매진하고, 과외 아르바이트를 하고, 가족갈등에 휘둘리던 친구는 1990년대에 영국으로 향한다. 일해서 모은 돈을 런던에서 레코드랑 어학연수비로 쓰겠다던 M. 나는 금융회사에 취업을 하고 오후 9시까지 퇴근금지령을 내린 상사와 주 6일 근무를 했다. 일요일을 빼고는 수집한 레코드를 만지작거릴 시간 자체가 없었다.
귀국한 M으로부터 사무실로 전화가 온 날은 평일 오전이었다. 30초 남짓이었을까. 잠깐의 통화는 상사의 눈질 때문에 서둘러 마쳐야 했다. 이후 우린 연락이 끊어졌고 이제는 길가에서 마주쳐도 서로를 알아 볼 수 없는 나이가 되었다. M은 아직도 레코드를 모으고 있을까. 다시 만나면 어떤 색깔의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
((Buskers))는 M이 받았다는 생일선물이다. 가격은 8만원. 요즘 물가로 환산하면 20만원이 넘는 고가의 레코드였다. 소문으로만 듣던 음반을 선물로 받은 M이 무척이나 행복해보였음은 물론이다. 아마도 그는 ((Buskers))를 신주단지처럼 보관하고 있겠지. 레코드란 영물에 가까운 무한생명체니까.
추천곡은 [If I Ruled the World]다. 기대작을 음반 마지막에 배치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그들은 이 곡이 10여년이 흐른 뒤에 한국에서 사랑을 받을 줄 몰랐을까. 이 곡과 쌍두마차를 이루는 곡은 [Nina]다. [If I Ruled the World]가 감정선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상상의 노래라면 [Nina]는 이별을 앞둔 연인에게 힘없이 건네는 마지막 편지 같은 곡이다.
‘거리의 악사’를 의미하는 버스커스. 그들은 노랫가사처럼 정말로 세상을 지배하고 싶었던 것일까. 어쩌면 우리의 삶도 [If I Ruled the World]와 마찬가지가 아닐까. 자신의 아름답고 빛나는 인성을 억누른 채 경쟁과 탐욕의 굴레에서 방황하는 삶. 우리에게 애착의 대상이란 과연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