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피를 집중적으로 모았던 1990년대의 일이다. 토요일 오후에 회사일을 마치고 회현지하상가에 들렸다. 원반으로 클래식 엘피를 모으지는 않았지만 쓸만한 중고 클래식 라이선스는 그곳에 많았기 때문이다. 모 음반점에서 알게된 사실은 교향곡보다 실내악 원반의 가격이 대체로 고가라는 사실이었다.
영화 <마지막 4중주>는 그동안 영화로 제작되었던 실존 음악가에 관한 내용이 아니다. 때문에 줄거리와 출연진에 관한 관심만으로도 구미를 당기는 작품이었다. 영화의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다. 현악4중주단 ‘푸가’와 함께 25년을 함께 보낸 4명의 인물들. 그들에게도 어김없이 그늘이 찾아온다.
‘푸가’의 리더인 피터(크리스토퍼 윌켄 역)는 스폰지 같은 인물이다. 아니 그런 역할을 해야만 개성이 단단한 4중주단의 리더 역할을 해냈을 것이다. 그에게 파킨슨 병이 접근한다. 무탈하게 연주생활을 유지하던 나머지 멤버들에게 혼란이 찾아온다. 그들의 갈등은 이미 존재했으나 피터의 희생으로 위기를 모면해 왔던 것이다.
영원할 것 같던 피터의 리더쉽이 무너지자 스승, 제자, 부부, 옛 연인으로 이루어진 연주단의 관계가 급격히 내리막을 걷는다. 그제서야 그들은 길었던 연주생활이 인생의 위기를 풀어낼 수 있는 가치재였음을 깨닫는다. 현악4중주단의 마지막 연주곡은 [베토벤 현악4중주 14번]이다.
위 곡은 베토벤이 마지막으로 작곡한 현악4중주 곡이다. 베토벤 작품을 통틀어 현악4중주는 감상자의 입장에서 마지막 순서에 해당한다는 레파토리다. 교향곡이나 협주곡의 화려함은 없지만 내면으로 침잠하는 실내악의 정점에 베토벤 현악4중주가 존재한다. 필자는 과르네리 현악4중주단과 알만 베르그 현악4중주단의 연주를 자주 접했다.
영화의 마지막은 서로 눈빛을 주고 받으며 연주에 몰두하는 4중주단이 클로즈 업 된다. 단조로 시작하는 14번을 감상하면서 관객들은 자신의 삶을 반추해보지 않았을까 싶다. 오르막이 있으면 당연히 내리막이 존재한다. 올라가면서 보이지 않았던 것들은 예고 없이 모든 이에게 찾아온다.
영화 <디어 헌터>에서 러시안 룰렛 장면을 열연했던 크리스토퍼 윌켄과 <다우트>의 연기대가 필립 세이 모어 호프만의 등장만으로도 이 작품은 볼만한 가치가 있다. 여기에 클래식 애호가들에게는 관심을 가질만한 음악적 대화가 줄줄이 등장한다. 변하는 존재는 변하는 대로 받아들이는 것. 어렵지만 절실한 일상의 교훈을 <마지막 4중주>가 암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