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서 답을 찾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과거는 그저 흘러간 시간이며 과거로 되돌아간다는 건 퇴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반드시 과거가 퇴보를 의미하진 않는다. 많은 것들이 디지털로 변환된 현재 되레 아날로그 방식에서 답을 찾는 경우가 많다. 디지털이 모두 쉽고 명확하며 옳은 대안이라고 생각하는 건 모순이다. 때로 이런 현상은 음악에서도 드러난다. 컴퓨터 프로그래밍으로 모두 가능할 거라 생각했지만 절대 흉내 내지 못하는 본래 어쿠스틱 악기의 소리가 있다. 클래시컬 음악 녹음을 아무리 최신 기기로 녹음해도 결국은 데카 트리가 답이었다는 사람들도 있다. 때론 재즈 녹음이 돌고 돌아 결국은 블루노트의 루디 반 겔더가 정말 위대했다는 깨닫기도 한다. 심지어 온갖 최신 컴프레서를 마다하고 그가 사용하던 페어차일드 아나로그 컴프레서가 천정부지의 가격으로 거래되고 여러 메이커에서 복각품을 선보이고 있다.
음악의 창작, 녹음뿐만 아니라 이를 재생하는 입장에서도 유사한 사례가 발견된다. 트랜지스터를 사용한 증폭 방식이 개발되고 나서 진공관 앰프는 세월 속에 점차 사라질 거라 생각했지만 여전히 존재하며 되레 더 꾸준하다. 최근 나는 KT88, KT120, 6550 아니면 EL34나 300B도 아닌 845 진공관을 싱글로 사용한 진공관 앰프를 구입했다. 개인적으로 싱글 엔디드, 클래스 A 증폭을 선호한다. 가장 순수하며 크로스오버 왜곡 없이 입력받은 신호를 가장 단순한 회로로 증폭하면서 순도를 최대한 유지해주기 때문이다. 네거티브 피드백도 걸지 않는다. 푸쉬풀, 클래스 AB 증폭도 잘 만들면 좋지만, 순도 만큼은 싱글 엔디드, 클래스 A 증폭이 최고다.
그리고 나의 예상은 어느 정도 맞아떨어졌다. 트랜지스터 앰프 중에선 가장 좋아하는 패스랩스 파워앰프마저 845 싱글, 클래스 A 증폭의 순도 앞에선 상대가 되지 않았다. 마치 웨스턴 일렉트릭 시절의 사운드를 듣는 듯, 자본이 가정용 오디오를 잠식하지 않았던 시절의 순수한 사운드가 펼쳐졌다. 그것도 현대 하이엔드 스피커의 대표격인 윌슨오디오 사샤에서 이런 소리가 나온다는 것이 신기했다. 더군다나 음원만으로 마치 1950년대 블루노트 하드밥이나 버브의 보사노바 재즈 그리고 데카 클래시컬 음악들이 엘피로 듣는 듯한 착각을 하게 만들었다. 여기에 트랜스로터 ZET-3MKII까지 가세해 엘피로 들으면 귀가 시릴 정도로 당대의 녹음 특성이 가감 없이 터져 나온다.
R2R DAC
흥미로운 건 이런 회귀 현상이 항상 최신이 좋을 거란 착각 아래 살던 우리의 고정 관념을 깨고 디지털에서도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이미 단종된 지 한참 된 PCM1704를 활용해 만든 구형 DAC들의 난데없는 인기다. 네임 DAC 같은 경우가 대표적이다. 한편에선 과거 세타에서 출시했던 DAC나 MSB의 구형 플래티넘 DAC를 다시 애지중지는 마니아들이 생겼다. 과거 오디오노트나 극히 일부 메이커에서만 만들었던 진공관 DAC가 다시 인기인 것은 단지 진공관의 잔향으로 디지털의 단점을 우회해 은근슬쩍 양념을 친 것일까? 어떤 시대든 잠시 레트로 유행은 있었지만 지금 디지털에서 불고 있는 바람은 단순한 바람은 아닌 듯하다. 벌써 수십년 이상 지속하여온, 아날로그 사운드를 머금은 디지털에 대한 간절한 소구다. 그리고 이 주제는 변칙이 아니라 원래 그래야만 하는 디지털의 숙명이다.
이런 소구의 그 중심에 R2R DAC가 있었다. 디지털 헤게모니에서 R2R이라는 과거의 유물(?)을 길어 올린 것은 몇몇 선구자들에 의해서다. 이미 R2R은 채산성, 제작의 난이도 등 다양한 문제로 인해 이미 델타 시그마 칩셋에 메인스트림의 왕좌를 내준지 한참이 지났다. 하지만 트랜지스터, 집적 IC 칩셋이 아무리 발전해도 진공관 같은 일부 소자가 여전히 필요한 곳이 있듯 오디오 분야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절대 집적만으로 해결되지 못하는 부분이 있기 마련이다. 대량 생산, 대량 소비되는 백색 가전이 아닌 소리 하나에 목숨을 거는 하이엔드 오디오 분야는 더더욱.
개인적으로도 R2R DAC의 사운드를 좋아해 많은 제품을 리뷰하고 애써 청음을 해보기도 했다. MSB 테크놀로지는 원래 과거부터 R2R DAC로 뿌리를 내린 브랜드로 Analog DAC부터 혁신을 일으키며 지금은 2억이 넘는 Select DAC II까지 생산 중이다. 이 외에 토탈DAC도 SN비는 낮지만, 그 유려하고 달콤한 음색이 매력적이다. 아쿠아 퀄리티는 상위 DAC로 가면 우리가 상상하는 R2R의 부드럽고 아날로그 같은 사운드를 내주었다. 한편 홀로오디오 같은 경우 마치 300B처럼 지하수를 마시는 듯한 맑고 예쁜 소리를 들려주어 놀랐었다. 이 외에 쉬트오디오의 이그드라실, 데나플립스 터미네이터 등 이 분야의 진지한 오디오 마니아들이 그렇듯 필자 또한 R2R DAC 삼매경에 빠져들었다.
반오디오와의 만남
그러던 중 MSB Analog DAC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리뷰를 하게 된 모델이 다름 아닌 반오디오 불새 MKII 였다. 당시 불새 MKII를 사용하면서 집으로 가져오기까지 했다. 워낙 궁금증이 많았고 당시 해외에서 출시되는 R2R DAC에 비하면 상당히 합리적인 가격대였으며 그것도 국내 브랜드였기 때문이다. 이후 운디네 DDC까지 리뷰해가면서 반오디오의 실력에 대해 믿음이 생기기 시작했다. 더불어 이전에 사용해왔던 DAC의 디지털 사운드와 판이한 사운드는 나를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사실 LP를 자주 듣는 내게 디지털 사운드를 아무리 금전적 투자와 세팅에 노력을 기해도 LP처럼 부드러운 고해상도 사운드를 내주긴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돌이켜보면 2016년에 불새 MKII를 만났으니 무려 7년 정도의 시간이 지난 무렵이었다. 불새 MKIII를 출시한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겐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실로 오랜만의 커다란 이슈였다. 그리고 제품을 대여받아 테스트에 들어갔다. 우선 전체 만듦새는 탱크같이 단단하고 믿음이 간다. 사실 디자인을 전공한 나의 기준엔 되레 MKII 버전이 더 컨셉이 뚜렷하고 미려했다. 하지만 디자인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일단 전체 인터페이스부터 시작해 전체적인 회로 구성 등을 면밀히 파악해갔다.
드디어 만난 불새 MKIII
일단 전체적인 인터페이스는 DAC라는 기능에 충실하다. 최근들어 DAC에 네트워크 플레이어를 붙인다든가 하는 다양한 시도가 있지만 반오디오는 오직 DAC 기능에만 충실했다. USB(B) 입력은 물론 동축, 광 그리고 AES/EBU 입력단을 지원하고 있다. 출력은 RCA 언밸런스 외에 XLR 밸런스도 모두 지원하고 있다. 전면엔 좌측 상단에 양각으로 새겨진 ‘Bann’ 로고가 의외로 멋지다. 한편 우측으로 LED 디스플레이를 마련해 붉은 색으로 선택 입력단 및 샘플링 레이트, 볼륨 수치 등을 표시해주고 있다. 몸체 자체는 알루미늄을 절삭해 가공한 것으로 복잡한 치장 없이 컴팩트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입력단의 경우 최대 24bit/384kHz, DSD의 경우 DSD512까지 지원하며 재생하지 못하는 포맷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불새 MKIII의 설계는 AC 전원을 입력받아 작동하는 DAC에서 음질적으로 해악이 될 수 있는 부분을 철저히 고려한 걸 엿볼 수 있다. 전원에 탈레마 토로이달 트랜스포머를 사용했으며 신호 처리 부분과 회로를 격리시켜 전기적 노이즈 간섭을 최소화했다. 트랜스포머 자체도 각 회로에 모두 별도로, 무려 네 개의 트랜스포머를 사용하는 등 비슷한 가격대에선 볼 수 없는 집요하고 과감하며 극단적인 설계를 취하고 있다. 디지털, 아날로그단 및 여러 각 부분에 별도의 전원을 설계해 상호 간섭을 최소화하고 순도 높은 최적의 전원 공급을 유지하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한편 DAC는 디스크리트 방식이 아닌 아날로그 디바이시스 R2R 래더 칩셋을 사용하고 있는데 디스크리트 방식 설계보다 이 편이 더 나은 점이 많다는 것이 제작사의 주장이다. 한편 디지털 기기지만 아날로그 출력단에 상당히 몰입한 흔적이 역력하다. OP 앰프를 사용하지 않고 모두 디스크리트 회로로 풀어서 설계하고 있으며 JFET를 사용한 버퍼단을 사용해 소리의 순도를 극대화하고 있다.
먼저 불새 MKIII에 사용한 DAC는 수십 년간 양질의 R2R 래더 DAC를 만들어온 아날로그 디바이시스의 소자를 사용했다. MKII에선 16bit 사양의 DAC 두 개를 사용해 각각 16bit, 10bit를 할당해 총 26bit를 얻어낸 것과 달리 이번엔 두 개의 DAC를 사용하되 각각 18bit, 8bit 조합으로 26bit를 얻어내고 있다. 그중 하나는 AD5781이며 나머지 하나는 AD5541이다. 제작사인 반오디오에선 SN비나 THD 등에서 DAC 모듈 자체로는 현존하는 세계 최고 수준의 R2R 래더 DAC인 MSB의 Selek DAC와 측정상 거의 같다고 한다. 디스크리트 방식으로 저항을 연결해 DAC를 설계하는 게 더 좋을 수도 있지만 글리치(glitch) 현상으로 인한 음질 열화 부분을 감안할 때 아날로그 디바이시스 칩셋을 선택한 것은 매우 합리적인 선택으로 보인다.
디지털 오디오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 클럭 같은 경우 DAC와 근접한 곳에 내장하고 있는 모습이다. 실제로 외장 클럭에 대해 쓴소리를 아끼지 않는 브랜드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같은 R2R 래더 DAC을 만드는 MSB 테크놀로지다. 외장 클럭은 전송 중간에 오류가 발생할 수 있는 소지가 다분하다는 것. 불새 MKIII의 경우 고정밀 클럭을 내장하고 있으며 소자는 크리스텍 CCHD-957이라는 펨토 클럭이 그 주인공이다. TCXO 방식으로 고해상도 음원을 처리하는 디지털 기기에서 충분한 성능을 발휘해줄 수 있는 스펙을 가지고 있다. 물론 클럭 자체는 물론 그 주변 회로, 특히 전원 관리가 클럭의 생명이다.
모든 기기는 아무리 내부 설계가 뛰어나더라고 해도 입력과 출력에서 손실, 왜곡이 생기면 모두 수포로 돌아간다. 최근 물량 투입형 신생 브랜드 DAC들이 겪고 있는 오류들이다. 불새 MKII DAC의 입력단은 절연에 최선을 다한 모습으로 아이솔레이션을 적용했으며 출력단 또한 디지털 섹션 이상의 공을 들인 걸 알 수 있다. 기본적으로 제조사인 반오디오는 진공관의 배음 구조와 유사한 음악적 뉘앙스를 표현하되 빠른 응답 특성 및 다이내믹스 그리고 SN비는 최대한 높고 왜곡률은 극단적으로 낮은 소리를 추구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진공관이냐 솔리드 스테이트냐 소자의 구분을 떠나 굉장히 힘든, 고난도의 회로 설계를 요구한다. 잘못하면 이는 형용 모순이 될 수도 있는 것인데 과연 어떤 소리를 내줄까? 사실 이번 리뷰가 내게도 유의미한 것은 바로 이 지점에 있다. 불새 MKIII에 ‘Final Evolution’이라는 버전 표기가 뒤따르는 이유다.
글 : 오디오 평론가 코난
2부로 이어집니다
DAC Technology :
독자 개발 24bit R2R Multi-bit Ladder
내부 연산은 26bit로 처리
DAC Chip
채널당 Analog Device AD5781+ AD5541
DSP
Xilinx Spartan FPGA with x16 oversampling
Linear Oversampling, Apodising Filter
Data rate
PCM 24bit/384kHz
DoP로 DSD128, Native DSD는 DSD512(ASIO Only)
Digital Input
USB Audio Spec 2.0(Asynchronous) x1
Optical Toslink x1
SPDIF Coax(RCA) x1
AES/EBU XLR x1
Analog Output
Un-Balanced RCA 2.0V, Balanced XLR 4.0V
Power Supply
Talema Transformer Linear Power Supply,
Analog와 Digital 전원 분리
Dynamic Range : 125dB
SNR : 125dB (Un-Balanced RCA) / 127dB (Balanced XLR)
THD : 미정
Dimension(WxDxH) : 440x400x90mm(with Foot 115)
Case Material : 100% Aluminum Alloy
Power consumption : 대기시 1W 미만, 동작시 30W 미만
Dynamic Range는 Audio Precision System 2722로 측정한 값
제조사 : 반오디오 (http://bannaudio.com)
공식 소비자 가격 : 12,000,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