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영국 국영 방송국에선 스튜디오 혹은 중계차량에서 모니터로 쓸 스피커를 어떻게 만들지 고심 중이었다. 결국 그들이 선택한 방식은 OEM이었다. 대신 방송국 안에 설계팀을 꾸리고 그들이 직접 설계를 하기로 했다. 방송국에서 사용하는 모니터링 스피커는 민간에서 사용하는 스피커와 요구하는 스펙과 사운드 경향이 다르기 때문. 요컨대 아나운서, 앵커의 목소리 또는 음악을 정확히 모니터링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중 더들리 하우드, 스펜서 휴즈 등 입지전적인 인물들이 있었다. 이 중 스펜서 휴즈는 일찍이 독립해 스펜서를 만들었고 BBC에 스피커를 공급했다. 그 전에 짐 로저스가 먼저 LS3/5A를 납품했고 그 이면엔 케프가 있었다. 레이몬드 쿠크를 기억하는가? 동축 시대 이전 레이몬드 쿠크는 케프의 설립자로서 BBC 스피커 제조사에게 유닛을 공급한, 영국 유닛 제조의 선구자였다. 하베스는 비교적 후발 주자였다. BBC에서 팀장(?) 정도 위치까지 오른 후 후배 엔지니어들처럼 그도 스피커 메이커를 차렸다. 하베스였다.
당시 BBC 규격 스피커들은 그냥 방송국에서 모니터링 용도로 사용되고 이후 트렌드가 바뀌고 방송 설비에 맞추어 변경되었다. 나중엔 PMC 같은 메이커가 스피커를 공급하기도 했다. 하지만 민간에 공급되기 시작한 BBC 모니터 스피커의 인기는 끊이지 않았다. 방송국에선 시대의 변화와 함께 퇴출되었을지 모르겠지만 일반 대중들은 여전히 그 스피커들을 잊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잊히지 않을 권리가 있는 법. BBC 모니터는 후배들에 의해 재생산되었다.
하베스, 스펜더는 여전히 당시 규격을 약간 변형, 진보시킨 스피커를 다수 생산하고 있다. 창립자는 돌아갔지만 앨런 쇼 등 연전의 용사들이 있었기 가능했다. 이 외에 대표적으로 스털링 브로드캐스트, 팔콘 어쿠스틱, 그라함 등 다수의 브랜드가 당시 규격에 수정을 거쳐 현대화된 BBC 모니터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 외에도 사실 이름만 다를 뿐 여전히 영국에선 BBC 모니터 스피커의 영향이 짙게 드러나는 스피커들이 상당수다.
아마도 그 중 가장 적통에 가까운 브랜드는 그라함이 아닐까 한다. 바로 스펜더의 창립자 스펜서 휴즈의 아들 데릭 휴즈가 전적으로 설계해 스피커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이제 그도 고령이라 언제 세상을 떠날지 모르지만 아버지로부터 이어받은 기술과 노하우는 데릭 휴즈와 그라함으로 이어지고 있다. 사실 1980년대 운명을 달리한 아버지를 이어 스펜더 모델을 그가 설계했으며 하베스 등 BBC 역사를 잇는 스피커 메이커에 설계 컨설팅을 다수 맡아 진행했다. 사실 거의 모든 현대 BBC 후계기들의 배후에 데릭 휴즈가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근 그라함이 생각난 이유는 집에 있던 오디오를 모두 시청실로 옮겨 허전했다는, 아주 간단한 이유였다. 그 중 여러 스피커 중 왜 하필 그라함이었을까? 일단 일하는 용도가 아니라 그저 음악을 즐기는 용도여야하고 그러자면 너무 긴장감을 유도하는 스피커는 피하고 싶었다. 물론 케프 LS50 Meta를 마란츠 모델 40n과 사용 중이지만 또 다른 소리로 음악을 듣고 싶은 이유가 컸다. 특히 진공관 앰프에 음원보단 엘피를 듣고 싶었다. 주중에 하루가 멀다 하고 제품 테스트하고 리뷰 쓰면서 주말에 집에서도 음악이 고프다니 이것도 직업병인가 싶다.
아무튼 운 좋게 LS 5/9를 영입했다. 이전에도 그라함에 대한 나의 믿음은 굳건했고 이는 LS 3/5A로부터 출발했다. 한동안 재미있게 들었기 때문이다. 그 즐거운 기억을 붙잡고 다시 그라함의 한 단계 상위 모델을 선택했다. 이 모델은 지금 타사 메이커와 비교하자면 하베스 모니터 30 계열과 유사한 설계 컨셉을 가진다. 방계 모델 중 항렬이 같다고 보면 맞다. 물론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로저스가 동일한 모델명의 스피커를 만든 적도 있다. 참고로 당시 로저스를 몇 번 들어보았고 PM510 같은 스피커는 직접 구입해 운영도 해보았지만 요즘 추세에 비하면 해상력이 성에 차지 않았던 기억이 있어 빈티지 모델은 제외했다.
앰프는 마란츠 모델 40n으로도 좋지만 이건 케프 전용으로 놔두고 캐리 SLI80 시그니처를 시청실에서 집으로 데려왔다. 시청실엔 라인 마그네틱 219A Plus 같은 기함급 진공관 앰프가 있다 보니 캐리는 계속 뒷전으로 밀려나 있는 상황이었다. 주인장에게 구제되어 집으로 온 캐리 SLI80 시그니처는 그라함과 매칭에서 나름 매력적인 소리를 내준다. 해상력, 분해력 이런 것은 그라함에게 있어 요즘 하이엔드 스피커 같은 수준까진 아니다. 하지만 과거 BBC 스피커처럼 번지는 소리는 아니어서 나름 내줄 소리는 모두 내주면서 편안하게 음악에 집중하게 만든다.
과거 BBC의 자장에서 완전하기 벗어나진 못했다. 당연히 완전히 벗어나면 그건 LS라는 이니셜이 붇은 데릭 휴즈의 스피커가 아니다. BBC 모니터는 절대 잊혀서는 안될, 잊히지 않을 권리와 책임이 있다. 이토록 편안하고 자극 없이 음악에 빠져들게 만드는 가정용 스피커는 여전히 흔치 않기 때문이다. 듣고 있자니 턴테이블 시스템을 제대로 꾸려서 이 스피커로 엘피를 듣고 싶다. 소리가 그냥 훌륭하다는 생각을 너머 정감이 넘치며 사랑스럽다. 음향을 테스트하기보단 음악을 듣고 싶게 만든다. 집에서 음악 들을 시간도 없이 책 쓰랴, 리뷰 쓰랴 바빴는데 이제 좀 즐겨야겠다. 1년 동안 사놓고 못들은 엘피가 산더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