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이하는 하이파이
하이파이 오디오는 말 그대로 하이 피델리티의 약자로 녹음된 음원을 어떻게 하면 높은 수준으로 원본의 퀄리티를 재생하느냐가 관건이다. 이를 위해 아날로그, 디지털 소스기부터 앰프, 스피커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최근들어 사실 복합기들이 많이 탄생하고 있다. 올인원 스트리밍 앰프부터 시작해 스트리밍 액티브 스피커 그리고 아예 일체형 블루투스 스피커에 이르기까지 그 형태와 기능은 천차만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내부를 보면 여전히 원리는 같아서 소스 기기와 앰프 그리고 마지막에 스피커에서 화룡점정을 찍는다.
스피커는 모든 신호를 마지막 관문이다. 아무리 뛰어난 음원을 변환하고 증폭시켜 좋은 음질을 구현했다고 해도 스피커에서 주파수 특성과 시간축 특성 및 그 외 회절 및 공간의 어쿠스틱 음향 특성이 좋지 못하면 모래 위의 성처럼 공든 탑은 무너진다. 그렇다면 어떤 스피커 설계가 좋은 것일까? 우선 스피커는 드라이브 유닛, 크로스오버 그리고 인클로저로 이루어진다. 드라이브 유닛은 스피커의 기본 요소지만 크로스오버와 인클로저는 유닛을 통해 더 넓은 대역과 다이내믹레인지를 얻기 위한 일종의 필요악 같은 존재다.
멀리서 보면 스피커 발전의 역사는 어떻게 하면 더 뛰어난 드라이브 유닛을 만들어내느냐의 싸움처럼 보인다. 하지만 좀 더 가까이에서 보면 스피커 발전의 역사는 어떻게 하면 필요악인 크로스오버와 인클로저의 해악을 줄이느냐의 역사로 보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크로스오버로 인한 에너지 저감 및 신호 손실을 줄이기 위해 더 뛰어난 소자와 각 대역 처리를 분리 설계하는 등 다양한 시도가 엿보인다. 한편 인클로저의 경우 인클로저의 에너지 저장을 억제하고 공진이 애초에 생기지 않도록 억제하던가 아니면 공진이 자연스럽게 빠져나갈 수 있도록 그 소재와 설계에 다양한 시도를 해왔다.
현대 하이엔드 스피커들은 인클로저 소재에 있어선 알루미늄이나 카본 같은 소재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기도 하는데 모두 공진과의 싸움에서 비롯된 결과다. 더불어 후면 에너지를 자연스롭게 소멸시키거나 혹은 되레 이 후방 에너지를 이용해 더 낮은 저역까지 깊고 선형적인 저역을 얻어내기도 한다. 대체로 로딩 방식은 어떻게 하면 스피커 유닛의 후방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관리할까 하는 고민에서 시작했다. 밀폐형, 저음 반사형, 미로형, 트랜스미션라인 또는 고전적인 백로드 혼 등에 이르기까지 스피커 인클로저 설계는 목표는 같더라도 그 형태는 천태만상이다.
케프 그리고 메타 시리즈
그 중 케프는 스피커 메이커 중 바워스&윌킨스와 함께 영국의 하이파이 스피커 부문을 양분하다시피하면서 성장한 대표적 브랜드다. 때론 유사한 설계 구조를 보이기도 하지만 교집합은 일부일 뿐 동일한 목적을 달성하는 데 다다른 방식을 구현해왔다. 누가 뭐래도 케프는 동축 드라이브 유닛에 평생을 바치면서 현재는 전세계로 그 범위를 넓힌다고 해도 둘째 가라면 서러울 존재로 올라섰다. 트위터와 미드레이지를 하나의 축을 중심으로 위치시켜 위상 왜곡을 줄이고 매우 자연스러운 음상과 포커싱을 형성시키고 있다. 사람의 입이 하나이듯 소리를 재생하는 스피커도 하나의 발음원을 통해 소리를 재생하는 것이 필연적으로 가장 우수한 소리를 만들어내는 구조라는 신념이 지배한다.
흥미로운 건 케프는 동축 드라이브 유닛을 절대 일정 이상의 크기로 키우지 않는다는 점이다. 필자가 사용하는 LS50 Meta의 경우 5.25인치 동축 하나로 전대역을 재생하게끔 설계해놓았다. 상위 모델인 LS60 같은 경우 4인치에 불과하며 R11 Meta는 5인치다. 이건 뮤온을 제외한 실질적인 플래그십에서도 5인치에 머무는 것으로 케프의 소형 동축의 증거가 된다. 동축이 이론적으로는 강점이 분명하지만 기구적 설계 면에서 트위터와 미드레인지 진동판이 서로 간섭을 하기 쉬운 형태며 이는 곧 SN비 저하 등 왜곡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미드레인지 진동판이 좋든 싫든 트위터 입장에선 혼으로 활용되면서 고역 재생의 효율은 향상되지만 반대로 너무 넓은 미드레인지 진동판은 진폭과 동시에 그 움직임이 되레 고역 품질을 훼손시킬 위험도 분명하다.
케프 R11 Meta
케프의 R 시리즈는 그런 면에서 케프의 분명한 목적과 설계 철학을 가장 모범적으로 보여주는 교보재와 같다. 물론 하위 LS50 라인업이 있고 상위로 레퍼런스와 블레이드 라인업이 있지만 R 시리즈는 레퍼런스 라인업 등 상위 라인업보다 합리적인 가격대에 유사한 스케일을 확보하고 있다. 한편 하위 북셀프 라인업에 비하면 훨씬 더 큰 용적과 베이스 우퍼의 결합을 통해 더 풍부한 사운드로 더 넓은 공간을 음악으로 채울 수 있다.
최근 오랜만에 R 시리즈의 최상위 모델 R11을 다시 만났다. 하지만 오랜만에 본 R11은 이미 R11 Meta로 진화되어 있었다. 우선 이 R11 Meta의 유닛 구성부터 살펴보면 1인치 트위터가 5인치 미드레인지 중심에 박혀있는 동축 드라이버가 중심에 있다. 이 유닛는 것으로 보기엔 기전 버전과 유사해보일지 모르겠지만 상당 부분 개선된 유닛이다. 무려 12세대까지 진화한, 일명 UNI-Q 동축 드라이버로서 이전 버전에서 모터 시스템은 물론 서라운드 에지 등 다양한 부분에서 세밀하게 다시 조율된 모습이다. 동축 외곽의 ‘셰도우 플레어’ 같은 경우 전면 배플과 만나는 부분에서의 회절을 감쇄시키기 위한 디자인이 돋보인다.
이번 R11 Meta에선 가장 돋보이는 부분은 아무래도 Meta가 의미하듯 메타 흡수 기술의 투입이다. 애초에 홍콩의 AMG라는 메타 물질 연구소와 협력해 만든 것으로 이후 AES 학회에 발표해 검증을 거친 후 스피커에 최적화시키는 작업을 거쳤다. 이 기술을 통해 만든 일명 메타 디스크는 최소 620Hz에부터 상위 대역의 흡수율이 굉장히 뛰어나다. 이것을 케프는 동축 드라이버 후방에 배치해 후면 방사 에너지를 99% 흡수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후방 주파수 흡수를 기존에 울 소재라던가 또는 복잡한 브레이싱 구조 및 내장 흡수 시트, 도료 등으로 해결하던 구태에서 이제 말끔하게 벗어나게 된 것. 물론 그 이하 대역은 저음 반사형 방식으로 해결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 스피커는 –6dB 기준 30Hz에서 50kHz까지 대역폭을 갖는다. 그리고 크로스오버는 330Hz와 2.5kHz에서 끊고 있다. 330Hz 이하는 하이브리드 알루미늄 우퍼를 사용해 동축 드라이버의 주파수 재생 부담을 최소화하는 영민한 설계다. 한편 하이브리드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알루미늄과 페이퍼를 사용해 만든 진동판을 사용하기 때문. 특히 그 위치도 유념해 볼만한데 동축을 중심으로 상하 대칭 구조로 네 개의 우퍼를 배치하고 있다. 이는 조셉 다폴리토 박사가 고안해낸 MTM, 쉽게 말해 가상 동축 방식이다. 동축 유닛 하나만으로 더 넓은 대역을 커버하는 스피커를 만들긴 어려우니 우퍼를 추가하되 이 또한 가상 동축의 원리를 활용한 것이다. 자신들의 철학을 최대한 타협 없이 다양한 설계 이론을 투입해 만든 모습이 역력하다.
청음
이 스피커는 공칭 임피던스 4옴에 최저 3.2옴까지 떨어지는 스펙을 보이며 감도는 90dB로 표기되어 있다. 여기에 이번 청음에선 버메스터 032 인티앰프와 하이파이로즈 RS150 네트워크 플레이어를 활용했다. 우선 이 스피커를 처음 들어보면 전체 대역 밸런스가 상당히 타이트하게 조율된 인상을 받게 된다. 예를 들어 샨탈 챔버랜드의 ‘Temptation’을 들어보면 정확한 포커싱과 균형 잡힌 토널 밸런스 등 흠 잡을 데 없는 균형 감각이 돋보인다. 스피커 규모에 비하면 음상이 부풀려지지 않고 작고 명확하며 보컬의 발음도 매우 명료하게 들린다.
이러한 음상, 포커싱 능력은 좀 더 추적,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정적인 보컬, 피아노 표현은 그렇다쳐도 움직이는 동적인 음향의 움직임에서 소리의 포획 능력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코넬리우스의 ‘Drop’을 들어보면 마치 영화를 보는 듯하다. 물방울의 움직임이 마치 눈에 보일 듯 사방을 움직이며 좌우, 전후로 물결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 움직임이 재빠르며 동축의 강점이 제대로 드러난다. 매우 커다란 스피커지만 핵심은 역시 중고역의 동축 유닛이다. 반대로 중, 저역은 확실히 조여져 있는 편이다.
중, 저역 쪽으로 넘어가면 조여져 있고 타이트한 편이지만 그렇다고 매지코, YG 어쿠스틱스처럼 완전히 단단한 편은 아니다. 아무래도 목재를 활용한 인클로저이기 때문에 목재의 잔향은 어느 정도 남아 있는 편이다. 예를 들어 A.R.라만의 ‘Dacoit duel’ 같은 곡을 들어보면 예쁜 현악기와 그 잔향이 공간 위를 예쁘게 수놓는다. 주로 금속을 활용한 유닛들이지만 그리 차갑지 않고 투명하고 화사한 토널 밸런스를 보여준다. 이후 저역으로 빠르게 치고 나갈 땐 무척 임팩트 있고 순발력 있게 재생해준다. 동적인 부분에서 편안하면서도 리듬감을 적절히 잘 탄다.
이 스피커의 관건은 중, 고역의 동축과 중, 저역의 베이스 우퍼 네 발이 이뤄내는 조화에 있다. 예를 들어 말러 1번 4악장을 들어보면 3웨이 형태로 크로스오버 주파수 부근의 피크나 딥은 크게 발견되지 않으며 지향성 측면에서도 거의 흠잡을 부분은 없다. 하지만 무엇보다 걱정되었던 것은 여러 우퍼와 동축 간의 스피드 정합 문제였는데 다행히 일사분란하게 맞아들어가는 느낌이다. 한 발의 우람한 저역보단 여러 발의 6.5인치 우퍼가 낮은 저역 부근까지 풍부한 음압으로 재생한다. 저역 부분은 사실 버메스터 032와 매칭이 기여하는 부분이 커서 단언하긴 힘들지만 냉정하고 가는 저역은 아니고 적당히 컨트롤되어 듣기 좋은 저역이다.
총평
케프가 현대 하이파이 스피커 역사에서 이룩해낸 성과는 다양한 측면에 걸쳐 있다. 사람들이 간과하는 것이 동축 드라이버에 대한 선입견인데 실제 들어보면 그 강점은 대단히 강력하다. 트위터와 미드레인지를 별도로 사용해 만들 경우 훨씬 더 많은 비용과 엔지니어링을 투입하고도 이 동축 한 발보다 더 뛰어난 주파수, 시간축 특성 및 고른 지향 특성을 얻어내기란 말처럼 쉽지 않기 때문이다. 보다 강력하고 쾌감이 높은, 비유하자면 짜고 매운 음식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이러한 균형 잡힌 사운드가 약간 심심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수많은 스피커를 들어보다 보면 결국 남는 건 이런 스피커다. 게다가 홈시어터 시스템을 함께 운용할 경우에도 위화감 없이 뛰어난 프론트 스피커로도 활용하기 좋은 음향 특성을 갖춘 스피커로서 그 활용도가 넓은 모델이다. 동축을 재료 삼에 대형기로 확장시킨 케프 사운드의 표본과 같은 모델이다.
글 : 오디오 평론가 코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