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하이파이 오디오 제작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상당히 다양한 이유로 이 분야에 뛰어든 인간 군상들을 볼 수 있다. 인생이라는 것이 항상 목표로 한 로드맵대로 흘러가지 않기에 이들 또한 우연한 기회에 자신의 열정과 재능을 발견하고 새로운 분야로 매진하게 되기도 한다. 때론 젊었을 적엔 회사를 다니며 밤이나 주말마다 취미로 오디오를 자작하다가 이 길로 들어선 사람들도 있다. 개중엔 전기, 전자 공학 관련 전문가 또는 의료, 항공 우주 등 꽤 전문 직종에 근무했던 사람들이 많다. 우리가 평소 아무렇지 않게 이용하는 네트워크 장비라던가 CCTV, 계측기나 가정용 의료기기, 자동차, 항공기, 키오스크 분야도 모두 오디오 기기와 연결되는 부분들이 있기 때문이다.
때론 단순히 음악적 열정으로 이 분야에 들어온 사람들도 많다. 예를 들어 영국의 대표적인 오디오 브랜드 네임오디오의 줄리언 베레커는 레이싱 카 드라이버이며 엔지니어지만 사실 그는 독학으로 엔지니어링을 공부한 인물이다. 그 이유는 친구들의 라이브 연주를 듣고 녹음하는 걸 즐기다가 그 음질이 너무 열악해 앰프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후 신생 라디오 방송국에 라디오 장비를 공급하기 시작했고 그 후엔 앰프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네임오디오를 설립하게 된다.
또 한 명이 생각나는데 디터 부메스터라는 독일인이다. 이 사람 또한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똘똘 뭉친 사람 중 하나다. 엄청난 기타 마니아로 알려진 그는 죽기 전까지도 엄청난 양의 기타를 수집했을 정도로 음악 마니아면서 연주자였다. 그 또한 자신이 사용하는 앰프가 자주 고장이 나면서 이를 고치는 방법을 찾기 위해 전자 공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다 이 분야에 흥미를 느끼고 라디오, TV 수리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위의 두 경우 모드 음악에 대한 열정을 기반으로 시작한 경우다. 그리고 더 깊게 들어가 보면 불편과 결핍이 만들어낸 창의적 활동의 결과가 인생 전반을 바꾸어버린 것이다.
부메스터
부메스터는 결국 오디오를 만들기 시작했는데 처음 만든 앰프는 777이라는 프리앰프였다. 1977년 7월에 내놓았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흥미로운 건 777의 성능이 만족스러워 회사를 설립하려고 했지만 은행이 대출을 해주지 않았다. 단지 음악을 좋아하고 전자기기를 좋아하는 아마추어가 험난한 기업들 틈바구니에서 모델 하나를 가지고 성공적으로 사업을 꾸려나갈거라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777 프리앰프는 당시 웬만한 자동차 한 대 값에 이르렀고 디터 부메스터는 은행 대출을 포기하고 주변 지인들에게 이 앰프를 팔기 시작했다고 한다. 무려 20여대의 프리앰프가 소리소문 없이 모두 판매되었으며 급기야 디터 부메스터는 창업 자금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인생은 운칠기삼이라고 했던가? 누군가에겐 행운이고 누군가에겐 불운일 수도 있지만 삶에서 운이 7할이고 노력이나 재능은 3할 뿐이라고 했는데 디터 부메스터는 둘 다 가진 인물인 듯하다. 당시 베를린에서 하이파이 오디오 딜러에 프리앰프를 납품하게 되었는데 우연히 저명한 하이파이 잡지의 평론가의 눈에 띄면서 부메스터의 이름을 본격적으로 평단과 시장에 알리게 되는 행운을 잡게 된다. 이것인 1978년의 일이며 이 해에 공식적으로 부메스터가 설립된다. 777이라는 불멸의 프리앰프가 회사를 설립하기도 전에 출시된 히스토리다.
088 그리고 216
이번에 만난 부메스터의 제품은 088 프리앰프와 216 파워앰프다. 마치 암호처럼 그들만의 공식 하에 지어 놓은 숫자들은 사실 알고 보면 상당히 직관적이어서 허탈하기까지 하다. 바로 발매한 연도와 출시 일자를 의미한다. 그 중 부메스터의 역사에서 가장 반짝이는 앰프라면 역시 프리앰프 808이다. 1980년 8월에 출시한 모델도 마치 스튜디오에서 사용하는 콘솔 같은 디자인으로 하이엔드 프리앰프 역사에서 일종의 장르로 읽힐 정도로 프리앰프의 수준을 몇 단계 높인 명기 중 하나다. 그리고 이후 077이라는 프리앰프로 부메스터는 실로 오랜만에 레퍼런스 하이엔드 프리앰프의 기준을 또 한 번 갈아치우는 기염을 토했다.
이번에 만난 프리앰프는 바로 077의 트리클 다운 모델로서 기본적으로 077 프리앰프의 설계 개념을 이어받으면서 규모를 줄인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일단 섀시는 077이 두 개 섀시로 분리해 전원부를 별도로 분리해놓은 것과 달리 하나의 섀시에 입, 출력 및 전원부를 모두 모아놓았다. 하지만 전원부 이외엔 상당 부분 유사한 설계를 보인다. 우선 RCA 입력단은 배제하고 XLR 입력과 출력만 지원한다. 총 여섯 조의 XLR 입력 한 조의 라인 출력 및 녹음 출력을 제공하고 있는 모습이다. 당연히 모든 회로는 풀 디스크리트, 풀 밸런스 회로며 X-AMP2 모듈을 개발해 탑재해놓은 모습이다.
이 외에 볼륨 노브가 두 개로 하나는 셀렉트, 또 하나는 볼륨이며 중앙에 총 네 개의 토글 스위치를 통해 위상, 출력, 볼륨 세팅 등 다양한 기능을 추가해놓고 있다. 매우 간단해보이지만 메뉴 설정에 들어가면 디스플레이 및 입/출력 등 관련 다양한 기능을 조작할 수 있다. 특히 입력 감도 및 출력 전압 조정이 가능해 파워앰프, 스피커에 따른 매칭도 고려해놓고 있다.
파워앰프 216은 스테레오 파워앰프로서 여전히 부메스터의 독보적인 디자인과 섀시를 통해 그들의 아이덴티티를 웅변하고 있다. 이 또한 거슬러 올라가면 808 프리앰프와 짝을 이루며 부메스터의 전설로 불리는 909 그리고 911 파워앰프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이후 159 플래그십 파워앰프로 레퍼런스 파워앰프의 명맥이 이어진다. 이번에 만난 216 파워앰프는 바로 159 파워앰프의 개발에서 얻어진 새로운 설계 이념을 적용해 만든 스테레오 파워앰프 형제 218의 동생이다. 매끈한 섀시 헤어라인과 고급스럽다는 표현으로는 모자란 예술적 가공 퀄리티가 일단 시선을 사로잡는다.
077과 088의 관계처럼 빅 브라더 218보단 작은 사이즈로 만든 것이 216으로 출력 및 전원부 등의 차이는 있지만 전체 설계 기술 및 설계 개념은 동일하다고 봐도 무방하다. 일단 입력단을 클래스 A 방식으로 설계하고 좌/우 증폭단에 대해 대칭 구조를 취했다. 한편 DC (Direct-coupled) 설계를 통해 입력단에 커패시터를 추가하지 않고 최대한 순수한 시그널을 받아 증폭하는 방식을 택했다. 최종적으로 216 파워앰프의 출력은 8옴 기준 100와트 출력을 갖는다. 그리고 임피던스가 절반으로 떨어질 때 채널당 165와트, 2옴까지 내려가면 245와트 출력을 갖는다. 또한 216은 두 대를 모노 브리지 접속해 사용할 수 있는데 이 땐 최대 490와트 출력을 얻을 수 있다.
청음
부메스터에 대한 추억은 개인적으로 여러 번 있었다. 바워스&윌킨스 혹은 노틸러스를 개발했던 엔지니어가 나가 만든 비비드 오디오의 스피커와 매칭 등이다. 때로 상당히 골력이 뚜렷하고 극도로 투명한 하이엔드 사운드의 표본이었다. 하지만 최근 오랜만에 들어본 비교적 최신 부메스터 앰프는 또 다른 경험을 선사했다. 예를 들어 현대 하이엔드 스피커의 선조급 브랜드라고 할 수 있는 카르마 스피커들과 결합은 과연 귀가 시릴 정도로 극강의 해상도와 투명도 그리고 저역 드라이빙 능력으로 감탄을 자아냈다. 이 외에도 윌슨 베네시와 조합에서 부메스터의 저력을 다시 한 번 확인하기도 했다. 이번 시청에선 케프 레퍼런스 5 meta 그리고 소스 기기로 T+A MP2000R MK2를 활용해 ROON으로 재생하면서 부메스터의 새로운 면모를 관찰해나갔다.
나윤선 – ‘Cocoon’
디터 부메스터는 실제 녹음이 가지고 있는 정보의 대역폭. 시간축을 그대로 확대, 증폭해 사실적으로 생생하게 재생하는 데 평생을 바친 인물이다. 따라서 처음 들어보면 대역폭이 일단 굉장히 넓어 가슴이 뻥 뚫릴 정도로 시원하다. 보컬 또한 고역이 확 트여 있고 단출한 악기 구성임에도 청취자 주변으로 녹음 공간의 어쿠스틱 특성이 사방으로 꽉 차게 다가온다. 나윤선의 입술 움직임까지 보일 정도로 섬세하고 한편으로 치밀한 필체가 느껴지는 사운드를 펼쳐낸다.
잭 존슨 – ’Staple it together’
이처럼 역동적인 사운드의 근간엔 앰프의 충실하고 여유 있는 전원부 그리고 출력단 설계가 있다. 하이햇 심벌은 번개처럼 반짝이며 빠르게 점멸하며 드럼 리듬은 당김 음이나 그 어떤 변박도 기민하게 표현해준다.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리듬, 페이스 그리고 타이밍이 일품이다. 스피커 자체의 영향도 분명히 작용하지만 유독 부메스터만 매칭하면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음색에 골격이 뚜렷하게 잡힌 사운드로 귀결된다.
트리오 토이킷 – ‘Gadd a tee?’
빠르고 명쾌한 사운드의 핵심은 어쨌거나 앰프의 반응속도와 관계가 있다. 입력된 신호가 증폭을 거쳐 라이즈 타임(rise time)을 밟는 시간이 매우 짧은 편이다. 따라서 드럼 킥에 따라 그때그때 깜짝 놀랄 만큼 강력하고 빠른 어택을 실감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가볍고 엷게 스쳐 지나가지 않는다. 어택 하나하나에 힘이 무겁게 실려 있으며 단단한 타격감을 만들어내면서 밀도 높은 펀치력을 느끼게 해준다.
카티아 부니아티슈빌/체코 필히모닉 오케스트라 – ‘라흐마니노프 : 피아노 협주곡 3번, 1악장’
피아노의 타건은 짧고 매끈하면 명쾌하고 빠르게 표현된다. 그 속의 내부 디테일까지 모두 보여주지만 안이 꽉 차 있어 무게감이 좋다. 카티아의 손끝이 민첩하고 우아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눈에 보일 정도로 세밀하고 명료한 이미징을 펼쳐보인다. 피아니시모에서 포르티시모까지 강약 세기 표현이 여타 앰프보다 대단히 세밀한 스텝으로 분할되어 표현되고 있다. 한편 피아노가 절대 오캐스트라 사운드에 마스킹 되지 않고 선명한 거리를 두고 여러 겹의 레이어링을 섬세하게 만들어내는 모습도 인상적이다.
총평
몇 년 전 카오디오 잡지에서 의뢰를 받아 BMW, 메르세데스 벤츠, 아우디 등 유명 브랜드의 자동차를 모두 시승하면서 카오디오의 성능만 테스트를 해본 적이 있다. 여러 내장 카오디오의 성능을 한 번에 비교 테스트할 수 있는 기회여서 흥미진진했다. 그 중 하나만 고르라면 역시 벤츠에 옵션으로 탑재된 부메스터의 오디오였다. 여타 메이커의 사운드와는 확연히 차별화된 고급스러운 음색과 반짝이는 듯한 표면 텍스처, 자동차에서 듣기 힘든 고해상도는 놀라울 정도였다.
과거 마크 레빈슨, 크렐, 제프 롤랜드, 골드문트, 그리폰 등 내로라하는 앰프들 사이에서도 독야청청했던 바로 그 부메스터였다. 그리고 오랜만에 만난 부메스터는 여전히 그들만의 독보적인 설계와 사운드를 잃지 않은 모습이다. 마치 그 옛날 페르시아 전쟁 승리를 기념해 아테네의 수호 여신 아테나에게 바친 파르테논 신전을 보는 듯한 심미적 충족감은 덤이다. 088과 216 조합은 현대 하이엔드를 대표하는 여러 스피커와 한 번쯤은 매칭 해볼 만한 대표적인 분리형 중 하나다. ‘Art For The Ear’라는 부메스터의 철학처럼 청취의 미학을 오롯이 담아낸 걸작이다.
글 : 오디오 평론가 코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