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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에스트로, 시스템을 지휘하다

버메스터 0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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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의 선택

때론 인생의 향방이 단 한순간의 선택으로 인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곳으로 흘러가기도 한다. 마치 사고처럼 찾아온 충격이나 혹은 예술적 영감, 기술적 호기심이 이런 선택의 트리거가 되어 인생의 돛대를 흔들어놓곤 한다. 아마도 버메스터의 디터 버메스터도 이런 경우가 아닌가 한다. 그는 15세 때부터 이미 라디오 등 전자 제품 조작에 관심이 많았다. 그리고 동시에 음악을 연주하는 데 열정을 바치던 젊은 청년이었다. 밴드 활동을 했을 정도며 그가 생전에 가지고 있던 기타 컬렉션은 어마어마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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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주말마다 연주를 위해 나가던 클럽에 나가고 집에선 음악을 즐기던 일상에서 난감한 상황에 부딪쳤다. 바로 쿼드 22 앰프와 역시 쿼드의 정전형 스피커를 사용했었는데 쿼드 앰프의 진공관이 자꾸만 고장 나는 일이 발생했다. 진공관 소자가 파손되곤 했던 것. 그 때 그는 결정했다고 한다. 바로 자신만의 새로운 앰프를 직접 만들어보겠다고. 그런 결심은 물론 그가 가진 전기, 전자 지식과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대학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했고 졸업 후엔 자동 혈액 검사에 사용하는 의료 진단 시스템의 전자 센서를 만드는 일을 했을 정도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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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7 프리앰프

바로 그가 첫 번째 만든 제품은 다름 아닌 777 프리앰프로서 지금도 프리앰프의 전설로 회자되는 모델이다. 마크 레빈슨에 LNP 프리가 있다면 버메스터엔 777이 있었다고 할까? 지금은 앰프와 스피커 등 모든 기기를 만드는 종합 하이엔드 브랜드로 성장한 그리폰이 처음 만든 제품은 놀랍게도 포노앰프, 그 중에서도 헤드앰프였다는 것. 또는 지금은 스피커 전문 브랜드 락포트 테크놀로지가 처음 만든 제품은 상상도 못했던 턴테이블이었다는 것만큼 충격은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버메스터가 파워앰프가 아닌 프리앰프로부터 시작했다는 것은 향후 버메스터의 활약상을 볼 때 의미심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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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8MK5 프리앰프

785, 877, 808 그리고 077, 088

향후 버메스터는 탁월한 프리앰프로 명성을 더욱 높여갔다. 785 같은 모델이 777을 이어갔으며 이후 877이라는 프리앰프로 출시했다. 1980년 8월엔 현재도 하이엔드 프리앰프의 아이콘 같은 모델 808 프리앰프를 시장에 내놓았다. 마치 녹음 스튜디오에서 사용하는 콘솔의 형태를 닮은 808은 원하는 입력, 출력 모듈을 마음대로 장착할 수 있었고 전면은 크롬 도금에 상단에 여러 노브와 스위치가 도열해 있었다. 프리앰프의 역할인 입/출력 제어 및 다양한 선택, 조작 기능들 그리고 포노단 등 이 모든 방대한 처리 능력이 예술적인 디자인 안에 펼쳐졌다. 이 프리앰프는 무려 MK5 버전까지 진화하면서 현재도 생산되고 있다. 말 그대로 살아 있는 전설이라 할만하다.

이후 버메스터는 077이라는 프리앰프로 808에 대한 오마주를 정성스럽게 이행했다. 전원부 분리로 두 대의 섀시에 회로를 나누어 담고 X-AMP2 모듈을 개발, 탑재했으며 풀 디스크리트, 풀 밸런스드 회로에 클래스 A 증폭으로 작동하는 특급 프리앰프의 등장이었다. 놀랍도록 아름다운 섀시 디자인 안엔 전원, 진동 등 오디오 신호를 다루는 데 핵심 사항으로 작용하는 요소들이 철저히, 세심하게 고려되었다. 지난 리뷰에서 077 프리앰프 시청기를 참고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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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7의 효율적 트리클 다운 : 088

088 프리앰프는 버메스터를 대표하는 레퍼런스 프리앰프의 DNA를 고스란히 잇고 있는 모델이다. 우선 케이스를 보면 077의 육중한 바디를 얇게 축약한 모습으로 더 슬림한 타입으로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전원부 분리형으로 설계했던 077에 비해 088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전원부를 컨트롤, 증폭부 안으로 인입시킨 것이다. 이러한 섀시 가공 측면에서의 축소는 절반 가격인 088에선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문제는 퍼포먼스 측면에서 얼마나 적은 차이를 달성해내느냐가 관건이 될 것이다.

088 인터페이스

우선 전면 플레이트는 모든 버메스터 기기들이 그렇듯 반짝이는 크롬 도금을 통해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노브도 좌/우로 두 개를 배치해 좌측은 셀렉터, 우측은 볼륨 조절용으로 만든 모습. 중앙에 총 네의 토글 스위치도 077과 유사하다. 하지만 메뉴 세팅 방식은 약간 달리하고 있다. 매뉴얼을 보면서 다양한 메뉴를 조정해보면 디스플레이, 입력단 이름 및 입/출력관 관련 상당히 많은 부분들을 사용자의 취향 및 매칭에 맞게 조정 가능하다.

특히 입력 감도 및 출력 조정 기능 등은 실제 앞 단의 소스 기기 및 뒷단의 파워앰프, 스피커와 매칭에 있어 상당히 유용하다. 한편 좌/우 볼륨 밸런스 및 스타트업 볼륨 등을 조정 가능하며 볼륨 디스플레이 방식 등 다양한 조정 기능을 통해 사용자마다 최적화된 세팅이 가능하다. 요즘 단순화된 프리앰프에 비해 사용자를 위한 배려가 세심한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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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앰프의 중요한 기능인 입/출력단 구성을 보면 상위 모델 077과 거의 유사한 모습이다. 일단 RCA 입력은 배제하고 XLR 입력단만 총 여섯 조 구비해놓고 있다. 하지만 소스 기기에서 RCA 출력만 가능한 경우 RCA-XLR 변환 단자를 제공하므로 사용상 문제는 없다. 한편 출력단의 경우 프리 아웃 및 녹음 출력 등 두 조의 XLR 출력단을 마련해놓고 있다. 이 프리앰프 역시 옵션 입력단이 있다. 모듈식으로 설계해 후방의 슬롯에 채용할 수 있는데 본사에선 MC, MM 포노 보드 또는 DAC 보드를 옵션으로 준비해놓고 있다. 단, 이번에 국내에 수입되어 테스트한 제품은 MC 포노단이 탑재된 버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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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R

088 프리앰프는 섀시 설계 및 전원부 등 077의 다운그레이드 버전이지만 내부 설계를 보면 상당히 유사한 부분들이 다수 발견된다. 분리된 독립 전원부에 있던 토로이달 트랜스포머 등이 내부로 들어온 모습이지만 신호 경로, 증폭단 설계는 대동소이하다. 일단 신호 경로에 커패시터를 생략해 순도를 최대화한 DC 커플드 방식이며 풀 디스크리트, 풀 밸런스 회로이고 077처럼 클래스 A 증폭단 설계를 고집하고 있다. 이를 위해 X-AMP2 모듈식 증폭단을 탑재해놓은 것도 077과 동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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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음

이번 테스트는 소리샵 청담점 제 1 시청실에서 진행했다. 파워앰프는 기존 레퍼런스 077 프리앰프의 경우 버메스터 218 스테레오 파워앰프로 매칭해 윌슨 베네시 레졸루션으로 청음했으나 088은 매칭을 변경했다. 소스 기기는 T+A의 MP3100HV를 사용해 ROON으로 재생하는 한편 파워앰프는 버메스터 216, 스피커는 윌슨 베네시의 디스커버리 3Zero를 활용했다.

kelly sweet

버메스터 앰프는 파워앰프나 프리앰프 등 모두 라인업에서 공통된 음질적 특징을 지닌다. 마치 번뜩이며 고급스러운 느낌의 전면 패널의 느낌이 음색에서도 그대로 전해진다. 예를 들어 켈리 스위트의 ‘Je T’Aime’를 들어보면 켈리 스위트의 음역이 고역으로 아주 쉽게 뻗어 올라가면서 상쾌한 사운드를 재생한다. 롤-오프되는 현상은 관찰되지 않으며 고역 끝까지 선연한 해상도와 응집력을 잃지 않는 끈질긴 고역 재생 성능을 보여준다. 확실히 클래스 A 증폭에서 볼 수 있는 리니어리티가 빛을 발하는데 견고하면서도 명징하고 선이 뚜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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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808 프리앰프와 911 파워앰프를 사용했을 때 경험이 생각이 난다. 프리앰프의 성능은 버메스터 파워와 매칭에서 가장 좋은 밸런스를 만들어낸다. 이번 같은 매칭의 경우 프리는 곱고 해상도 높은 소리에 파워앰프는 이런 프리앰프의 특성을 확대, 재생산해주며 충실히 서포트해주는 느낌이다. 예를 들어 샨탈 챔버랜드의 ‘Temptation’을 재생하자마자 시청실이 환해진 듯하다. 하지만 표면 질감을 희석시키지 않고 악기의 기음, 잔향 등 모든 정보를 징그러울 정도로 섬세하게 표출해낸다. 리듬 파트의 경우 텐션이 잘 살아 있으며 윌슨 베네시의 소리에 골격을 더 뚜렷하게 만들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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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슨 베네시 디스커버리 3Zero에 힘과 탄력을 붙여준 소리가 상당히 매력적이다. 버메스터의 단단하고 에지 있는 사운드에 더해 미세 약음 표현을 통하 세부 묘사, 다이내믹스 향상 덕분으로 추측된다. 예를 들어 휴 마세켈라의 ‘Stimela’를 들어보면 타악들의 약음들이 일사분란하게 묘사된다. 마치 소스 기기를 바꾼 듯 음표 하나 하나 분리, 분해해 재조합한 듯 강, 약 표현이 미세하게 표현되는 모습이다. 이런 마이크로 다이내믹스 표현에 집중하다 어느 순간 커다란 타격음에 깜짝 놀라게 된다. 대단한 실체감 향상으로 디스커버리에서 이렇게 쾌감이 높은 소리를 경험한 것도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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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교향곡 등 대편성에서 이 프리앰프의 특성은 더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안드리스 넬슨스 지휘,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 연주로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0번, 2악장을 들어보면 다이내믹스 표현이 더욱 광폭하게 표현되어 무서울 정도다. 여기에 스피드, 추진력이 더해지면서 긴장감을 높인다. 그저 편안하게 소파에 등을 기대고 듣기 좋은 소리는 아니지만 반대로 한 곡을 끝까지 집중력 있게 듣게 만든다. 단, 077에 비하면 소리의 무게감, 장중함 등에서 체급 차이가 있다. 한편 대편성 음악 감상의 맛을 살리는 데엔 무대 표현력이 일조하는데 좌/우 너비나 깊이, 특히 심도 면에서 깊고 세밀한 레이어링이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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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평

매칭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소리를 얻는다는 것은 얼마나 힘들고 동시에 즐거운 일인가? 오매불망 원하는 스피커를 구입했지만 막상 자신의 공간에서 사용하던 콤포넌트와 매칭했을 때 기대 이하의 음질이 흘러나올 땐 잠이 안 오기도 했다. 과거 버메스터가 내게 선사했던 기쁨은 아마도 그런 좌절의 순간에 번개처럼 나타난 일종의 섬광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꽤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 테스트해본 버메스터는 다시 그 당시의 희열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특히 이번 윌슨 베네시와 버메스터의 매칭은 필자가 기존에 들어보았던 윌슨 베네시 사운드 중 으뜸이었다. 물론 소스 기기 그리고 공간이라는 변수가 존재하겠지만 윌슨 베네시를 사용 중이거나 구매 예정이라면 버메스터와 매칭을 꼭 고려해보길 권한다.

프리앰프 리뷰에서 파워앰프, 스피커 매칭 등 잠시 샛길로 빠질 정도로 매칭의 중요성을 느낀 청음이었다. 마지막으로 버메스터 088은 077의 성공적인 트리클 다운으로 판단된다. 가격은 절반이지만 절대 그 성능은 절반이 아니다. 이 프리앰프가 당신의 시스템에 들어가는 것은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를 교체한 것과 같다. 조금 과장하자면 마치 오케스트라를 혹독하게 조련하는 지휘자를 초빙한 것에 비유할 수도 있을 것이다.

글 : 오디오 평론가 코난

TECHNICAL DETAILS
Weight 9 kg (19.8 lbs)
Width 482 mm (19“)
Height 96 mm (3.9“)
Depth 346 mm (13.6“)
Inputs 6 XLR / 1 RCA
Phono inputs optional MM / MC
Outputs 1 XLR, 1 Tape out (XLR)
Head phone jack 1x 6.3 mm
Module slots 1
Optional modules Phono MC / MM, DAC, Line

Written by 코난

코난 이장호는 하이파이 오디오를 평가하는 평론가다. <고음질 명반 가이드북 1,2> 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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