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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유산, 역사를 다시 쓰다

장사익 – ‘하늘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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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발매, 음향의 여로

우리가 아는 재발매는 단지 본래 발매되었던 음원 데이터를 가지고 그저 새로운 패키지에 담아 발매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내막을 알고 보면 재발매는 매우 다양한 프로세스에 따라 그만큼 다양한 버전으로 존재해왔다. 어쩌면 CD 시절엔 많은 오류가 있었던 걸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오리지널 마스터에서 음원을 추출한 후 매우 잘못된 방향으로 다양한 음향 조정이 이어지면서 폐해를 낳기도 했다. 때론 디지털 시대에 음량만 과도하게 키운 채 전체 다이내믹스가 극도로 위축되면서 음악적 쾌감을 오히려 깎아먹곤 했다.

21세기 들어 다시금 찾아온 LP 붐에 편승해 이뤄진 여러 LP 재발매는 그 꽃이 만개하기도 전에 꺾일 위험에 처해있다. 많은 사람들에게 재발매, 특히 가요 재발매는 음질적으로 CD, 심지어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만도 못하다는 악평에 시달리고 있다. 이유는 여러 가지다. 오리지널 마스터 테이프의 부재 혹은 못 쓸 정도로 망가진 마스터의 품질이 이유일 수도 있다. 또는 CD의 16비트 음원을 LP 커팅의 마스터로 사용하는 경우도 다반사여서 LP의 음향적 강점을 살리지 못하곤 한다. 물리적으로 불가항력적인 경우는 예외로 하더라도 일부는 오리지널 마스터의 커팅 능력부터 수준 미달인 경우가 많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모든 것을 완벽히 해냈다고 하더라도 재발매는 원본의 완벽한 재현 이상의 가치를 부여받기 힘든 태생적 한계를 갖는다. 필자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재발매는 해외에서 적잖이 발견된다. 비틀스의 여러 앨범들의 최근 재발매는 원본의 복사가 아니다. 조지 마틴(George Martin)의 아들 자일스 마틴(Giles Martin)이 새롭게 리믹스를 진행해 음향뿐 아니라 음악적으로 재탄생했다. 조니 미첼(Joni Mitchell)의 일련의 앨범들을 모은 ‘The Reprise Albums’는 믹싱과 마스터링 모두 다시 진행해 발매되었다. 조니 미첼 본인은 물론 프로듀서 데이비드 크로스비(David Crosby), 그리고 믹싱 엔지니어 맷 리(Matt Lee)조차 오리지널 발매본의 믹싱이 끔찍했다고 술회했다.

때론 오리지널 녹음이 모노와 스테레오 두 개 버전이 존재하기도 하지만 LP 초판은 모노로만 발매한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블루노트가 그런 경우인데 한참 세월이 흘러 뮤직 매터스 재즈가 블루노트 아카이브를 뒤져 스테레오 버전의 존재를 발견해 스테레오로 재발매한 경우도 있다. 필자는 이런 케이스가 가장 이상적인 재발매라고 생각한다. 단순한 재탕이 아닌 재발굴이며 재발매라는 과정을 통해 해당 앨범뿐 아니라 뮤지션은 음악적 재평가의 기회를 얻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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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소식

재발매는 각 시대의 정신과 문화를 대변했던 중요 앨범들에 대해 평소 알지 못했던 정보를 일깨우고 음악에 대한 재평가를 추동하기도 한다. 때문에 평소 재발매에 대해 다양한 경로로 정보를 습득하기도 하고 직접 구입해 테스트해보기도 한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이미 장사익의 여러 앨범을 고품질 LP로 차곡차곡 선보여 왔던 C&L 뮤직에서 장사익 1집 재발매를 기획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나 같은 사람으로선 반가운 게 당연하지만 솔직히 기쁨 반, 걱정 반이었다. 왜냐하면 본래 발매되었던 CD는 물론이고 특히 극악의 품질을 보여주었던 LP 재발매반이 이미 초판이라는 굳건한 성벽처럼 놓여 있기 때문이며 재발매에 대한 시선은 거의 대부분의 경우 곱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필자는 오디오 평론가로 활동하면서 이 앨범이 여기저기에서 하드웨어를 뽐내기 위한 테스트 곡으로 시연되는 걸 종종 보아왔지만 나는 절대 사용할 수 없었다. 기본적으로 밸런스뿐 아니라 다이내믹스 등이 완전하지 않아 보였다. CD는 물론이었고 추후 발매되었던 LP는 더 심한 손상을 겪은 후였다. 최근 필자의 세 번째 책 ‘고음질 명반 가이드북’에서 한국 대중 음악 명반 50선을 꼽으면서도 애써 1집을 외면하고 두번째 앨범인 ‘기침’을 선정한 것도 같은 이유다. 음향도 음악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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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로 가는 길

제작사에 의하면 본래 이 LP 재발매는 마스터 CD를 기반으로 리마스터링 할 계획이었다. 오리지널 마스터 테이프의 행방이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천만다행으로 마스터 테이프는 장사익 본인의 집에서 발견되기에 이른다. 당시에는 이번 재발매에 천운이 따른 것만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이후 펼쳐질 파란만장하고도 지난한 재발매의 여정을 예상하지 못한 채. 발견된 마스터 테이프는 상당 부분 열화가 되어있던 상태였고 이를 여러 분들의 도움과 노력으로 복원했다. 성공적인 복원에 따라 그 동안 발매되었던 음반들이 담고 있는 좌우 밸런스, 위상, 속도 등에서 문제들이 드러났고 다행스럽게도 원본이 가지고 있는 뛰어난 사운드를 되찾도록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원본 마스터는 PCM 규격으로선 거의 최대 해상도인 WAV(32bit/192kHz) 포맷으로 추출해 기본적인 절차를 마쳤다. 그리고 LP 래커 커팅을 위해 프레데릭 스타더(Frederic Stader)에게 보내졌다. 독일 에밀 베를리너 스튜디오 등 여러 스튜디오에서 도이치 그라모폰, 베를리너 필하모닉의 여러 앨범 작업에 참여한 마스터링 엔지니어로 현재까지 약 5천매의 앨범을 마스터링한 베테랑이다. 그는 AB 마스터링 스튜디오에서 먼 동양의 한국에서 발송된 소리꾼 장사익 1집 재발매 마스터링 작업을 집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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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고해상도, 광활한 다이내믹

이번 LP 재발매는 조용히 진행되었지만 물밑에선 다양한 실험이 이어졌다. 마스터 테이프의 복원부터 시작해 멀리 독일로 마스터링을 보냈다. 그리고 하프 스피드 마스터링 작업을 진행하기로 결론지었다. 하프 스피드 마스터링은 대단히 고난이도의 작업을 요한다. 모든 커팅 장비를 1/2 속도로 낮추어 커팅해야하기 때문. 다시 말해 커팅 머신를 33⅓ RPM이 아닌 16⅔RPM으로 작동시켜 소릿골을 새기는 것. 하지만 그 보상으로 LP의 소릿골은 좀 더 정교해지고 특히 주로 고역대 디테일과 다이내믹스가 향상된다. 스피드를 낮추면 고역대가 중역대로 내려오면서 커팅이 좀 더 수월해지기 때문이다.


실제 들어보면 하프 스피드 마스터링의 효과는 뚜렷하다. 예를 들어 ‘찔레꽃’ 초판, 무척 작은 약음으로 시작한 임동창의 피아노는 점진적으로 조금씩 음량이 커져간다. 이후 하이라이트로 가면 번개 같은 피아노가 작렬한다. 때로 볼륨을 내려야 할 정도로 깜짝 놀라기도 한다. 그만큼 다이내믹스 폭이 크다는 증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큰 피아노 어택에서도 소리가 깨지거나 부서지지 않으며 안정감을 보인다. 특히 명료하고 깨끗하게 빠지는 고역은 이전 오리지널 버전을 손쉽게 넘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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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가는 길’ 같은 녹음은 LP로 완성도 높은 음향을 구현하기 힘들다. 밸런스, 피치, 위상이 조금만 틀어져도 금세 티가 나기 때문이다. LP에선 되레 여러 악기가 출몰하는 녹음보다 악기 수가 적은 녹음에서 진검승부가 난다. 게다가 이전 발매에선 좌/우 채널이 뒤바뀌어 당시 현장의 녹음 밸런스를 완전히 왜곡해버린 바 있다. 이번 재발매 버전은 정확한 포커싱과 밸런스를 얻었다. 또한 이번 LP의 경우 1매가 아닌 2매의 LP로 출시를 결정하면서 한 면에 담는 곡 수를 최소화해 트래킹 에러로 인한 음질적인 왜곡을 최소화했다. 덕분에 LP 안쪽 트랙을 재생해도 깨끗한 배경 위에서 명료한 무대가 거의 흐트러짐이 없다.

이 외에도 ‘하늘 가는 길’ 전곡은 이전에 내렸던 음향적 평가를 모두 번복해야 할 만큼 새로운 옷을 입고 재탄생한 모습이다. 사실 필자는 LP를 듣기 전에 디지털 마스터(32bit/192kHz, WAV)를 들어본 적이 있다. 처음 듣고는 이전에 들었던 음원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해상력과 다이내믹스에 놀랐지만 LP 발매엔 걱정이 앞섰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독일에서 보내온 테스트 LP를 들어보면서 모든 것은 기우였음을 깨달았다. 수차례에 걸친 마스터링과 커팅 등 완벽을 기하면서 LP의 음질을 더욱 견고해져 우리 앞에 실체를 드러냈다.

장사익 박스 팩샷

하늘 가는 길

일반적으로 초판은 어떤 의심도 없이 태초에 부여받은 든든한 권위 위에서 굳건한 권한을 부여받는다. 그러나 재발매는 아무리 노력해도 의심의 눈초리를 피할 길이 없다. 따라서 아무리 특별한 재발매라고 해도 그 노력과 결실에 대해 존재의 의미와 퀄리티를 치열하게 증명해야만 하는 운명에 놓인다. 필자는 가끔 전자의 편리함이 아닌 후자의 치열함 편에 서고 싶을 때가 있다. 잘못되었더라도 초판이 마스터피스라면 더 이상 할 말은 없다. 하지만 이 앨범의 경우 필자가 듣고 판단하기에 마스터피스라는 칭송은 이번 재발매에게 부여되는 게 맞다. 너무 오래 걸렸다. ‘하늘 가는 길’의 이번 복원은 장사익의 음악을 더욱 완벽하게 만들며 그의 디스코그래피에 새로운 서사를 부여했다. 실로 압도적이다.

글 : 오디오 평론가 코난
(장사익 – ‘하늘 가는 길’ LP 재발매(C&L 뮤직) 해설지)

Written by 코난

코난 이장호는 하이파이 오디오를 평가하는 평론가다. <고음질 명반 가이드북 1,2> 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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