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마르타 아르헤리치의 엘피를 걸어놓고 듣다보니 1990년대 후반 개봉한 영화 하나가 생각났다. ‘샤인’이라는 영화. 미국과 영국의 아카데미 시상식을 모두 휩쓸고 골든 글로브 남우주연상까지 거머쥔 레프리 러쉬가 주연으로 출연해 열연했던 작품이다. 당시 비디오 대여점에서 이 영화의 테잎을 발견하고 빌려서 보면서 새벽까지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을 들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스콧 힉스 감독보다 오히려 제프리 러쉬의 연기가 감동적이었던 이유는 아무래도 영화에서 장애가 있는 연주자로서 연기가 탁월해서였다. 이후 그가 출연한 영화 중 기억에 남는 건 ‘베스트 오퍼’ 정도가 아니었단 싶을 정도로 제프리 러쉬하면 ‘샤인’만 생각난다. 그는 영화에서 데이빗 헬프갓이라는, 어쩌면 저주받은 천재 피아니스트로 분한다.
그가 연주했던 레퍼토리는 다름아닌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 미치지 않고서야 제대로 연주할 수 없다는 이 곡을 처음 들은 건 마르타 아르헤리치 버전이다. 그녀를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해준 연주도 라흐마니노트 피협 3번 아니었을까? 필립스에서 나온 조악한 CD로 들었던 곡인데 최근 엘피로 재발매 되어 다시 듣고 있다. 역시 지금 들어도 이 레코딩은 라흐마니노트 피협 3번의 레퍼런스다.
최근 함께 발매된 마르타 아르헤리치의 또 다른 엘피도 즐겨 듣고 있다. 바로 기돈 크레머와 함께 한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크로이처’. 마르타 아르헤리치는 기돈 크레머나 미샤 마이스키와 꽤 여러 번의 협주를 남겼는데 이 앨범도 대표적인 명연이다. 하지만 이 앨범은 엘피로 처음인 것 같다. 침실에 오래 전 듣던 라이센스 엘피들, 거의 데카, 필립스, DG 엘피를이 산더미 같은데 아무리 찾아봐도 이 엘피는 없다. 조사해보니 역시 최초 발매다.
간만에 과거 클래식 입문기 때 들었던 연주를 다시 들어본다. 이후 많은 연주들이 있었지만 누구나 그렇듯 첫정이 무서운 법. 이후에 아무리 많은 명연을 접했어도 베토벤 하면 이 앨범, 라흐마니노프 하면 저 앨범…바로 생각나는 연주가 있고 대개 해당 곡을 처음 들었을 때 그 버전인 경우가 많다. 모두 ‘80년대. 막 엘피의 자리를 걷어내고 시디라는 디지털 포맷이 기승을 부릴 때 발매된 두 앨범이 시대를 돌고 돌아 엘피로 등장했다. 같은 녹음이지만 또 새롭다. 오래 곁에 두고 싶은 앨범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