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과 오디오를 일상 속으로
처음 하이파이 오디오 쇼가 열린 건 20년도 더 된 이야기다. 국내에서 오디오를 구입하는 일은 세운상가나 용산 등에 들러서 둘러보면서 음악을 잠시 들어보는 것이었다. 한 자리에서 다양한 기기를 볼 수는 있었지만 제대로 시청할 수 있는 환경이 되어 있는 곳은 흔치 않았다. 주로 집단 전자상가 위주로 형성된 상권에서 오디오라는 것은 일부 지체 높은 분들이나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사람들의 전유물이었다. 하지만 음악이라는 공통분모를 품은 예술적인 디자인과 첨단 엔지니어링이 결합된 하이파이 오디오는 온간 가전제품들 사이에 있는 그저 비싼 외산 오디오 정도로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그런 와중에 하이파이 오디오 쇼는 일반 가전과 고급 음향 가전제품을 분리해서 생각하게 만들었다. 단지 중, 저가 백색 가전과 고가의 외산 오디오를 구분하는 흑백논리가 아니다. 미국 등 해외 선진국에서 촉발된 하이엔드 오디오는 당시 일종의 문화 현상과 맥을 함께 하면서 최고의 음질과 함께 시각적으로도 심미적 만족감을 주는, 일반적인 전자 제품 이상의 가치를 선보였다. 하이파이 오디오 쇼는 그러한 하이엔드 오디오의 각축전을 한 눈에 살펴볼 수 있었고 하이파이 오디오를 가전의 또 다른 장르로 부각시켰다.
이런 박람회는 해외에서 유입된 문화였다. 라스베이거스 CES는 물론 미국 각지에서 열렸던 오디오 쇼가 모태가 되었다. 당시 국내 오디오 쇼는 스포츠 신문 등의 후원을 받아 진행되기도 했을 만큼 대중적인 파급력이 강했고 사기업의 이익은 물론 공공적인 의미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시대가 바뀌어갔다. 집단 전자상가가 하이파이 오디오의 메카였던 상황에서 온라인 쇼핑몰이 득세하기 시작했고 오프라인 숍은 집단 상가를 떠나 강남, 서초, 신사, 압구정 등으로 자리를 옮겼다. 호텔 등에서 열리던 오디오 쇼는 언제부턴가 코엑스에서 열리고 있었다. 프라이빗 공간에서 집중도 높게 제품을 경험해볼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 분야는 마니아들 위주의 폐쇄적인 시장이라는 건 다르지 않았다.
‘더 사운즈’
최근 롯데 백화점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변화는 이 분야에서 특별한 고지를 점령해 나가고 있다. 백화점에서는 대부분 라이프스타일 위주의 그리 비싸지 않고 대중적인 오디오 그리고 이어폰, 헤드폰 등 시장 점유 비율이 큰 형태의 음향기기를 취급해왔다. 그런데 롯데 백화점이 얼마 전부터 하이파이 오디오를 취급하는 매장을 입점 시키기 시작했다. 시작은 사운드 유나이티드 산하의 B&W 그리고 클라세 등이었다. 사이드로 매킨토시 등의 제품이 함께 세팅되기도 했고 마란츠, 데논도 뒤이었다. 이어폰, 헤드폰도 전시되어 있고 청음이 가능했지만 고가의 하이엔드 오디오가 백화점에 자리 잡은 모습은 놀라우면서 반가웠다.
그리고 이번엔 ‘더 사운즈’라는 미니 오디오 쇼의 형태로 행사를 주최한다는 소식에 주말을 이용해 다녀왔다. 과연 마니아 위주의 폐쇄적인 고가 오디오 시장에서 백화점이라는 공간이 주는 변화는 어떤 시너지를 내줄 것인가? 궁금했다. 사실 백화점에서 하이엔드 오디오를 전시, 판매한 건 어제 오늘 일은 아니다. 과거에도 지금도 몇몇 백화점에서 명품관에 하이엔드 오디오 수입사들이 진입해 제품을 취급했다. 하지만 이번엔 프레임을 ‘더 사운즈’라는 이름 아래 조그맣게나마 ‘하이파이 오디오 쇼’ 안에 진입시켰다는 게 다르다.
우선 9층으로 잰 발걸음을 옮겼다. 카메라를 들고 행사장으로 들어갔다. 아니, 들어간다는 표현보단 그저 지나가면서 구경했다는 말이 옳을지도 모르겠다. 반드시 문을 열고 각 부스에 입장해야하는 기존 오디오 박람회와 달리 오픈된 공간이기 때문이다. 가구 매장 등을 거닐다가 옆길로 들어서면 그냥 바로 오디오들이 세팅되어 있는 공간으로 이어진다. 어느 순간 앞으로 보니 B&W의 801D4 시그니처가 눈앞에 서있는 식이다.
우선 B&W는 가장 큰 사이즈의 전시장 안에 놓여 있었다. 얼마 전 국내 상륙한 시그니처 버전 801D4를 중심으로 805D4도 나란히 자리하고 있었다. 앰프는 클라세의 델타 시리즈 프리 그리고 모노블럭 파워앰프를 세팅해놓았다. 소스기기는 네트워크 플레이어로 세팅했는데 국내에서도 많은 사용자층을 거느리고 있는 루민이 담당하고 있었다. 옆으로는 데논, 마란츠 등의 입문 기들과 북셀프를 매칭해 놓아 가격대별로 균형을 맞춘 모습이다.
이 외에 B&W의 대표적인 스트리밍 액티브 스피커 포메이션 듀오도 화이트 버전이 옆으로 전시되어 있었다. 대부분 아주 복잡한 마니아 취향의 세팅보단 누구나 최대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세팅이 돋보였다. 옆으로 B&W의 헤드폰들로 다양하게 전시되어 있는 모습. 전반적으로 대중들의 눈높이에서 상상할 수 있는 현대 하이파이 오디오의 모습을 간단한 예시로 들어놓은 듯한 모습. 특히 가구들도 마니아들이 사용하는 오디오 전용 랙이 아니라 롯데백화점에 취급하는 가정용 제품들로 꾸려 일상 속에 녹아든 하이파이 오디오를 몸소 보여주었다는 점이 좋았다. 실제 일반 가정의 거실에서 가족들과 함께 즐기게 되는 음악과 오디오는 이런 모습이 아닐까?
다음으로 눈을 돌리니 매킨토시 인티앰프 그리고 패러다임 스피커들이 눈에 들어왔다. 매킨토시야 오디오에 대해 거의 전무한 분들도 알만한 브랜드로 최신 제품이지만 푸른 눈동자는 백화점 조명 아래에서 더 푸르게 빛난다. 한편으로 PSB, 토템 등과 함께 캐나다를 대표하는 스피커 전문 브랜드 패러다임 스피커도 눈에 띄었다. 패러다임 스피커가 국내 처음 소개되어 대리점에서 주최한 작은 쇼케이스에 놀러 갔던 기억이 여전히 생생하다. 당시 가격 대비 높은 성능을 자랑하던 패러다임은 이젠 베릴륨 트위터를 탑재한 하이엔드 스피커로 거듭나 있었다.
안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니 마치 아버지 세대부터 들어온 듯한 빈티지 분위기의 스피커가 등장한다. 바로 영국 파인오디오의 스피커다. 탄노이 출신 핵심 엔지니어들이 독립해 설립한 브랜드로 브리티시 사운드의 전통과 미래를 모두 한 몸에 담고 있다. 이번 오디오 쇼에 출품한 제품은 파인오디오에서 과거의 전통을 이어받아 현대에 계승한 빈티지 클래식 시리즈 중 Classic X 스피커다. 그리고 자디스 오케스트라 레퍼런스 SE 진공관 인티앰프와 오디오랩의 올인원 스트리밍 앰프 옴니아도 자리를 빛내고 있었다. 이 외에도 스펜더의 클래식 4/5, 프로젝트 오디오 턴테이블 등 실속 있는 가격대 제품도 전시한 모습이다.
안쪽으로 더 깊이 발걸음을 옮기다 보니 탄노이도 등장한다. 탄노이의 대형기 웨스트민스터 로열 GR 스피커도 출품했다. 아마도 영국은 물론 전 세계 하이파이 오디오 역사에서 열 개의 역사적 명기를 꼽는다면 꼽을만한 스피커다. 웨스트민스터 로열 GR 스피커엔 매킨토시 분리형 프리, 파워앰프를 매칭했고 소스 기기까지 모두 매킨토시로 통일한 모습. 다른 한편으로는 탄노이의 또 다른 명기 오토그라프를 작게 축소한 미니어처 오토그라프 미니 GR이 보였다. 매칭한 컴포넌트는 역시 영국 출신 리크가 1960년대 출시했던 스테레오 30의 디자인을 계승해 몇 년 전 새롭게 선보인 스테레오 130과 시디플레이어가 놓여 있어 고풍스러운 빈티지 분위기를 연출해주었다.
이 외에도 라이프스타일 제품들 그리고 요즘 가장 맹위를 떨치면 대중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액티브 스티리밍 스피커들도 눈에 들어왔다. 대표적으로 영국 케프의 LSX II를 위시로 LS50 Wireless II, LS60 등 케프를 대표하는 스트리밍 스피커 세 조가 모두 별도의 독립된 공간에 설치된 모습이다. 역시 이런 스피커를 실제 사용할 법한 거실 공간을 모티브로 연출해놓아 현실성이 높았다. 정면에 TV와 TV 장식장 그리고 소파 및 양 옆의 조명 등 현실에서 오디오가 라이프스타일, 인테리어와 어떻게 어울릴 수 있는지 상상의 나래를 펴게 만들었다.
‘더 사운즈’를 떠나며
쇼룸 연출에 ‘프리츠한센’, ‘에르고시스템’ 등 10개 수입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제품들도 눈에 띈다. 고급 의자, 소파, 카페트들이 바로 이 브랜드 제품들이다. 한편 음악을 듣기엔 약간 소란스러운 매장 상황을 고려해 전용 청음실도 마련해놓은 것은 좋은 아이디어다. 총 네 개 정도 청음실이 보였는데 아주 크진 않지만 일반 가정의 방 크기에서 실제로 어떤 소리를 내줄 수 있을지 들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또 하나 눈에 띄는 건 실제 집에서 사용할 법한 가구나 소파, 카페트 외에도 일러스트레이터 마마콤마의 그림을 담은 액자가 시선을 사로잡기도 했다.
좀 더 보완했으면 하는 점들도 없지 않았다. 좋아하는 음악을 더 좋은 음질로 듣기 위해 수백, 수천만 원을 지불하는 사람들 입장에선 무엇보다 음질, 음향적 특성을 잘 파악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해보였다. ‘더 사운즈’를 떠나면서 여러 상념에 사로잡혔다. 여러 모로 일상에 들어선 하이파이 오디오의 모습을 연출해낸 모습들이 현실성이라는 측면에서 공감대를 넓혀주었다는 점이 평범하면서도 이색적이었다. ‘음악과 오디오를 우리네 평범한 일상 속으로’. 모토가 이런 것이라면 좀 더 다양한 가격대의 제품군을 꾸려 본격적으로 더 큰 오디오 박람회를 열어도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