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마크로 간 재즈
한 사람 혹은 한 사건을 극적으로 만드는 것은 그것의 시간적인 순서에 있다. 어떤 사건으로 인해 어떤 사람의 인생은 이전의 시간축에서 완전히 벗어나 다른 길로 향하기도 한다. 하나의 브랜드도 마찬가지다. 인생의 시간을 다른 시간축으로 바꾼 극적인 사건들이 있다. 그래서 훗날 대외적으로 발표한 공식적인 명함 뒤에 숨겨진 이야기 속 특별한 사건들을 발견하기도 한다.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자신의 인생행로를 정해놓고 태어나진 않듯, 후천적으로 계발된 능력치들이 되레 예상치 못한 인생을 만들어버리곤 한다.
오디오 브랜드의 이야기들 속에서도 종종 이러한 흥미로운 순간들의 존재가 있었음을 알게 되면 더욱 구미가 당긴다. 예를 들어 마크 레빈슨은 더블 베이스와 트럼펫을 연주하던 뮤지션이었다. 한창때는 그 유명한 폴 블레이와 함께 연주하기도 했다. 그가 지금은 패러 사운드를 디자인하는 존 컬이나 비올라의 톰 콜란젤로 같은 유능한 엔지니어들을 항상 곁에 두고 활동한 이유가 있다. 그의 음악적 에센스를 엔지니어링으로 풀어내기 위한 의도에서 시작된 것이다. 네임 오디오 같은 경우 친구의 음악 연주를 더욱더 생생하게 재생해 보기 위해 앰프를 만들다가 오디오 제작자의 길로 들어선 줄리안 베레커의 열정에서 시작되었다.
오디오벡터의 창립자 올레 클리포드(Ole Klifoth)는 광적인 재즈 팬이었다. 단순히 음반을 즐기는 것을 넘어 공연장을 밥 먹듯 들락날락하는 것이 일과였다. 근처의 몽마르트 재즈 하우스 같은 곳에 공연을 보러 가는 것이 그의 낙이었다. 그가 어렸을 적 미국에서 건너온 재즈 맨들이 자주 공연을 펼쳤던 것도 이유 중 하나였으리라. 당시엔 미국의 흑인 인종차별을 피해 유럽에서 활로를 찾은 재즈맨들이 꽤 많았다. 스탄 게츠, 덱스터 고든, 케니 드루 등등. 그중에 듀크 조던(Duke Jordan)도 빼놓을 수 없다. 그의 앨범 ‘Flight to Denmark’는 덴마크로 날아간 미국의 재즈가 듀크 조던의 손에서 꽃피운 이정표 같은 작품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의 다음 스텝은 자연스럽게 정해졌다. 재즈 뮤지션이나 작곡가, 혹은 음악 방송인이나 재즈 평론가가 되었느냐? 아니다. 그는 그렇게도 사랑하는 재즈를 가장 멋지게 재생해낼 수 있는 오디오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오디오의 꽃이라고 불릴만한 스피커를 제작했다. 처음엔 키트 타입의 스피커를 만들어냈고, 디자인 또한 당시로선 보기 힘든 독특한 설계를 취했다. 하지만 꽤 커다란 성공을 거두면서 프로 오디오 제작사로서 오디오벡터의 깃발을 올리게 된다.
오디오벡터의 승부수
오디오벡터는 계속해서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그저 과거의 스피커 디자인에 멈춰있지 않았다. 재즈의 즉흥 연주처럼 본래 악보에 의존하지 않고 새로운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그 정수들은 오디오벡터의 독자적인 기술들로 압축되어 설명된다. 에너지를 인클로저에 축적시키지 않고 내부 정재파를 억제하는 NES, AMT의 후방을 열어 공간감을 극대화하는 설계, 그리고 오디오벡터의 독자적인 샌드위치 공법을 활용한 카본 드라이브 유닛 설계 기술 등이다.
이 외에도 상위 버전으로 올라갈수록 다양한 기술들이 활용된다. 내부에 사용한 여러 패시브 소자들에 대해서 영하 238도에서 극저온 처리시키는 NCS 분자 재배열 기술, 그리고 LCC 저압축 드라이버 제작 기술 등 상당히 많은 독자 기술들을 축적해냈다. 그리고 마지막 비기 같은 것이라면 바인딩 포스트 옆의 단자를 사용해 케이블로 접지를 해주는 프리덤 그라운드 기술(Freedom Grounding Technology)이 있다. 이러한 독자적인 기술들은 오디오벡터를 진화시키면서 혁신의 순간엔 여지없이 새로운 라인업에 전이되었다.
R6 Arrete
최근 오디오벡터의 레퍼런스 라인업인 R 시리즈 내에서도 레퍼런스급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R6 Arrete를 다시 만났다. 수년 전 이 스피커를 처음 듣고 그 신선한 음향과 음악적 표현력에 매력을 느꼈던 적이 있었는데, 두 번째 만남에선 어떤 소리를 내줄지 내심 궁금했다. 일단 나를 반기는 123cm 정도의 크기과 멋지게 마감된 인클로저 표면이 미소를 자아내게 만든다. 달리 등 오디오 강국 덴마크는 폴란드 등과 함께 영미권 오디오 브랜드들의 전초기지 같은 역할도 하고 있다. 덴마크의 B&O 증폭 모듈은 이미 유명하고, 전 세계 카트리지 브랜드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오토폰만 생각해 봐도 그렇다. 그리고 인클로저 제작에 있어선 그 어떤 브랜드들보다 뛰어난 실력을 발휘한다.
일단 드라이브 유닛은 전면에서 볼 때 AMT 트위터 하나가 맨 상단에 위치하고, 그 아래도 미드 베이스 우퍼가 두 발 보인다. 모두 6.5인치 구경으로 카본 진동판을 직조해 사용하고 있다. 가벼울 뿐만 아니라 높은 강도를 지녀 하이엔드 스피커들에서 많이 활용되는 소재다. 주파수 대역은 최저 23Hz에서 52kHz에 이르며 크로스오버 주파수는 100Hz, 350Hz, 3kHz 등 세 군데에서 끊고 있다. 유닛은 세 개뿐인데 세 지점의 주파수에서 끊고 있다니 눈치 빠른 독자라면 의아하게 생각할 것이다. 그 이유는 눈에 보이는 유닛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선 저역에 두 개의 우퍼를 추가해 초저역을 보강하고 있는 모습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 하나는 6.5인치고 또 하나는 8인치다. 그리고 더 흥미로운 건 두 개가 아이소배릭 어레이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작은 공간에서 아주 낮은 저역까지 깊고 빠르며 명료하게 재생할 필요가 있을 때 사용하는 기법인데, 두 개 유닛의 구경을 달리하는 것은 처음이다. 이는 아이소배릭에 대한 다양한 실험과 연구를 통해 오디오벡터가 개발한 ICB으로, 아이소배릭 컴파운드 시스템(Isobaric Compound System)이라고 한다. 고전적인 아이소배릭에 안주하지 않고 낮은 저역까지 보다 효율적으로 재생하기 위한 방편으로 보인다.
더불어 또 하나의 비밀이 숨어 있다. 바로 스피커 후방에 유닛을 하나 더 추가하고 있는 점이다. 유닛 구경은 3인치, 그리고 재생 대역은 중역이다. 대체로 이런 유닛을 앰비언스 드라이버라고 지칭하곤 하는데, 고역을 재생하는 트위터를 장착하는 게 일반적이지만 오디오벡터는 중역을 재생하는 미드레인지를 투입했다. 목적은 앰비언스 및 사운드 스테이징 표현의 극대화를 노린다는 것. 실제 오디오벡터의 현 대표 매즈 클리포드(Mads Klifoth)와 인터뷰에서 얻은 정보다.
청음
공칭 임피던스 8Ω, 감도 91.5dB의 오디오벡터 R6 Arrete 스피커를 드라이빙하는 데 사용한 앰프는 부메스터의 032 인티앰프다. 인티앰프지만 레퍼런스급 설계를 통해 완성한 모델로서, R6 Arrete를 어르고 달래며 기분 좋은 청음이 가능케 해준 일등 공신이다. 한편 소스 기기의 경우 하이파이로즈 RS150을 단독으로 사용해 시청했다.
일반적인 돔 트위터의 소리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R6 Arrete 스피커의 사운드를 들려주면 약간의 생소함과 함께 매우 높은 해상력에 놀랄 수 있다. 높은 해상력이라면 다이아몬드나 베릴륨도 있지만, AMT 트위터가 형성하는 해상력은 조금 남다른 면이 있다. Anette Askvik의 곡 Liberty를 들어보면 포커싱은 매우 또렷하게 면도날처럼 오려 붙인 듯하다. 더불어 중역대에서 확실히 공간에 확산되는 사운드의 양상이 마치 360도로 얇은 분수가 퍼져나가는 듯한 느낌을 연상시킨다. 그만큼 곱고, 중역에서 고역으로 치닫는 양상이 활짝 열려 있어 상쾌하다. 절대 롤 오프 되지 않고 풍부한 음압으로 치고 올라간다.
Jan Garbarek과 Hilliard Ensemble의 Parce Mihi Domine 같은 곡을 들어보면 고역 부분을 좀 더 면밀히 관찰할 수 있다. 우선 고역은 활짝 열려 있고 어느 부근에서도 인지할 만큼 큰 딥이나 피크 등 주파수 응답에서 문제는 발견하기 힘들다. 한편 아코디언처럼 움직이며 소리를 내는 이 AMT는 그 두께가 두터운 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주 얇진 않다. 고밀도로 단단히 조여진 소리가 아니라 그 속이 훤히 비칠 만큼 여유 있는 밀도감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다소 서늘한 색소폰 선율과 남성 사중창단 사이의 거리도 충분히 넓고 답답하지 않게 재생한다. ‘공기 반, 소리 반’이라는 말이 생각나는 사운드다.
저역에 있어선 겉으로 보는 크기와 용적을 확실히 뛰어넘는다. 현대 하이엔드 스피커가 지향하는 정확하고 깊은 저역을 그 목적으로 하는 소리다. 이번 시청에서는 부메스터 032라는 인티앰프로 제어했지만, 더 높은 상위 분리형 앰프를 매칭해서 들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Charlie Haden과 Pat Metheny가 함께 연주한 곡 Spiritual를 들어보면 더블 베이스의 낮은 현의 움직임이 크고 역동적이다. 이는 앰프에 따라 꽤 많은 차이를 보이므로 단언하긴 힘들지만, 확실히 아이소배릭 형태의 저역 시스템을 T+A의 플래그십 분리형으로 매칭했을 때를 종합적으로 고려해 볼 때 이 사이즈의 스피커에선 상상하기 힘든 저역을 재생해낸다.
탁 트인 고역과 함께 절대 왜소하지 않고 해상도가 높은 중역, 그리고 크기를 상회하는 저역의 깊이와 타격감을 등을 고려할 때 교향곡 재생도 일정 이상의 성능을 보여주는 것이 맞다. 관건은 그 재생음의 경향인데 Thierry Fischer 지휘, Utah Symphony 연주로 말러 1번, 4악장을 들어보면 일단 AMT 트위터와 함께 두 발의 미드 베이스 우퍼, 그리고 후방 미드레인지가 합작해 만들어내는 사운드 스테이징이 매우 입체적이다. 다이내믹스 레인지가 워낙 넓어 작은 볼륨에선 종종 답답한 재생음을 내기도 하는 녹음이지만, R6 Arrete는 볼륨과 관계없이 정확한 다이내믹스 폭과 디테일, 그리고 무엇보다 입체적인 정위감 표현이 인상적이었다.
총평
오디오벡터는 R 시리즈의 각 모델에 대해 총 세 개 버전을 개발, 출시하고 있다. 상당히 독특한 시스템인데 각각 Signature, Avantgarde, 그리고 Arrete가 그것이다. 그리고 각각의 모델은 투입한 소재 및 독자적인 기술 적용에 있어 차등이 확실하다. 물론 상위 라인업으로 갈수록 더 높은 해상도와 투명도, 그리고 입체감을 자랑한다. 이번에도 Arrete라는 최상위 버전의 위력을 실감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Arrete 버전을 위해 특별히 제작된 R AMT는 대체하기 힘든 매력이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요컨대 R6 Arrete는 대체하기 쉽지 않은 AMT와 카본 우퍼에 더해 앰비언스 미드레인지와 아이소배릭 시스템이라는 일종의 치트키를 통해 성능 향상을 꾀하는 한편, 고강도 HDF 인클로저 및 나노 포어 클레이트 등으로 세밀한 댐핑을 실현했다. 그리고 전후로 풍부한 포트를 마련해 유닛의 후방 에너지를 자연스럽게 배출하면서 빽빽한 밀도감보단 자연스러운 사운드를 광대역, 고해상도로 풀어내고 있다. R6 Arrete는 오디오벡터 사운드의 정수를 담아낸 역작이다.
글 : 오디오 평론가 코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