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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MC fact 8 signa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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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비사비

때론 허름한 담벼락의 모양이나 개발에 밀려난 오래된 구시가지의 낡은 건축물에서 뭔지 모를 감흥을 느낄 때가 있다. 역사적 관점에서 해석할 수도, 또는 조형적 측면에서 바라볼 수도 있다. 모두가 화려한 디자인과 값비싼 외형을 뒤집어쓰고 있는 현대적 디자인에서 오히려 이런 낡고 오래된 것들이 주는 감흥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일단 놀라움이다. 겉은 초라해 보이지만 잘 혜안을 가지고 바라보면 그 속에 아름다운 질서와 창조적 아이디어가 묻혀 있음을 알 수 있다.

자신의 디자인에 대해 한 마디로 표현해달라는 질문에 디터람스가 말한 ‘와비사비’는 아마도 그런 의미에서 나온 것인지 모른다. 지금은 미학의 의미를 넘어 안분지족하는 삶의 태도를 나타내는 의미로 확장된 단어지만 본질적으로 “훌륭한 상태에 대한 열등한 상태”를 뜻한다. 조잡하고 간소하지만 그 자체로 평온하고 간결하며 전체적으로 균형을 내재하고 있다. 경제적 수치로 환원할 수 없는, 덜 완벽하지만 그 내면에 간직하고 있는 충만한 가치. 애플 디자이너가 디터람스의 오래되고 낡은 디자인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실토한 것은 절대 우연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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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파이 오디오에서도 종종 이런 ‘와비사비’ 같은 단어를 떠올릴 때가 있다. 최신 설계와 디자인으로 치장하고 있는 현대 하이파이 스피커를 듣다가 허름한 선술집 천정에 매달린 오래된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에 더 감동하는 경험들 말이다. 종종 찾은 어느 음악 바에서 한쪽에 쭈그리고 앉아있는 빈티지 스피커가 수천, 수억 원대 최신 스피커보다 덜 감동적이라고 말할 순 없어 쭈뼛하곤 했었다.

여기 저기 남루한 외관을 한 빈티지 스피커들에서 나름의 감흥을 얻는 것은 그것이 현재 스피커들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태가 온전하다는 가정 하에 얼마 전 들었던 독일 텔레풍켄의 비오노르나 JBL의 파라곤이 그런 경우다. 당시 스피커를 듣다보면 요즘 일부 스피커들은 그 당시 활활 타오르던 음악과 음질에 대한 열망의 상업적 이미테이션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곤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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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설계, 트랜스미션

아마 20여 년 전 즈음 북셀프 스피커 하나를 만났다. TB1이라는 이름의 스피커였다. 작은 사이즈에 가격도 정말 저렴해 동네방네 음악 애호가들 집에서 쉽게 발견되는 JBL 4312 같은 서민들을 위한 하이파이 스피커의 현재 진화형 같았다. 하지만 소리를 들어보곤 깜짝 놀랐는데 그 이유는 일단 디자인이랄 게 없는 단순 무식한 디자인에서 나오는 소리치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소리를 내주었기 때문이다. 더 놀라운 건 이 사이즈에서 내가 예상했던 스케일을 훌쩍 뛰어넘는 소리를 뿜어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인터넷을 뒤지고 브로슈어를 보면서 그 비밀을 파헤쳤다. 거기서 알게 된 단어가 바로 ‘트랜스미션라인’이라는 스피커 설계 기법이었다. 알고 보면 이 설계 기법은 새로울 것이 하나 없는, 오래된 기술이다. 연원을 따져 올라가면 1965년 ‘A Non-resonant Loudspeaker Enclosure Design’라는 제호로 소개된 A.R. 베일리라는 엔지니어의 스피커 설계 아이디어부터 시작된다. 스피커 후방 인클로저에 긴 미로형 챔버를 설계해 가장 낮은 주파수를 제외한 모든 주파수를 흡수함으로써 깨끗하면서도 깊은 사운드를 얻겠다는 발상. 이후 래드포드 일렉트로닉스, IMF 일렉트로닉스 등이 상용화하면서 주목을 받았다. 이후에도 몇몇 메이커들이 트랜스미션라인 기법 혹은 약간 변형된 설계를 활용했지만 대중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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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MC 그리고 fact 유전자

역사적으로 이 트랜스미션라인을 가장 오랫동안 끈질기게 연구해 제품으로 생산하고 있는 메이커는 바로 PMC일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TB1이 바로 이 회사의 초기 모델이었다. 이름부터 ‘Professional Monitor Company’라니 실소를 머금었지만 영국 국영 방송국의 스튜디오에 스피커를 납품한 전력을 말해주고 있으니 믿을만한 메이커였다. 이후 스튜디오 모니터 스피커 제작에서 가정용 하이파이 스피커까지 그 영역을 확장한 PMC는 커다란 인기를 모았다.

그 중 fact는 PMC의 레퍼런스 라인업이다. 상위로 fact12가 있고 그 위로는 fenestria라는 대형기가 위치하고 있다. 이번에 시청한 fact8 signature는 전작 fact8의 후속 버전으로 여러 면에서 한 차원 높은 성능으로 재탄생한 버전이다. 일단 키가 1030mm, 좌/우 너비는 155mm며 깊이는 380mm로 슬림한 전면 배플을 가지되 뒤로 깊은, 전형적인 음장형 타입의 스피커들을 떠올리게 한다.

유닛은 고역의 경우 PMC의 전매특허 19mm 소노멕스 트위터에게 맡겼고 미드/베이스의 경우 두 발의 5 1/2인치 우퍼가 담당하고 있다. 상위 모델 fact12로 가면 여기에 2인치 구경의 전용 미드레인지가 추가되며 키도 덩달아 커진다. 대개 이렇게 작은 미드/베이스 유닛을 채용하는 경우 저역 확장을 위해 사이드 우퍼를 채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fact8 signature는 고작 5 1/2인치 미드/베이스 두 발로 28Hz까지 뻗는 저역을 구사하고 있다. 참고로 고역은 30kHz까지 재생하는 광대역 현대 하이파이 스피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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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두 발의 5 1/2인치 우퍼로 이런 저역 하한이 가능한 이유는 유닛 성능도 있지만 ATL, 즉 트랜스미션라인 기법으로 설계한 인클로저 내부 설계 덕분이다. 내부 단면도를 보면 모든 유닛의 후방 에너지를 캐비닛 내부에서 한 바퀴 회전시킨 후 다시 전면 배플 하단으로 방출하도록 설계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저역 확장을 꾀하는 한편 볼륨 자체는 바뀌지 않는다. 다만 전대역, 특히 저역을 깨끗하고 투명하게 재생시켜 나머지 상위 대역을 마스킹 시키지 않는다는 장점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참고로 이 ATL 길이는 인클로저 높이의 세 배에 가까운 3미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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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스오버는 1.7kHZ 정도에 위치시켰다. 트위터의 재생 폭이 상당히 넓은 편이며 크로스오버엔 문도르프 등 고급 부품들로 꽉 채워 넣은 모습. 특히 후방엔 알루미늄을 절삭한 패널이 보이는데 여기에 PMC는 특이하게 고역과 저역의 데시벨을 조정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놓았다. 이 부분의 경우 fact8과 fact12가 각각 다르다. fact12는 고역과 저역 모두에 대해 모두 0, 즉 디폴트 지점을 중심으로 상/하 두 개 조정 포인트를 지정해놓았다. 반면 fact8의 경우 고역은 동일한 조정 방식을 취하지만 저역의 경우 0 지점을 중심으로 -1, -2 등 저역을 줄이는 방식만 선택하고 있는 모습이다.

Fact8 signature 1

시청평

시청엔 코드 SPM1400MK2 및 신형 Ultima 3 모노블럭 파워앰프 및 Ultima5, 등의 파워앰프 그리고 최상위 Ultima 프리앰프 및 마크 레빈슨 5802 인티앰프 등을 활용했다. 더불어 소스기기는 오렌드 N20과 코드 DAVE DAC를 사용했다. 은도금 바인딩 포스트는 바이 와이어링이나 바이앰핑이 가능하도록 두 조를 마련해놓았는데 점퍼 바의 품질도 꽤 좋았다. 따라서 케이블도 싱글 와이어링으로 사용했으며 사용 케이블은 어쿠스틱젠 Satori를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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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보컬이나 피아노 녹음을 재생해보았는데 넓고 깊게 형성되는 무대가 인상적이었다. Fenestria에서도 이런 음장 형성의 진보가 눈에 띄었는데 이 모델도 과거 PMC보다 더 안정되고 입체적인 무대를 만들어냈다. 나윤선의 ‘아름다운 사람’을 들어보면 무대 중앙 뒤편으로 깊게 형성되는 핀 포인트 포커싱을 경험할 수 있었다. 높은 저역을 대거 흡수한 ATL의 특성 덕분에 일반적인 룸에서 이 부분의 피크는 별로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오히려 낮은 중역에서 높은 저역 사이의 대역이 너부 얇아질 가능성이 많으므로 뒷벽으로 바짝 붙이고 사용해도 좋을 듯하다.

fact8 시그니처의 중, 고역은 마치 음원의 껍질을 완전히 벗겨낸 듯 매우 상쾌한 느낌을 지배적이다. 날 것의 생생한 사운드로 특히 코드 일렉트로닉스와 매칭시 이런 고역이 부각되어 들린다. 마치 단칼에 공기를 가르는 칼처럼 경쾌한 토널 밸런스가 매력적이다. 한편 중역 쪽은 홀쭉한 편으로 앰프 매칭에서 이런 부분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골드문트처럼 선이 가는 앰프는 금물이며 코드 같은 경우도 케이블 매칭에 신경써줄 필요가 있다. 트론트하임 솔리스텐의 브리튼 ‘Simple symphony’ 같은 곡에서도 시원한 공기를 실내를 환기시킨 듯 맑고 서늘한 공기로 음악을 환기시켜주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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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릴륨이나 다이아몬든 같은 재료를 진동판 소재로 활용하는 최근 하이엔드 스피커들 사이에서 PMC의 소노맥스 트위터는 또 다른 정체성을 획득하고 있다.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소리가 아니라 상쾌하게 무대를 압도하면 뻗어나가는 신선도가 압도적이다. 꾸밈없이 무대를 압도하는 싱싱함은 대부분 트위터에 빚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를 들어 LA4의 ‘Spain’을 들어보면 중, 고역을 오가는 관악기들의 음색이 날 것 그대로 숨 쉬며 청취자를 향해 날짐승처럼 다가온다. 빠른 악곡과 복잡한 리듬 패턴 속에서 엉키지 않고 일사불란한 물리적 움직임으로 정교하게 포착해내는 모습을 보여준다.

약음부터 강력한 투티까지 구간과 구간을 매우 섬세하게 표현해주어 긴장감 넘치는 쾌감이 돋보이는 스피커다. 사실 이런 특성은 때로 피곤한 사운드를 내줄 수 있는데 이 때문에 앰프 선택에 주의가 필요하다. 음장 측면에선 전/후 깊이가 상당히 훌륭하며 예리한 윤곽선을 통해 각각의 피사체를 매우 면밀하고 선명하게 구분해준다. 예를 들어 루이스 오타비오 산토스가 연주한 르클레르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재생하자 리클라이너에 편안하게 앉아 있다가 허리를 곧추세우게 된다. 시청 공간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높은 저역 쪽이 좀 얇은 편으로 후방 LF 조정용 토글은 가능하면 0 상태에 맞추어놓고 듣는 게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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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평

여러 음악들 그리고 여러 앰프를 매칭해가면 들어본 인상은 매우 활발하고 싱싱한 사운드를 재생하며 입체적인 무대 구현 능력의 일취월장을 확인했다. 감상 위치를 옮기면 그대로 또 다른 음장을 형성해주었으며 크기를 감안할 수 없을 만큼 넓고 광대한 무대를 펼쳐냈다. 뒤로 가면 무대를 넓게 조망할 수 있고 앞으로 다가서면 무대 안으로 빨려 들어갈 듯한 느낌을 확실하게 느꼈다. 코드 일렉트로닉스는 굳이 상위 모델이 아니어도 Ultima 5, 6만으로도 충분했고 의외로 마크 레빈슨 5802가 차분한 음조와 충실한 중역대로 좋은 상성을 보였다.

결론적으로 fact8 시그니처는 팝과 록, 클래식, 재즈 등 그 어떤 음악도 훌륭하게 재생한다. BBC 모니터 스피커 제작사답게 특정 장르에 치우치지 않은 음악의 본질을 확실히 알고 접근했다. 그 바탕에 여러 시뮬레이션 소프트웨어 및 ATL 관련 최적화 설계 기법 등이 자리하고 있다. 문도르프 등 탁월한 고품질 소자와 편리한 고역/저역 조정 기능까지 더해 가정에서 콘서트홀에서의 음악적 실체에 더 가까이 도달할 수 있도록 고안된 스피커다. 적당한 앰프만 만나면 하단 덕트를 통해 우렁찬 배기음을 내며 금방이라고 먼지를 툴툴 털고 일어나 경쾌하게 질주할 것만 같은 모습이다.

Written by 오디오 칼럼니스트 코난

Available Finishes:White Silk, Metallic graphite
Crossover Frequency:1.7kHz
Dimensions:H 1030mm (40.6″) + 25mm spikes, W 155mm (6.1″) +80mm ingot feet, D 380mm (15″) + 10mm grille
Drive Units:
LF – 2 x fact 140mm (5.5″) super-long-throw
HF – 1 x fact 19mm high-res, SONOMEX soft dome, ferro-fluid cooled
Effective ATL™ Length:3m (9.8ft)
Frequency Response:28Hz – 30kHz
Impedance:8 Ohms
Input Connectors:2 pairs 4mm PMC Ag terminals (Bi-amp or Bi-wire)
Recommended Amp Power:15 – 200W
Recommended Drive Unit Torque Settings:HF: 0.6 MF: 0.75 LF: 0.75
Weight:20kg (44lbs)

Written by 코난

코난 이장호는 하이파이 오디오를 평가하는 평론가다. <고음질 명반 가이드북 1,2> 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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