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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날로그 사운드의 복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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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의 발견

살다 보면 자의든 타의든 다양한 물건과 함께하게 된다. 그래서 호기심에 이것도 가져보고 저것도 가져보지만 호주머니가 꽤 무거울 때나 가벼울 때나 찾는 것들이 있다. 나는 바로 그것이 나의 취향에 가장 적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사람의 취향이란 그 반경이 생각보다 넓지 않아서 이런 저런 것들과 함께하다가도 결국은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돌아가곤 한다. 생일 선물로 받고 싶었던 신발 하나를 고르느라 일주일 넘게 고민해서 고른 것이 막상 신어보고 나니 수 년 전에 신었던 것과 그리 다르지 않다는 걸 알았을 때처럼 말이다.

오디오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이제 20여년이 넘어가는 오디오란 취미 생활을 어찌 이 작은 지면에 다 담을 수 있겠냐만 또렷이 기억나는 모델들이 꽤 있다. 취향의 바운더리 안에서 계속해서 여러 번 나의 간택을 받을 물건들이다. 예를 들어 스피커는 다인이나 토템 같은 경우 동일한 모델을 여러 번 들인 적이 있다. 뿐만 아니라 앰프 같은 경우도 그런데 예를 들어 플리니우스나 패스랩스 같은 제품들은 “결국 돌고 돌아 이것이란 말인가”라는 자조적인 생각이 들 정도로 여러 번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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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스기기 쪽으로 가도 동일 모델을 여러 번 구입했다가 처분하곤 했다. 그것은 이상하게도 PC-FI니 네트워크 스트리밍이 하이파이 오디오로 편입되기 이전에 집중되어 있다. 예를 들어 린과 메리디안 그리고 레가다. 이 메이커 제품은 쫓겨났다가 다시 영입되기를 반복했다. 그 땐 소스기기는 질감, 음색 표현이 좋은 기기들을 선호했다. 앰프도 마찬가지여서 아마도 스피커는 극도로 해상력이나 정위감 위주의 차가운 스피커를 자주 사용한 것이 그 이유이기도 하다. 이른반 상성 조합을 통해 서로 장, 단점을 보완하려고 하다 보니 소스기기는 해상도나 분해력이 조금 빠지더라도 아날로그 사운드와 같은 부드럽고 질감 표현이 좋은 걸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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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날로그 소스기기 또한 기억나는 기기들이 있다. 예를 들어 린의 LP12 그리고 레가 25주년 턴테이블을 들 수 있다. 아직도 기억나는 건 한밤중에 오래된 LP12를 구입해서 밤새 서스펜션과 암보드를 세팅하다가 꼬박 밤을 샌 일이다. 그러다가 전원부도 바꿔보고 카트리지도 바꾸어보다가 질리면 다른 턴테이블로 교체했지만 몇 년 단위로 다시 LP12를 들여놓곤 했다. 레가도 비슷한 경우인데 레가의 여러 다른 모델들을 써왔으면서도 유독 25주년과 P5 턴테이블을 여러 번 사용했던 기억이 난다. 단아한 베이스와 불필요한 겉치장이 없는 톤암. 그러나 카트리지 장착 및 세팅이 무척 수월했던 것도 한 몫 했으리다. 그런데 어떻게 이 작고 볼품없는 디자인의 턴테이블에서 그렇게도 음악적 울림이 펼쳐지는지! 취향의 발견은 경험에서 얻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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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가

레가는 볼 때마다 기특했다. 아마도 여러 번 들이고 내치기를 반복했던 기기는 사실 여유만 있다면 평생 회로해도 좋을만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나의 취향 안에 매우 정확히 부합하는 요소들을 무척 많이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몇 달 전 나는 다시 레가 턴테이블을 들였다. 모델명은 RP10. 지금은 Planar 10이라는 후속 기종이 나왔지만 RP10만 해도 여전히 쓸 만한 턴테이블이다. 레가의 플래그십 턴테이블이고 그만큼 자신들의 축적된 기술을 투입해 자신 있게 선보인 모델이니까 말이다. 이 글은 아마도 가장 최근, 그러니까 1년 안쪽에서 진행된 나의 아날로그 라이프에 대한 기록이다.

누구나 그렇지만 오디오를 내 것으로 만들면 처음엔 내 시스템 안에서, 내 공간 안에서 과연 어떤 소리를 내주는지 테스트하느라 며칠을 보내기 마련이다. 유튜브에서 들은 것은 실제와 다르며 오디오 숍에서 들었던 것도 1000% 나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이젠 앰프나 소스기기 매칭에 들어간다. 처음부터 원하는 소리가 나오기 힘들고 만약 어느 정도 좋은 소리가 들더라도 스피커의 능력을 최대치로 뽑고 싶은 것이 사람의 심리다.

레가 RP10 같은 경우 일단은 카트리지를 Exact 2로 시작했다. MM 카트리지만 웬만한 MC 카트리지보다 좋은 음질을 들려주었다. 게다가 당시 내가 가지고 있던 벤츠 마이크로, 다이나벡터나 골드링 같은 카트리지와 비교해서도 자신의 개성이 분명했다. 나름 다른 카트리지에 비해 아무 엘피나 막 들어도 그리 부담이 없었고 장르를 그리 타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후 다른 카트리지로 들어보면서 RP10의 능력을 더 실험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것도 사실이었다. 욕심은 그렇게 쉽게 사그라들지 않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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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ia 그리고 Pro

이미 가야할 길은 애초에 정해져 있었는지도 몰랐다. 레가 턴테이블과 카트리지를 순차적으로 리뷰하면서 레가 사운드에 푹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랫동안 사용해온 트랜스로터 사운드에 대해 호기심이나 업그레이드, 도전 의지가 한 풀 꺾인 탓도 있었다. 한편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레가는 많은 가능성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레가는 본체나 톤암 등에서 뭔가 업그레이드할 여지가 거의 없다. 좋은 받침대 정도를 깔아주는 것이 주인이 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업그레이드였다.

하지만 카트리지에 대한 경험은 또 다른 세계를 열어주었다. 레가 턴테이블은 많이 사용해봤지만 레가 카트리지에 대한 경험은 리뷰 몇 번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또한 리뷰를 진행할 때와 진짜 내 것이 되었을 때의 감정은 조금 다르고 그것은 매우 높은 집중력과 탐구열로 귀결된다. 결국 Ania에서 한 스텝 더 나아가서 Ania Pro를 손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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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카트리지는 Exact 2로 듣던 RP10에 대한 나의 생각을 한 순간에 뒤집어놓았다. 질감 표현이 좋고 두께, 특히 중역 두께가 도톰하게 솟아올라 담백한 맛이 좋은 레가 사운드의 정점이 Exact였다. 하지만 Ania Pro는 하이엔드 사운드를 지향하고 있었다. 내가 가장 좋아해 여러 번 구입해서 사용했던 카트리지가 있는데 다름 아닌 벤츠 마이크로 Glider다. 그런데 Ania Pro에선 Glider의 향기가 났다. 물론 더 깊고 묵직한 저역은 덜했지만 음색은 유사한 면이 많았다. 게다가 중, 고역 해상도나 세부 표사는 최신 카트리지답게 예리하기까지 했다.

Ania Pro는 사실 사용한 지 4개월이 넘어가고 있는 시점이다. 처음 들을 때와 비교해서 전체적으로 자연스럽게 몸이 풀려 정보량이 한껏 높아졌고 무엇보다 즐겨 듣는 음악들의 음악적 뉘앙스 표현이 섬세해졌다. 원래 새로운 기기를 들이거나 바꾸게 되면 블로그에 포스팅을 하곤 하는데 이 카트리지는 나의 시스템에 들어온 이후 카트리지 업그레이드 욕심을 불식시켰다. 뭔가 더 어필하고 싶은 마음도 없어져 오히려 소개를 하려는 의지도 사라졌다. 종종 딱 적당히 마음에 들면 별로 내색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는데 그런 경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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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키 리 존스의 ‘Stewart’s coat’에서 보컬은 활짝 열려 있으며 중, 고역이 저역에 비해 적지 않고 개방감 있게 뻗는다. 다분히 밝고 화사한 토널 밸런스를 보여주어 주눅 들거나 질척거리는 특성도 없다. 오히려 풋풋하고 청취자를 향해 밝게 웃음 짓는 듯한 표정을 보여준다. 한편 베이스 기타의 경우 예상보다 꽤 두텁고 낮은 대역에서 그르렁거리는데 딱딱하게 조여진 느낌보단 어느 정도 풀어놓은 인상이라서 지나치게 단단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일렁이는 모습이다.

내가 사용하고 있는 시스템은 현재 레가 RP10 턴테이블이며 포노앰프는 패러사운드 XRM이다. 세팅은 MC, 게인은 60dB로 올려놓고 듣는 중이다. 로딩 임피던스는 100옴 정도면 충분. 앰프는 프리마루나 EVO400을 사용했고 스피커는 베리티 Rienzi를 활용했다. 휘몰아치는 음장 중심의 디지털 사운드보단 편안히 아날로그 사운드를 듣는데 자주 사용하곤 하는 시스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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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가 Ania Pro는 이런 시스템에서도 확실히 자신의 따스하면서도 해상도 높은 사운드를 펼쳐보였다. 레가만의 중역대 심도와 두께는 여전하다. 그러나 Exact는 물론 기존 Ania에 비해서도 해상력, 선예도 등이 수직 상승한 모습이다. 예를 들어 아르네 돔네러스의 ‘Antiphone Blues’ 앨범을 들어보면 색소폰 사운드의 표면이 매우 곱게 반짝이는 듯한 사운드를 펼쳐낸다. 강력하고 짜릿한 사운드의 반덴헐 같은 카트리지보단 조금 더 차분하면서도 낼 소리를 다 내주는 벤츠 마이크로 같은 카트리지를 닮은 질감 표현이 청취자를 음악 속으로 자연스럽게 밀어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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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트랜스로터 ZET-3MKII에 사용하고 있는 다이나벡터 같은 경우 더 에지 있고 단단한 스타일이다. 하지만 레가 RP10에 Ania Pro를 장착한 상태에서 들어보면 단단함은 좀 덜하지만 잔향이 더 풍푸하고 무엇보다 음악을 긴장감 없이 술술 자연스럽게 풀어낸다. 비트가 강조되는 록이나 팝 음악에서도 Ania Pro의 성격은 어김없이 드러낸다. 드림 시어터의 ‘Pull me under’를 들어보면 일사분란한 드럼 타격이 중, 저역에서 든든하게 받치고 그 위로 기타, 키보드가 넘실댄다. 특히 음악에 온기를 불어넣어 감성적인 표현을 차갑게 식히지 않고 싱싱하게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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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장 측면에선 악기들이 너무 비좁게 붙어서 빽빽한 모습이 아니라 충분한 거리를 두고 연주하는 모습을 표현해준다. 레가가 이 정도의 음색을 표현해준다는 것은 예전에 상상하지 못했던 것으로 특히 솔로 바이올린, 피아노 같은 악기들에서 답답하지 않게 뻗어주는 고역에 더해 전매특허인 중역의 질감이 더해서 달콤한 사운드를 즐길 수 있다. 예를 들어 진공관 녹음으로 유명한 TACET의 ‘The Tube Only Violin’에서 들려주는 바이올린 사운드는 엔벨로프 특성이 훌륭해 음결의 이음매가 자연스럽게 표현되며 음악에 대한 집중력을 길게 유지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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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heta에 더 가까이

이미 수 년 전에 Ania를 사용해보았고 이후 4년이 지났다. 그 사이 나는 레가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RP10을 다시 들이는 만행을 저질렀다. 도대체 레가를 몇 번을 쓰는 건지…오직 최고의 하이엔드 사운드를 구축하려 했다면 바꿈질에 소요되는 비용을 모아 한 번에 더 화려한 제품을 충분히 구입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나로 만족할 수 없거니와 때론 더 값비싼 턴테이블보다 ‘레가면 충분해’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어쩌면 조금 고아한 나의 성격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카트리지도 마찬가지인데 Ania는 이 턴테이블에, 아니 내 몸에 아주 꼭 맞는 맞춤 정장 같은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문제는 Ania Pro로 오니 자꾸만 ‘조금만 더’를 가슴 저 밑바닥에서 부르짖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이는 자꾸만 Apheta에 가까워진 사운드를 끌어당겨 소환시켰기 때문이다. 강력한 네오디뮴 마그넷 및 수작업으로 감은 마이크로 코일 그리고 고강도 PPS 바디, 그리고 무엇보다 Apheta 2에서 사용한 것과 동일한 누드 다이몬드 스타일러스 채용한 점이 눈에 띄는데 아마도 Apheta 2의 외장 하우징만 바꾼 것이 Ania Pro라는 소문이 맞는 것 같다는 추측이 들었다. Ania Pro는 아날로그 사운드의 새로운 복병임이 분명하다.

글 : 오디오 평론가 코난

Written by 코난

코난 이장호는 하이파이 오디오를 평가하는 평론가다. <고음질 명반 가이드북 1,2> 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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