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28일, 음악가 류이치 사카모토가 세상을 떠났다. 세상의 모든 죽음은 이유가 존재한다. 비보를 접한 주말 저녁이었다. 순간 필자가 사랑했던 그의 음악적 결과물들이 주마등처럼 이어졌다. 71세라는 때 이른 죽음을 애도하면서 그의 영화음악 4편을 소개해본다.
1988년으로 기억한다. 극장에서 처음 접한 그의 음악은 영화 <마지막 황제>였다. 162분에 달하는 러닝타임이 적지않게 지루했던 <마지막 황제>는 내용보다 OST가 기억에 남는 작품이다. 관람 후에 영화음악가를 검색해보니 한국과 중국을 지배했던 제국주의 일본 출신의 음악가였다. 그런 아이러니한 감정이 그와의 첫 인연이었다.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은 미국,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와 합작한 중국의 역사를 <마지막 황제>라는 영화로 남긴다. 나열한 4개의 국가는 경쟁적으로 식민지 통치에 열을 올렸던 패권국가다. 그들은 영악하게 중국의 흑역사에 (구)소련과 일본만을 방패로 내세운다. OST의 압권은 [Rain]이다. 점층적으로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류이치 사카모토 특유의 작곡법이 빛을 발하는, 영화의 절반이나 다름없는 수작이다.
배우 이병헌, 김윤석이 등장하는 영화 <남한산성>의 OST 역시 류이치 사카모토가 담당했다. 병자호란이라는 치욕의 역사에서 등장하는 2명의 인물 최명길(이병헌 역)과 김상헌(김윤석 역)의 연기대결이 영화의 축이다. 그들은 모두 고립무원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고자 했던 조선의 충신이 아니었나.
반일감정의 파고가 여전한 한국에서, 슬픈 역사를 소재로 한 작품에서 일본인 음악에게 OST를 맡겼다는 제작진의 용기가 궁금했다. 사실 류이치 사카모토는 음악을 넘어 환경과 평화라는 화두에 충실했던 인물이었다. 음악가적 역량과 함께 인간의 조건이 <남한산성>의 깊고 우울한 OST로 이어진 것이 아닐까. 피아노 버전의 [출성]이라는 곡이 화인처럼 필자의 가슴에 남아 있다.
신촌 아트레온에서 감상한 다큐 <코다>는 2012년부터 2017년까지 음악활동을 이어가는 류이치 사카모토가 등장한다. 필자는 그가 암투병 중이라는 사실을 <코다>를 통해서 처음 알았다. 시종일관 진중한 어조로 자신의 음악세계를 설명하는 장면은 평소 상상했던 류이치 사카모토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영화 <코다>에 등장하는 류이치 사카모토의 목소리는 다음과 같다.
“우리는 날마다 소리에 둘러싸여 있지만
보통은 그런 소리를 음악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소리에 귀 기울여 본 다면
음악적으로 재미있고 흥미롭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 소리들을 내 음악에 넣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그의 역량을 세상에 알린 <전장의 크리스마스>를 소개한다. 라는 원제를 가진 이 작품은 로커 데이빗 보위, 배우 톰 콘티, 연예인 기타노 다케시라는 특이한 배치가 눈에 띈다. 게다가 일본인 장교로 등장하는 인물은 류이치 사카모토다. 게다가 감독 오시마 나기사는 재일교포 차별문제를 포함한 일본의 폭력성을 영상으로 구현하는 인물이다.
영화의 압권은 지배자에서 사형수로 입장이 바뀌어 버린 기타노 다케시의 마지막 모습이다. 그는 특유의 묘한 미소와 함께 이렇게 말한다. “Merry Christmas Mr. Lawrence”. Killing OST는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동명곡이다. 모든 죽음은 이유가 있다. 내게 류이치 사카모토의 죽음은 아쉬움 그 자체였다.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류이치. 그곳에서 부디 행복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