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종 하이파이 오디오 메이커들이 SE, MKII, Signature 에디션을 발표한다. 때론 출시일 기준 10주년 등을 기념하기도 하는 등 다양한 명분을 내세우곤 한다. 대체로 이런 경우 기존 버전을 변주하거나 약간 디자인을 바꾸는 등 차이점을 볼 수 있다. 하지만 그저 외관의 변화나 혹은 명판 등의 표식 정도에 그치고 대체로 내부 설계 부분에선 그다지 많은 변화를 보기 힘든 경우도 있다.
B&W 같은 경우 종종 시그니처 에디션을 발표해왔다. 멀리 돌아가면 실버 시그니처 버전이 있다. 25주년 그리고 30주년 등이 있었는데 실버라는 말이 붙은 것은 내부 배선에 모두 순은 케이블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네트워크를 외부를 빼서 설계하는 등 파격적인 시그니처 버전을 선보이기도 했다. 또 하나 노틸러스 800 시리즈도 시그니처 버전이 있었다. 지금 보아도 뛰어난 마감과 특별한 내부 튜닝은 한 때 이 스피커의 컬렉터가 있을 정도였다.
또 하나 기억에 남는 B&W 시그니처 버전은 아마도 40주년 기념으로 출시했던 실버 다이아몬드 스피커였다. 당시엔 상당히 파격적인 디자인으로 시선을 모았었는데 당시 다이아몬드 트위터를 선도적으로 투입했고 디자인은 케네스 그렌지 경의 손에 맡겨졌다. 대리석 트위터 캐비닛을 비롯해 모든 부분들이 정말 특별한 스피커로 기억된다. B&W의 시그니처 에디션은 한 마디로 파격이었고 모험처럼 보였지만 시대를 항상 앞서가는 미래의 미리보기 같은 존재였다.
최근 B&W는 800 다이아몬드 D4 버전에 대해 두 가지 시그니처 버전을 출시했다. 각각 플로어스탠딩 최상위 모델과 북셀프 최상위 모델에 한해서다. 801D4 시그니처, 805D4 시그니처가 그 주인공. 그리고 이 모델들의 국내 출시를 기념해 롯데 백화점에서 런칭 쇼케이스가 열렸다. B&W 소속 그룹인 사운드유나이티드는 특별히 APAC 지역 브랜드 총괄 담당자를 파견했다. 롯데 백화점 8층으로 올라가자 B&W 매장이 눈에 띈다. 그리고 좀 더 걸어가 행사장에 도착하자 드디어 시그니처 버전들이 눈에 들어왔다.
사진으로만 보던 미드나잇 블루 메탈릭 마감은 사진보다 약간 더 어두운 톤이었다. 그래서인지 기존에 많이 보았던 블랙, 화이트 등의 800 다이아몬드 D4 스피커에 비해 더 육중하고 권위적인 뉘앙스를 풍겼다. 하긴, 원래 노틸러스 800 시리즈부터 이 스피커 라인업을 처음 디자인한 워렌 모튼이 왕좌에 앉아 있는 왕의 모습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하니 그 의도에 더 가까워진 것 같기도 하다. 여기에 더해 검푸른 빛은 전통적인 분위기에서 탈피해 미래 지향적인 뉘앙스가 느껴졌다.
시그니처 에디션의 특징들
우선 이번 시그니처 에디션은 외관을 떠나 새로운 드라이브 유닛을 채용했다. 완전히 다른 유닛을 아니지만 내부 바스켓 및 마그넷 등의 변화가 있었다고 한다. 801D4의 경우 두 개의 베이스 우퍼에 재설계 및 업그레이드가 이뤄졌고 805D4도 미드 베이스 우퍼에 동일한 업그레이드가 적용되었다. 결과적으로 인덕턴스를 낮추고 왜곡을 더욱 없앴다고 한다.
스피커의 알파와 오메가라면 유닛 다음으로 캐비닛을 들 수 있다. 이번 시그니처 에디션은 미드레인지 유닛 하단에 마련된 탑 플레이트를 교체했다. 기술진들은 극단적인 측정 및 분석을 통해 다시 한번 이 상판의 공진을 낮출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고 한다. 잘라낸 단면을 보면 탑 플레이트 바닥 쪽에 특수 가공된 구멍을 볼 수 있는데 이런 구조적 재설계를 통해 캐비닛 진동을 더욱 감쇠 시키는 데 성공했다.
다음으로 스피커 설계의 화룡점정이라고 할 수 있는 크로스오버 네트워크도 개선되었다. 궁극적으로 크로스오버는 필요악이지만 해악은 최소화하고 원래의 의무인 주파수 분할 및 평탄한 주파수 특성에 더 다가갈 수 있었다. 이를 위해 연구진은 기존 버전보다 훨씬 더 비싼 바이패스 커패시터를 추가 사용했다. 이 또한 801D4는 물론 805D4 두 모델에 모두 적용했으며 이를 통해 왜곡은 줄이고 중역과 고역에서 더 매끄럽고 깨끗한 재생음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외에도 다양한 업그레이드가 엿보인다. 예를 들어 트위터의 메쉬 그릴은 이 스피커 라인업의 가장 큰 시그니처 디자인인데 그릴의 홀 디자인을 변경했다. 가까이에서 봐야만 확인 가능한 것으로 기존의 홈 모양이 바뀌었고 홀의 면적이 넓어진 것을 알 수 있다. 이 홈의 모양은 ‘다윗의 별’이라고 하는데 이런 보호 그릴의 디자인 변경을 통해 더 개방적이면서 확산 효율을 높이고 있다.
한편 후방의 포트도 변화를 주었다. B&W의 플로우 포트 디자인은 더할 나위 없이 뛰어난 방사 특성을 보인다. 바닥면에 위치해 사방으로 자연스러운 방사하는 설계인데 기존 플라스틱 소재를 이번엔 알루미늄 소재를 전격 교체했다. 예상할 수 있는 성능 향상은 당연히 저역의 속도 개선과 포트 노이즈 최소화를 통한 투명하고 단단한 저역이라고 볼 수 있다. 확실히 스피커의 성능 향상에 있어 포인트가 될 수 있는 지점을 세밀하게 파악하고 있는 B&W의 모습이다.
드디어 음질적인 면을 알아볼 수 있는 시간이 왔다. 여러 곡들을 준비했는데 비틀즈, 류이치 사카모토 등 브랜드 매니저의 음악적 안목이 꽤 깊어 보였다. 국내에 내한하는 브랜드 담당자들 대부분이 세일즈, 마케팅 분야 담당자들이 대부분이고 형식적인 인터뷰에 그치는 경우가 많은데 이번엔 달랐다. 하지만 음악 시연을 위해 준비된 공간이 아니어서 이는 감안하고 시청에 들어갔다. 참고로 앰프는 클라세 델타 프리앰프와 델타 모노 블록을 사용했다. 특히 파워앰프의 경우 모노블럭을 두 조 동원해 바이앰핑했다. 한편 소스 기기의 경우 맥북에서 USB 출력을 통해 델타 프리앰프의 내장 DAC를 활용했다.
음악은 매우 다양했다. 팝부터 재즈, 클래시컬까지 프레데릭의 선곡이 상당히 변화무쌍하면서 B&W를 위시로 한 시스템의 성능을 파악하기 좋은 곡들이었다. 비틀즈의 ‘Come together’로 시작을 알렸다. 2018년 리마스터링 버전 음원으로 재생해주었다. 비틀즈는 애비 로드 스튜디오에서 여러 앨범을 녹음했고 애비 로드 스튜디오는 모니터 스피커로 B&W를 사용해온 것으로 유명하다. 이 외에도 요시 호리카와의 ‘Bubbles’, 밥 제임스의 ‘Rocket man’ 선곡도 좋았다. 특히 밥 제임스의 곡은 DSD 음원으로 재생해주었다. 이어 나 또한 오디오 리뷰에 종종 사용하는 밥 딜런의 ‘Man in the long black rain coat’를 재생해주었다.
이어 팝 음악도 B&W의 성능을 알아보기 좋았다. 예를 들어 캔디스 스프링스의 ‘Breakdown’ 같은 곡이다. 이 곡은 마란츠의 음질 튜닝을 책임지고 있는 사운드 마스터 요시노리 오가타 상의 애청곡이라고 한다. 참고로 마란츠 또한 B&W와 함께 사운드 유나이티드 소속이고 B&W를 레퍼런스로 사용한다. 이어 조르디 사발이 맡아 화제가 되었던 영화 ‘세상의 모든 아침’은 원전 악기들의 그 섬세한 음색 표현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편 얼마 전 생을 마감한 류이치 사카모토의 ‘Merry Christmas, Mr. Lawrence’는 2013년 라이브 실황 버전으로 시연해 현장감을 북돋았다.
마지막으로 프레데릭의 센스가 빛나는 선곡도 있었다. 그는 아내와 함께 넷플릭스에서 한국 드라마를 즐겨 본다고 한다. 그 중 최근엔 재밌게 시청했던 드라마가 ‘사랑의 불시착’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극 중에 흐르는 노래가 하나가 좋았다면서 송가인의 ‘내 마음의 사진’을 시연해주었다.
B&W의 시그니처 에디션 쇼케이스는 이렇게 마감되었다. 확실히 B&W는 시그니처 에디션의 전통을 확실히 이어오고 있다. 실버 시그니처 25부터 시그니처 라인업만 모아놓아도 그 역사를 짐작할 수 있을만큼 B&W 사운드의 최전선을 보여준 것이 시그니처 에디션이다. 이번 버전도 유닛, 인클로저, 크로스오버, 포트 설계 등 스피커 설계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들에 섬세한 엔지니어링과 디자인을 선보이면서 다음 세대를 더욱 기대하게 만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