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신호의 운반책들
오디오를 구입하면 케이스를 분해해 내부를 들여다보는 습관이 있다. 소스 기기, 프리앰프, 아워앰프 그리고 때론 스피커를 열어보기도 한다. 중고 제품인 경우 내부 회로나 부품들의 제 부품인지 또는 수리 이력이 없는지 확인도 할 겸 내부 설계와 부품들의 실장 모습을 보는 게 그저 재미있어서다. 그런데 심각한 수리 이력이 발견이라도 되면 잠이 오질 않는 등 후유증이 오래 가기도 한다. 옛 말에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이 생각나기도 한다. 스피커 코일이 교체된 경우나 앰프의 커패시터가 재치가 아닌 경우는 태반이다. 때론 PCB의 기판이 망가져 억지도 케이블로 연결, 자체적으로 하드와이어링 솜씨를 발휘한 것도 보았다.
하지만 신품도 열어보는데 이 경우엔 그저 내부 회로를 분석해보기 위한 것이다. 때론 너무 텅 비어서 구경거리가 못되는 경우도 있고 어떤 경우는 2중, 3중으로 분해가 너무 어렵게 설계되어 있어 살짝 욕이 나오는 경우도 있다. 내부 설계 및 기판 구조들이야 설계 방식에 따라 천차만별이지만 때론 신기한 경우도 있다. 처음 진공관 앰프를 열어보았는데 PCB 기판 자체가 없는 것이다. 기판을 통해 신호를 전달하지 않고 모두 케이블로 부품들을 하나하나 연결해놓는 설계. 이를 ‘하드 와이어링’이라고 해서 주로 진공관 앰프들에서 쓰인다.
앰프는 물론 소스 기기 심지어 스피커의 경우도 내부엔 케이블로 연결된 부분들이 있다. 이유는 신호의 순도를 최대한 유지하기 위해서다. PCB 기판을 이동하면서 생기는 접점들의 상승은 물론 때로 기판 자체와 트레이스의 완성도가 현저히 떨어지는 경우 음질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과거 마크 레빈슨 앰프들 중에 아론 기판이냐 아니냐에 따라서 가격 차이가 상당히 많이 났던 기억도 있는데 이도 품질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더 깊게 들어가면 스피커나 앰프, 소스 기기들 중에 내부에 OFC를 벗어나 고순도 OCC나 심지어 순은선을 쓰는 모델들도 있다. 실텍, 노도스트, 크리스탈케이블, 킴버, 트랜스페어런트 등이 생각난다. 음악 신호의 운반책들 중엔 분명히 케이블로 한자리 차지하고 있다.
연금술사 실텍
실텍이 재미있는 건 다른 메이커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정밀 기술을 통해 자사만의 독자적인 도체를 개발해냈다는 것이다. 여타 메이커의 경우 알고 보면 OEM이고 알고 보면 시중에서 판매되는 케이블 제조사에 특주를 통해 공급받은 도체를 사용해 만드는 것을 많이 보았다. 하지만 실텍은 도체에서 절대 타협 없이 주조 공정을 거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들이 가장 최선이라고 믿는 도체의 종류는 특주 같은 형태로 만들어줄 수 있는 곳이 거의 없을 듯하다. 예를 들어 누가 순은 도체의 매우 작은 입자 사이 간극에 금을 주입해주겠는가.
여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 실텍은 위 실버/골드 도체 외에도 순은 모노 크리스털 도체를 개발, 제작하고 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구리냐 은이냐, 팔라듐이냐를 넘어 도체의 품질을 이야기할 때 기준으로 삼는 것 중에 순도가 있다. 99.9999%면 6N으로 이 정도면 충분한 순도라고 볼 수 있다. 더 높은 순도가 과연 의미가 있을까 싶다. 그보다 중요한 건 도체의 입자 배열에 있다. 결정들의 제 멋대로 배열되어 있고 그 사이 불규칙한 조직 내 균열이 있을 경우 이는 시그널 전송에 악영향을 준다는 것이 정설이다. 실제 청감상 구별이 되느냐 아니냐를 넘어 완성도를 하락시키는 원인이 된다. 이를 규칙적으로 한 반향으로 배열시켜 그레인을 최소화한 것이 OCC라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저항, 인덕턴스 등 다양한 지표들에서 우위에 서게 된다.
연금술사 실텍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애초에 그레인 자체가 거의 없는 모노 크리스탈 도체를 탄생시켰다. 그레인지 생기는 원인은 여러 입자들의 배열에서 오는 것이므로 아예 이 입자를 극단적으로 키우면 그레인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이를 만들어내는 과정은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것으로 알고 있다. 광물을 녹이고 금속을 분리하는 등 일반적인 주조 과정이 아니라 결정을 키워내는 방식으로 만들어내다. 고온에서 결정을 아주 천천히 키워내는 방식이며 이렇게 만들어낸 결정을 다양한 방식으로 절단해 원하는 도체를 얻는다고 한다.
왕이 될 자인가?
실텍이 그들의 이름을 걸고 탄생시킨 최상위 모델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이번 시간에 그 중 트리플 크라운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손에 쥔 트리플 크라운은 화려한 외관을 지니고 있다. 부드럽고 고급스럽게 직조된 피복 사이로 금색 단자와 스플리터가 장착되어 있어 손에 쥐는 맛이 있다. 하지만 단순해 보이는 이 케이블은 그야말로 은 덩어리라고 할 수 있다. 도체뿐만 아니라 단자 자체도 순은으로 단자만 가지고도 순은 케이블 한 조는 너끈히 만들 수 있을 정도다. 그야말로 화려함의 극치로 보인다. 과연 왕이 될 자격을 갖추었는가?
문제는 내부에 있다. 이 케이블을 구성하는 도체는 S10 순은 모노 크리스탈이라는 것이다. 여타 라인업이 G9 실버/골드 도체를 사용하고 있는 반면 트리플 크라운으로 오면 S10 모노 크리스탈 도체가 등장한다. 이는 위에서 설명했던 그레인을 거의 없애버린 도체로서 그레인으로 인한 신호의 왜곡, 손실이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더불어 소재가 순은으로서 케이블이 잘 휘어지면서 부드럽고 가벼운 특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설치도 쉽다.
한편 절연은 유전율이 낮은 소재 중 실텍이 엄선한 캡톤 그리고 테플론 등을 혼용하고 있다. 그 다음으로 차폐는 실텍에서 일명 ‘와이드 레인지 차폐’라고 불리는 공법을 사용한다. 특히 실텍은 이를 기반으로 독특한 그라운딩 시스템을 만들었다. 그라운드, 즉 신호선을 제외한 접지 케이블을 단락시킬 수 있도록 설계한 모습이다. 시스템에 따라 그라운드 환경은 매우 다를 수 있는데 이를 운영하는 사람이 직접 조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유익한 기능라고 볼 수 있다.
한편 단자 또한 대단히 인상적이다. 이 화려한 모습의 단자까지도 실텍은 도체의 소재인 S10 순은 모노 크리스탈 도체를 사용했다. 더블 크라운 같은 경우 오야이데에 특주한 포커스 단자를 사용하고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더불어 각 플러그를 사용해 커넥터를 90도 회전시킬 수 있다. 최대한 유연하게 만들긴 했지만 좁은 오디오 뒤 공간에서 장착할 경우 유용할 듯하다. 이러한 도체 및 절연, 특수한 차폐 기술 및 단자 등을 채용한 트리플 크라운은 케이블로 인해 만들어질 수 있는 전기적, 물리적 변이를 최소화하고 있다. 저항, 커패시턴스, 인덕턴스 등을 최소화한 것. 특히 트리플 크라운은 18pF/m 이라는 아주 적은 커패시턴스를 완성했다. 참고로 이 수치는 더블 크라운의 1/5에 지나지 않는다.
청음
실텍 트리플 크라운 XLR 케이블의 테스트엔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정도의 메머드급 하이엔드 시스템을 동원했다. 우선 소스 기기로 T+A MP3100HV를 사용했으며 프리앰프는 P3000HV을 투입했다. 한편 앰프는 총 네 덩어리로 구성되었는데 A3000HV 두 대를 모노 브리지로 연결했다. 여기서 끝나지 않고 각 파워앰프마다 PS3000HV라는 전용 독립 전원부를 연결해 파워앰프의 성능을 극대화했다. 마지막으로 스피커는 윌슨 베네시의 대형기 Omnium을 연결해 테스트했다. 크리스탈 케이블의 다빈치를 사용하다가 실텍으로 바꾸는 등의 과정을 통해 변별력을 높였다.
샨탈 챔버랜드 – Temptation
실텍을 처음 도입하면 살짝 부드럽게 녹아들어 유연한 소릿결을 보여준다. 마치 엿가락처럼 탄력이 있고 음결은 매우 부드러워 마치 곱게 빻은 빵가루처럼 흩날릴 듯하다.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듯하다가도 끈기가 있어 악기들의 세부 디테일을 뭉개지 않는다. 전반적으로 해상력은 최고조에 달해 있는 케이블로서 소리의 윤기, 세부 표현 등이 모두 머리칼이 쭈뼛거릴 정도로 드높다. 원래 이런 소리 입자들이 있었는지 의아할 정도인데 케이블로 인한 소리 차이가 이렇게 극명한 경우는 흔치 않다.
막스 리히터 – Spring 1
가장 아름다운 소리는 어떤 과정을 통해 스피커로 표출되는가? 실텍 케이블을 적용하면 하이엔드 시스템에서 케이블 하나도 그냥 지나칠 수 없을 만큼 예민해진 모습이다. 해상력은 끝 간 데 없이 더 높아진다. 수면 아래 약간 가려져 있던 소리 입자들은 수면이 낮아진 틈을 타 위로 일시에 솟구쳐 올라와 있다. 실텍은 여기에 마치 기름을 살짝 친 듯 유연하고 촉촉하다. 이런 소리의 컬러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있겠지만 누구나 한번 들어보면 정말 매력적으로 들릴 수밖에 없다. 특히 약음들이 저역 구간에서도 모두 살아 꿈틀거린다.
뮤지카 누다 – Come together
동적인 움직임에 영향을 끼칠 거라는 생각은 일면 아이러니 같을 수 있다. 그러나 해상력, 다이내믹스, 음색 등 모든 지표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얽혀 있다. 저역은 의외로 동글동글 매우 유연하면서 자극이 없이 탄력적이다. 소리 표면 텍스처가 노골적으로 세부적으로 표현되어 당황스러울 수 있는데 한 번 자리를 잡으면 도저히 빼기 힘든 중독성이 강한 케이블이다. 저역의 전반적인 특성은 너무 타이트하게 조이지 않으며 표면도 너무 단단하거나 딱딱하게 조탁하지 않아 유연하고 부드럽게 그러나 세부적인 정보는 모두 끌어올려주는 소리다.
사이먼 프레스턴 – 바흐 – ‘Toccata & Fugue in D Minor’
고역에서 저역까지 모두 고른 음색으로 포장되어 실텍이 음색의 꽤 많은 지분을 차지해버린다. 모노 크리스탈 도체처럼 일체의 그레인이 사라진 고밀도로 촘촘한 입자가 소리를 곱게 펼쳐낸다. 다만 이런 특성이 소리를 에지 없이 물렁하게 만들 소지도 있는데 깊고 넓은 무대를 형성하면서 긴박한 줄타기를 한다. 확실히 단일 악기나 실내악에서 이 케이블은 실력을 유감없이 펼쳐낸다. 이 부분에서 과거 사운드미러 스튜디오에서 테스트했던 상황이 생각난다. 트랜스페어런트와 실텍 구형 케이블로 구성된 시스템에서 실텍을 트리플 크라운으로 변경해 테스트했던 것. 사운드미러 레퍼런스 모니터 시스템엔 여전히 실텍이 자리하고 있다.
총평
일반적으로 케이블은 앰프의 PCB 보드나 납 혹은 스피커의 크로스오버 같은 것이다. 요컨대 필요악인 것이다. 여러 해악이 있기 때문에 안쓰면 좋지만 기능적으로 꼭 필요하기 때문에 사용할 수밖에 없다. 어차피 안 쓸 수 없다면 그것의 최대 임무는 단점을 줄이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 가격이 높아짐에도 불구하고 카본, 알루미늄으로 무장하는 스피커와 값비산 부품을 투입해 PCB를 구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텍 트리플 크라운은 악영향을 최소화하는 한편 음질을 더 좋게 만들어준다. 반대로 말하면 케이블의 해악이 사라지면서 본래 시그널의 전송이 제 궤도에 올랐다고 볼 수 있다. 최악을 피한 차악이랄까? 실텍은 오히려 그 위에 더 많은 것을 얹혀 자신의 소리를 만들어내고 있는 모습이다. 케이블이 시스템을 지배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트리플 크라운은 순은 연금술로 빚은 마법 같은 존재다.
글 : 오디오 평론가 코난